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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이름 = 겐뇨 |원어명 = 顕如 |그림 = Kennyo02.JPG |그림설명 = |본명 = |로마자 표기 = |출생일 = 1543년 2월 20일 |출생지 = |사망일 = 1592년 12월 27일 |사망지 = |국적 = |학력 = |경력 = |직업 = 승려 |병역 = |활동기간 = |소속 = 혼간지 |종교 = 정토진종 |배우자 = |상훈 = |웹사이트 = |서명 = }} '''겐뇨'''({{llang|ja|顕如}}, [[1543년]] [[2월 20일]] ~ [[1592년]] [[12월 27일]])는 [[센고쿠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정토진종]] 승려로, [[혼간지]](本願寺)파 제11세 종주이다.本願寺顕如光佐。 == 생애 == === 탄생 === [[덴분]] 12년 [[음력 1월 7일]] 혼간지 제10세 종주 [[쇼뇨]](証如)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 교단의 전성기 === [[고지 (센고쿠 시대)|고지]] 3년([[1557년]]) [[음력 4월 17일]], [[롯카쿠 사다요리]](六角定頼)의 양녀 뇨슌니(如春尼)와 결혼하였다. 뇨슌니의 아버지는 [[구게]] [[산조 긴요리]](三条公頼)지만, [[간레이]]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의 양녀가 되었다가 이 결혼 즈음에는 롯카쿠 사다요리의 양녀로 들어가 있었다. 덧붙여 뇨슌니의 언니는 [[다케다 신겐]]의 정실 산조부인(三条夫人)이다. 정략결혼<ref>호소카와 하루모토는 롯카쿠 사다요리의 사위로, 두 사람은 [[교로쿠 착란]](享禄の錯乱) 때 연합하여 [[야마시나 혼간지]](山科本願寺)를 불태웠다. 그 후 정세의 변화에 따라 혼간지와의 화해를 모색하던 하루모토와 사다요리는 겐뇨 탄생 다음해부터 부친 쇼뇨에게 혼담을 넣어와 쇼뇨를 곤혹스럽게 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이에 응했다.</ref>이라고는 하나, 부부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겐뇨 시대에 혼간지 교단은 부친 쇼뇨 시대부터 진행하고 있던 문도의 [[잇코 잇키]]를 장악하고자 힘쓰는 한편 [[간레이]]인 [[호소카와씨]]와 [[교토]]의 [[구게]] 들과의 인척관계를 강화하였다. 또한, 경제적·군사적 요충지인 [[이시야마 혼간지]]를 거점으로 삼아서, 주로 [[기나이]]를 중심으로 혼간지 파의 사원을 배치하여 [[다이묘]]에 필적하는 세력을 자랑하며 교단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 노부나가 포위망 === 그러나, 혼간지는 무가(武家)의 봉건관계 밖의 권력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히에이 산]] [[엔랴쿠지]]와 [[사카이시 (오사카부)|사카이]]의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에이로쿠]] 11년([[1568년]])에 상락하여 기나이 장악을 꾀하던 [[오다 노부나가]]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윽고 겐뇨는 노부나가와 싸울 것을 결의하고, [[겐키]] 원년([[1570년]])부터 혼간지와 오다 가문은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노다 성·후쿠시마 성 전투]](野田城・福島城の戦い)). 이 전투를 [[이시야마 전투]](石山合戦)라고 한다. 겐뇨는 노부나가와 대립하고 있던 [[세이이타이쇼군|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연합하여, 다케다(武田)·아사쿠라(朝倉)·아자이(浅井)·모리(毛利) 등의 반 오다 세력과 동맹을 맺어 [[노부나가 포위망]]을 구축하는 한편, 스스로는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농성하며 [[사이카슈]] 등의 우호적인 토호 세력과 지방의 문도 조직을 동원하여 노부나가를 괴롭혔다. 그러나, 장기에 걸친 포위전으로 점차 영지가 피폐해졌으며, 인척관계인 [[다케다 신겐]]의 지원을 기대하였으나 신겐이 상락 도중 급사하여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데다, 더욱이 [[아사쿠라 요시카게]]·[[아자이 나가마사]] 등의 동맹세력이 차례차례 오다 가문에게 멸망당하는 등 악재가 겹치자 겐뇨는 항전을 계속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깨닫고 조정에 화평의 중개역을 의뢰하였다. 겐뇨는 덴쇼 8년([[1580년]])에 노부나가가 제시한 화평 조건을 받아들여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철수하고 [[기이국]] [[사기노모리 별원]](鷺森別院)으로 옮겨 갔다. === 만년 === [[혼노지의 변]] 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기나이]]의 실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와 화해하여, 덴쇼 13년([[1585년]])에 히데요시의 도움으로 오사카 교외에 덴만 혼간지(天満本願寺)를 건립하였다. 이것은 [[도요토미 정권]]의 본거지인 오사카로 혼간지를 옮기면 감시하기 편리하며, [[오사카성]]의 [[조카마치]]를 건설하는데 혼간지와 그 문도의 경제력·기술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혼간지는 도요토미 정권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덴쇼 17년([[1589년]])에 [[교토]] [[주라쿠다이]]의 벽에 낙서를 한 범인이 혼간지 관할의 마을로 도망쳐 들어가고, 히데요시에게 추방당한 호소카와 아키모토(細川昭元)·비토 도모노부(尾藤知宣) 등을 덴만 혼간지에서 숨겨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도요토미 정권은 그해 3월에 중신 [[이시다 미쓰나리]]를 파견하여 용의자를 숨겨준 2개 마을을 파괴하였다. 호소카와 등은 체포당하지 않았으나, 숨겨준 마을 사람 모두가 교토 [[로쿠조하라]]에서 책형을 당했으며 겐뇨 본인도 히데요시에게 질책을 당하는 등 그나마 가지고 있던 영주 권력도 완전히 잃게 되었다. 덴쇼 19년([[1591년]])에는 히데요시로부터 교토에 사원 부지를 받아서 교토에 혼간지 교단을 재흥하였다. [[분로쿠]] 원년 [[음력 11월 24일]] 향년 50세로 입적하였다. 겐뇨가 사망하자, 이시야마 혼간지 퇴거 시에 노부나가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겐뇨와 의견 충돌로 대립하였던 강경파 장남 [[교뇨 (1558년)|교뇨]](教如)를 대신하여 화평파였던 삼남 [[준뇨]](准如)가 제12세 종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승복하지 않은 교뇨와 준뇨의 대립이 심화되어 결국 혼간지는 준뇨의 [[니시혼간지]]와 교뇨의 [[히가시혼간지]]로 분열하게 되었다.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전임후임 |직책=[[혼간지]] 종주 |대수=11 |전임자=[[쇼뇨]] |후임자=[[교뇨 (1558년)|교뇨]] }} {{전거 통제}}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1543년 출생]] [[분류:1592년 사망]] [[분류:오타니가]] [[분류:센고쿠 시대 사람]] [[분류: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사람]] [[분류:일본의 승병]] [[분류:셋쓰국 사람]] [[분류:16세기 일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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