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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Infobox Chinese|t=|s=|p=|w=Chien-tao|hangul=간도|hanja=間島|rr=Gando|mr=Kando|제목=간도|그림=대한제국지도간도.jpg|그림2=Map of the Greater Korean Empire.svg}}'''{{maplink |frame=yes |plain=yes |frame-align=right |frame-width=292 |frame-height=220 |frame-latitude=42|30 |frame-longitude=129|30|17 |text=Yanbian Korean Autonomous Prefecture |zoom=5 |id=Q714984 |type=shape |stroke-colour=#C60C30 |stroke-width=3 |title=Yanbian Korean Autonomous Prefecture }} '''간도'''(間島, {{zh|s=间岛|p=Jiāndǎo|h=젠다오}})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간도의 범위에 관하여는 여러 이견이 있다. 일반적으로 간도라 하면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가리키며, [[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을 '북간도'(또는 '동간도'), 그 서쪽인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도 한다. 간도(間島)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이섬'''(사잇섬)으로, 그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그 가운데 '사잇섬'이란 말 뜻에 비추어 '간도'가 본래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하중도]](河中島)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두 강의 북안(北岸)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변형된 것이라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ref>[[청나라|청]]의 봉금령 위반과 [[조선]]의 '월강죄'(현종실록, 현종 2년(1661 신축) 4월 1일 3번째기사 등)는 [[사형]]으로 논하는 중죄였다. 그러나, 좁고 척박한 토지와 상습적인 기근에 시달리던 [[함경도]] 농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이섬(間島, 간도)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몰래 강건너 비어있는 땅에 가서 도둑 농사(사이섬 농사)를 지었다.(김동석, 《한국 현대소설의 비판적 언술 양상》, 소명출판, 2008년 263쪽 등)</ref>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토문(土門)을 서로 달리 해석하면서 이 지역(동간도)에 대한 귀속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조선]]은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고 주장하였고,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시도하기도 했다. == 역사 == === 18세기까지 === '''간도'''(間島)는 [[고대]]에는 [[북옥저]]와 [[백산말갈]]을 복속한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가 이후에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았다. [[조선]]은 건국 초 [[세종대왕]] 집권기에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의 여진족을 쫓아내거나 귀화시켜 [[4군]]과 [[6진]]을 설치했으나, 두 강의 북쪽으로 영토를 밀어올리지는 않았다. [[1616년]]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후 [[1644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만주족]](여진족의 후신)의 상당수가 군사들을 따라 이 지역에서 중국 본토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본래 만주족들이 살던 지역이 공동화(空洞化)되자, [[청나라|청]](淸)은 [[강희제]] 집권기인 [[1677년]]에 '[[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백두산]]·[[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封禁地)로 정하고 [[만주족]]이 아닌 타민족의 거주와 개간, 삼림 벌채, 인삼 채취 등을 엄금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4733&cid=1587&categoryId=1587 두만강(豆滿江)]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36년]]에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의 위세를 실감한 [[조선]] 역시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연안에 대한 도강을 엄금하고 '월강죄'로 다스렸다.<ref>{{뉴스 인용|제목=간도이주 조선 초부터 시작됐다.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3&aid=0000003663 |출판사= 경향신문 |저자= 유병탁 기자 |날짜=2004-04-09}}</ref> 간도는 두만강과 그 지류인 해란강(海蘭江), 가야하(嘎呀河, 알아하), 훈춘하(琿春河, 혼춘하) 등 여러 물길의 연안을 중심으로 한 분지와 구릉으로서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한 땅이었으나, 만주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오랫동안 개간되지 못했다. 게다가 청 제국의 봉금정책으로 인해 150년 가까이 이 땅은 청조 통치자들을 위한 수렵지이자 삼(蔘) 등 약재의 채집지로 독점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이었다. === 19세기 이후 === [[19세기]]에 들어서 서슬퍼런 봉금령도 부패와 혼란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800년]] [[조선]]은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정조]]가 사망하면서 [[세도정치]]의 전횡과 부패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청나라]] 역시 [[건륭제]] 말년에 [[화신 (청나라)|화신]]의 전횡과 부패로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4년]]) 등 거듭되는 반란이 일어나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부터 [[세도정치]]의 학정(虐政)과 지방 수령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조선의 농민들이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관권(官權)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이북으로 건너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청나라]]가 [[아편전쟁]]([[1840년]] - [[1842년]] / [[1856년]] - [[1860년]])과 [[태평천국의 난]]([[1851년]] - [[1864년]])으로 혼란에 빠져 월강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지고 [[조선]]의 [[함경도]] 지방에서 [[1869년]](기사대흉년), [[1870년]](경오대흉년) 대흉년이 들자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을 건너 단속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나라|청]]의 봉금령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단속을 피해 간도에서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이주민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늘어났다. [[1881년]]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폐지하였고, [[1883년]]에 조선이 '월강금지령'을 폐지한 데 이어 [[1885년]]에 청나라가 조선인에 대한 만주 이주 금지령을 철폐하면서 조선인의 간도 유입 현상은 더욱 증가하였다. [[20세기]] 초에도 [[일본 제국]]의 침략과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항일 운동을 위해서 많은 조선인들이 이 곳으로 계속 이주했다. [[1932년]]에 일본 제국은 만주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고 간도를 관할하는 [[젠다오 성]](間島省, 간도성)을 설치했다. 간도는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고, 현재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 등이 중국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다. == 백두산 정계비 == {{본문|백두산정계비}} [[1712년]]([[숙종 (조선)|숙종]] 38년), [[백두산]] [[천지]](天池)의 남동쪽 4 km 지점에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인하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 [[정계비]]에는 [[조선|조]]·[[청나라|청]] 양국의 경계를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하고, 정계비는 그 분수령에 세워졌음을 명기하였다.<ref>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23일 1번째기사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 [[목극등]]이 이를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ref> <ref>정계(定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록 : 김지남(백두산 정계시 역관), 《북정록》. 박권(백두산정계시 조선측 대표, 접반사), 《북정일기》. [[홍세태]], 《백두산기》 김지남의 아들인 역관 김경문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김.</ref> 그러나, 청(淸)의 [[목극등]](穆克登)이 사계(査界)를 한 이후에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쑹화강]](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북평사는 설책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定界)에 참여한 이들이 정계를 잘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수원(水源)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새롭게 설책하였다.<ref>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12월 7일 3번째기사.</ref>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다른 청나라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ref>[[이익 (학자)|이익]], 《[[성호사설]]》 제2권 천지문편 "토문은 두만강이고, 음이 비슷해 잘못되었다."</ref> <ref>[[한치윤]], 《[[해동역사]]》 속집 제12권 조선편 "[[혼춘]](渾春)은 그 서쪽의 토문강까지가 20리이며, 조선과 경계이다."</ref> <ref>[[정약용]], 《다산시문집》 15권 강계고 서편 "[[세종]] 때에는 두만강 남쪽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하였으며, [[선조]] 때에는 다시 삼봉평(三蓬坪)에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천참의 국경으로 삼았다. 두만강 북쪽은 곧 옛 [[숙신]](肅愼)의 땅으로서, 삼한(三韓, [[삼국시대]]) 뒤에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모두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發源)하고, 장백산의 남맥(南脈)이 뻗쳐 우리나라가 되었는데, 봉우리가 연하고 산마루가 겹겹이 솟아 경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강희 (연호)|강희]](康熙) 만년에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황명을 받들어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니, 드디어 양하(兩河)의 경계가 분명해졌다."</ref> <ref>[[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 "두만이 곧 토문이다."</ref> == 간도 참변 == {{본문|간도 참변}} == 영유권 분쟁 == === 19세기 말의 상황 === [[1800년대]] 초부터 [[조선]]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間島)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1881년]]에는 [[연변]] 지역의 조선인이 1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연해주를 빼앗긴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년]] '봉금령'을 폐지하고 본토 주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간도에 있던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간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김우식]]에게 정계비와 그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하여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한 뒤,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양국의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이라는 전제하에 도문(圖們)과 토문(土門)은 모두 [[만주어]]에서 그 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취한 것(借字, 차자)이므로 '토문은 곧 두만강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과 [[청나라]]는 을유년(1885년)과 정해년(1887년)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하기 위한 감계(勘界) 회담을 가졌으나, 서로의 주장이 엇갈려 모두 결렬되었다.<ref>이중하(을유·정해감계에 참여), 《백두산일기》.</ref> === 20세기 이후 === [[1903년]]([[광무 (연호)|광무]] 7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시에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1903년 10월 - 1905년 5월)하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는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만주 일대를 [[러시아 제국]]에 점령당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남진은 [[1905년]]에 발발한 [[러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본 제국은 [[1907년]] [[8월 23일]], 간도에 헌병과 경찰을 들여보내 [[용정]](龍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으나,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법적 권한을 인정하고 파출소를 철수하였다.([[간도 협약]]이 체결된 당일, 청나라와 일본 제국은 [[만주 5안건 협약]]을 체결하였다.) [[1962년]] [[10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중 변계 조약]]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명확히 획정하고,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한 영토권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2000년대에는 [[한국]] 사회에서 [[간도 협약]]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시한이 100년이기 때문에 2009년 9월에 그 시효가 완성된다는 일방적 주장이 신뢰할 만한 근거 제시 없이 사실인냥 유포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간도반환 소송가능시한 3주밖에 안남아" 재미동포 피맺힌 절규|url= 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90812_0002939369|출판사= 뉴시스|날짜= 2009-08-12|확인날짜= 2009-09-12|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51016221647/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90812_0002939369|보존날짜= 2015-10-16|url-status= dead}}</ref> <ref>{{뉴스 인용|제목= 학계 "간도 100년 시효설 터무니없어"|url=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2846871|출판사= [[연합뉴스]]|날짜= 2009-09-03}}</ref> == 같이 보기 == * [[백두산정계비]] * [[조중 변계 조약]] * [[간도 문제]] * [[간도 협약]] * [[연변 조선족 자치주]] * [[장백 조선족 자치현]] * [[녹둔도]] * [[한국의 민족주의]] * [[선춘령]] == 각주 == {{각주|2}} == 외부 링크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512 〈간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http://www.cybernk.net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051742585&code=210000 경향신문 63 창간특집-못박힌 철조망 앞에서 간도·녹둔도를 기억하다 이이화 역사학자 2009-10-06] * [https://web.archive.org/web/20110901044757/http://nkland.org/ 조병현의 북한토지 연구소] * [https://web.archive.org/web/20160312114857/http://wallsan.co.kr/home/main.php?boid=30194018&csno=&key=&link=boardsdview&list_no=6&opp=&pageno=1&tg=&vid=20060119164605&vmod=gnr 백두산 지도 (분할 표시)] *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80221/88766130/1 “간도 개척, 조선 지방당국이 계획… 식민지 경영 시도한 것”] 2018-02-21 {{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의 영토 분쟁}} {{강원도 (북)의 섬}} {{전거 통제}}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간도| ]] [[분류:지린성]] [[분류:중국의 지리]] [[분류:중국-한국 관계]] [[분류:조선-청나라 관계]] [[분류:일본-중국 관계]] [[분류:일본-한국 관계]] [[분류:만주]]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분쟁]]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 분쟁]] [[분류:아시아의 영토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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