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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이름 = 남연군 |원래 이름 = 南延君 |작위 = [[군 (작위)|군(君)]] |휘 = 이구 <br/> 李球 |출생일 = [[1788년]] [[8월 22일]]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836|3|19|1788|8|22}}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병사(소갈증과 신장풍의 합병증) |별칭 = [[아명|아명(兒名)]]은 '''이채중'''('''李采重''' 또는 '''寀重''') <br /> [[자 (이름)|자(字)]]는 치수(稚受) <br /> [[시호|시호(諡號)]]는 영희(榮僖)·충정(忠正) |종교 = [[유교]]([[성리학]]) |왕가 = [[조선]] |배우자 = [[군부인]] [[여흥 민씨]] |부모 = [[은신군]](양부) <br /> [[군부인]] [[남양 홍씨 (토홍)|남양 홍씨]](양모) <br /> [[이병원]](생부) <br /> [[연일 정씨]] 부인(생모) <br /> [[광주 김씨]] 부인(친계모) |자녀 = 슬하 4남 1녀 <br /> 4남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친인척 = [[조선 장조|장조]](양조부) <br /> [[이진익]](친조부) }}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년]] [[8월 22일]] ~ [[1836년]] [[3월 19일]])는 [[조선]] 시대 후기의 문신, 왕족으로 이름은 구(球), 자는 치수(稚受)이며 원래 이름은 채중(采重) 또는 채중(寀重)이다. 시호는 영희(榮僖)·충정(忠正)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며, [[대한제국 고종|고종]][[대한제국의 역대 황제|황제]]의 할아버지이다. 원래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뒤에 아들 없이 사망한 [[사도세자]]의 넷째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살아생전 행적 보다 사후 그 무덤이 [[독일]]의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일행에게 훼손당한 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철종실록]]에 의하면 그는 모범적 왕족의 한 사람으로 지명되었지만<ref>철종 4권, 3년(1852 임자 / 청 함풍(咸豊) 2년) 7월 10일(무오) 1번째기사, 부교리 김영수가 상소하여 환첩을 단속할 것·종친의 기거를 제한할 것 등을 청하다.</ref>, 근무지 이탈 및 양자로 입양되었음에도 생가 근처에서 생활한 일, 권력남용 등으로 지탄을 받아 순조실록에 기록되었다.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능창대군|능창군]]의 7대손으로 왕위 계승권에서는 멀었으나 그가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계동궁]]의 상속권 및 왕위 계승권에 근접하게 되었다.<ref>인조의 명에 의해 인평대군은 능창군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호적상 7대조는 능창군이며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 씌여진 이왕가 왕족의 호적기록에도 원종과 능창군부터 명시하였다.</ref> 봉서 [[심낙흥]](鳳西 沈樂興)의 문인이다. == 생애 == === 생애 초반 === [[1788년]](정조 12) [[8월 22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남연군은 [[조선]] [[조선 인조|인조]]의 후손으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5대손인 [[진사]] [[이병원]](李秉源)과 [[통덕랑]] 정의환(鄭義煥)의 딸 연일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 연일정씨를 잃고, 아버지 이병원은 광주김씨 김진구(金鎭九)의 딸과 재혼하였다. 원래 이름은 채중(寀重)이었는데, 순조 때인 [[1815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구(球)로 개명하였고 남연군에 봉해졌다.<ref name="ㅇㅇ">{{뉴스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82%A8%EC%97%B0%EA%B5%B0&keyword=%EB%82%A8%EC%97%B0%EA%B5%B0|제목=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 남연군 검색 결과|확인날짜=2009-01-30}}</ref> [[인평대군]]은 다시 자신의 삼촌 [[능창대군]]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그는 본가 호적상으로는 [[능창대군]] 이전의 7대손이 된다. 후일 [[흥친왕]]의 일대기를 [[조선총독부]] [[이왕직]]에서 정리한 이희공실록에도 [[인평대군]]이 인조의 아들이라는 점을 서술하면서 삼촌 능창대군의 양자가 된 점을 기록해두었다. 그의 가계는 [[능창대군]]의 양자인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일찍 요절한 [[복녕군]]의 5대손이다.<ref>호적상 [[조선 원종|정원군]]-[[능창대군]]-[[인평대군]](양자)-[[복녕군]]-의원군-안흥군-이진익-이병원-남연군으로 이어진다.</ref> [[복녕군]]의 가문은 [[숙종 (조선)|숙종]] 때의 [[삼복의 변]]에는 연루되지 않아 몰락하지 않고 왕족의 신분을 유지했지만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복녕군의 손자인 안흥군의 대에서 끊어졌다. 생가 할아버지 이진익과 생부 이병원은 평민 신분이었고, 생가 할아버지 이진익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판]]을 지내고 [[증직|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생부 [[이병원]]은 훗날 관직이 없이 [[진사]]로 사망하게 되지만 특별히 [[증직|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초기에 그는 봉서 [[심낙흥]](鳳西 沈樂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후일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는 자신의 문집 중암집에 [[심낙흥]]의 행장을 기록했고, 성재 [[유중교]](省齋柳重敎)는 심낙흥의 묘비문을 짓기도 했다. [[1815년]](순조 15) 아들없이 죽은 은신군의 양자를 택정할 때 선발되어, 그해 [[12월 9일]] [[조선 순조|순조]]의 명으로 자녀 없이 죽은 [[은신군]]의 양자로 지명되어 남연군의 작위를 받고, 이름을 채중에서 구로 고쳤으며, [[소의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816년]] [[중의대부]]로 승진하였고, [[현륭원]] 참봉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계동궁에 보내졌지만, 자신의 본가 근처에서 생활하였고 이는 [[조선 순조|순조]] 16년 [[7월]] 그의 다른 비행들과 함께 전 정언 이이희로부터 탄핵당하게 된다. === 관료 생활 === [[1815년]] [[12월 20일]] [[수원관]](守園官)으로 차출되었다.<ref name="ㅇㅇ" /> 그러나 수원관으로 차출되었으면서도 제사 보다는 [[용주사]]에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으며, [[이조 (육조)|이조]]나 [[예조]]의 소속 관원도 아니면서 능참봉의 인사에 관여하였다. 이는 그대로 문제시되었지만 함구되다가 [[1816년]](순조 16) [[7월 13일]] 이이희(李履熙)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인용문2|만약 윤리를 어지럽힌 죄를 논한다면, 남연군 이구가 바로 그 사람 입니다. 경박한 성품과 패악한 버릇 때문에 선비로 있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종친이 되어서도 옛날의 버릇을 고치지 않고 혼궁에 들어오자마자 병을 칭탁하고 집에 돌아가 평인(平人)처럼 고기를 구워 먹고 [[주사위]]를 던졌으며, 〈수원관(守園官)으로서〉 원소(園所)에 가서는 고을의 노예를 데리고서 [[용주사]](龍珠寺)의 꽃과 버들 속에 술에 취하여 평립(平笠)을 벗어버렸으며, 연지(蓮池)에 고기를 잡으면서 포건(布巾)을 거꾸로 썼습니다. 무뢰배를 불러 모아 백성의 가산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백리 안의 사람들이 가게를 닫고 도망해 피하였습니다. 악한 행실은 바로 짚자리를 깔고 거처하는 곳인데, 요사스러운 기생들을 데리고 와서 낭자하게 술을 마시고 즐기었으며, 혼궁 앞에서 가마를 타고 곧바로 들어오고, 침원(寢園)에서 가마를 타고 마음대로 달리는 등 흉패(凶悖)한 행동이 갈수록 더욱 심하였습니다. [[능]]의 [[참봉]]을 바꾼 것으로 말하더라도 한달 전에 강제로 그 수종자(隨從者)를 바꾸고 곧바로 그의 형으로 차출하였으니, 이것도 조정을 얕잡아 보는 하나의 큰 안건입니다. 이와 같은 흉하고 더러운 무리를 결코 수원관이나 가까운 종친의 서열에 둘 수 없습니다.<ref>순조 19권, 16년(1816 병자 / 청 가경(嘉慶) 21년) 7월 13일(경신) 1번째기사, 이이희가 상소하여 남연군 이구의 악행을 고하므로 그의 관직을 삭제하다</ref>}} 그러나 [[조선 순조|순조]]는 입양의 형식이지만 자신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을 무마시키고 이이희의 자격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7월 15일]] 남연군에게 사람을 보내 위로하였다.<ref>순조 19권, 16년(1816 병자 / 청 가경(嘉慶) 21년) 7월 15일(임술) 2번째기사, 남연군이 대죄하고 있다고 하므로 체모를 손상할까 염려하여 대죄하지 말라고 하다.</ref> 1816년 [[12월 17일]] 중의대부로 승진했다. [[1817년]] 수원관으로 재직 중, 수원관 근무의 공로를 인정받아 [[12월 15일]] 안구마(鞍具馬)와 노비·전결(田結)을 상으로 받고, 1817년 [[12월 17일]]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남연군 집 하인들이 일반민의 재산을 빼앗았고, 남연군 집의 문객인 장삼철(張三哲)·최치성(崔致聖)은 허위 문서를 만들어 타인의 채권을 가로채자 [[1819년]] [[형조]]로부터 거듭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인용문2|부교리 임안철(林顔喆)의 논계(論啓)로 인하여 남연군궁(南延君宮)의 하속(下屬)이 간사한 짓을 하고 공갈 협박하여 평민에게 해를 끼친 정상을 거듭 조사한즉, 장삼철(張三哲)·최치성(崔致聖) 두 사람이 문하에 출입하여 도서 문적(圖書文蹟)을 청촉하여 만들어 내고, 타인의 채권을 궁전(宮田)이라 핑계대어, 지평(砥平)에 사는 고성인(高姓人)에게 전화(錢貨)를 강제로 수봉(收捧)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ref name="jangsam">순조 22권, 19년(1819 기묘 / 청 가경(嘉慶) 24년) 12월 9일(정유) 1번째기사, 형조에서 남연군궁 하속의 간사한 짓을 조사한 것을 아뢰다</ref>}} 순조는 '나이 어리고 마음이 약해서 남의 꾐에 빠져 이와 같은 패려궂은 짓을 하였으니, 매우 놀랍다. 그 죄상을 논한다면 유방(流放)하여도 오히려 헐하다 하겠으나, 그 노모를 생각하여 우선 보류하라. 남연군(南延君) 구(球)에게 삭판의 율을 시행하여 허물을 뉘우치고 몸을 신칙하게 하며, 잡인과 접촉 못하게 하고 궁속을 단속하여 개과 천선을 도모(圖謀)하도록 하라.'며 가볍게 견책하고 직책을 박탈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지었다.<ref name="jangsam"/> 그러나 1년만에 그는 다시 복직되었다. [[1820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고 같은 해에 [[숭헌대부]]로 승진했다. [[1820년]](순조 20) [[7월 21일]] [[의녀]]를 잡아다가 종아리를 후려쳤다가 [[송상렴]](宋祥濂)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7월 25일]] 서용의 명을 받았다. [[1820년]] [[9월 7일]] 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9월 11일 개차되었지만 다시 9월 18일에 도총관으로 복직되었다. [[1821년]] [[1월 1일]] 가덕대부가 되고 이후 수릉관, 재궁상면상자서사관(梓宮上面上字書寫官) 등을 지냈다. [[1822년]](순조 22) [[3월 12일]] [[가덕대부]]가 되었다. 그해 [[3월 22일]] 생가의 아버지 이병원이 나이 71세가 되었음을 들어, 몽은(蒙恩, 노인에게 은전을 베푸는 것)을 상언하여 순조에게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 생애 후반 === 약간의 한학을 하던 그는 직접 네 아들을 가르쳤는데, 그중 넷째 아들의 재주가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그는 화가이자 학자인 추사 [[김정희]]와는 이종사촌간이 되었는데, 김정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남양홍씨와 그의 양어머니이자 은신군의 부인 남양홍씨는 자매간이었다. 이 인연으로 그는 특별히 자신의 넷째 아들 [[흥선대원군|흥선군 하응]]을 [[김정희]] 문하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다. [[1821년]](순조 21) [[가덕대부]]로 승진했다. 1821년 [[4월 10일]]에 [[효의왕후]]가 자경전(慈慶殿)에서 사망하자 남연군은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차출되었고, [[수릉관]](守陵官)에 겸임되었다. 그러나 양어머니 남양홍씨의 상을 당하여 그해 [[11월 13일]] 수릉관에서 면직되었다. 후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ref>[[민유중]]의 형</ref>의 4대손 [[민경혁]]의 딸 군부인 여흥민씨와 결혼하여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4남과 1녀를 두었다. 다시 정조의 묘 건릉 수릉관이 되었다가 건릉의 수릉관으로 재직하는 공로로 건릉 수릉관 재직 중인 [[1822년]] 의덕대부, 이후 수릉관 재직 공로로 [[1825년]] [[1월 12일]] 흥록대부로 승진했다. 1826년 1월 선농단초헌관, [[1828년]](순조 28) [[4월]] [[청나라]]에 진하사가 파견되자 진하 정사(陳賀正使)로 부사(副使) 이규현(李奎鉉), 서장관(書狀官) 조기겸(趙基謙)을 대동하고 연경에 다녀왔다. 그해 [[8월 12일]]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청나라]] 황제의 친필을 [[조선 순조|순조]]에게 전달하였다.<ref>순조 30권, 28년(1828 무자 / 청 도광(道光) 8년) 8월 12일(기묘) 1번째기사, 진하 정사 이구 등이 [[청나라|청]] 황제가 친신을 보낸 것에 감사를 표한 사실을 아뢰다</ref> [[1829년]] [[3월]] [[영조]] [[조선 진종|진종]], [[정조]]의 [[어필]] 간행을 상주하여 성사시켰다.<ref>순조 30권, 29년(1829 기축 / 청 도광(道光) 9년) 3월 6일(경자) 2번째기사, 남연군 이구가 영조·진종·정조 어필의 간행을 건의하다.</ref> [[1828년]](순조 28) [[2월 1일]] 장남 [[흥녕군]] 이정응이 19세로 요절했고 [[1831년]]에는 부인 여흥민씨가 사망했다. [[1832년]](순조 32) 종묘, 영녕전 춘향대제(宗廟, 永寧殿春享大祭)에 인의인헌관으로 참석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고, [[1833년]] [[2월 22일]]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재임명되었으며 [[1834년]] [[현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34년]] [[11월 13일]] [[조선 순조|순조]]가 사망하자 왕세손 [[조선 헌종|헌종]]의 명으로 종척 집사로 빈전에 참여하였다. 그는 [[안동 김씨]] 세도하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내었는데 [[1822년]]부터는 [[당뇨병|소갈증]]과 [[신장병|신장풍]]으로 14년간 앓다가 1836년 [[3월 19일]]에 병사하였다. === 사후 === [[파일:Tomb of Prince Namyeongun 01.jpg|섬네일|250px|남연군의 묘]] [[파일:Tomb of Prince Namyeongun 02.jpg|섬네일|250px|남연군의 묘 원경]] 1836년에 죽은 후에 처음에는 [[경기도]] [[마전현]] 미산면 백자동(지금의 대한민국 [[연천군]] [[미산면 (연천군)|미산면]])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연천군)|남면]] 남송정(南松亭, 현 [[연천군]] [[군남면 (연천군)|군남면]] 진상리 큰피우개(大稷洞) 부락)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충청도]] [[덕산현]] 덕산면 상가리(현 [[예산군]] [[덕산면 (예산군)|덕산면]] 상가리 5-29)로 개장되었다. 아들 [[흥선대원군]]은 약령(弱齡)에 부모상을 잇달아 당한 뒤 삼년상을 마치고 풍수가들이 길지라 일컬은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 (충청남도)|가야산]] 중턱의 석탑(石塔)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이때 가야사에 의문의 방화가 난 뒤, [[흥선대원군]] 형제는 가야사가 소실된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의 시신을 묻으려 땅을 팠지만 큰 돌이 있어 깨지지 않았다 한다. 두 형 [[흥완군]]과 [[흥인군]]은 밤에 도사가 나타나 자신의 집을 부순 대가를 받게 하겠다고 저주했고, 두 형의 악몽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네가 사람의 자손이라면 아버지를 좋은 곳에 모시려는 뜻을 저버릴수 없다며 호통친 뒤 돌이 깨졌다 한다. [[1845년]] 덕산 가야산 북쪽 언덕 구광지에 이장되었던 그의 시신은 다시 이장되어, [[1846년]] [[3월 18일]] 같은 가야산 가운데 언덕 건좌(乾坐)로 이장되었다. 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예산 가야사지|가야사]]를 불태웠다. 고종은 그 덕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여 가야산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웠다.<ref>[[이순익]](李淳翼)이 찬(撰)한 흥선대원군묘지명(墓誌銘)에 의한다고 {{서적 인용 |저자=[[김명호]] |제목=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 |원본연도=2005 |출판사=역사비평사 |쪽=252 }}에서 인용.</ref>[[1866년]]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묘소를 도굴]]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묘소는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80호 《[[남연군의묘]]》로 지정되었다. 사후 [[조선 순조|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첫 시호는 영희(榮僖)였고 뒤에 고종 때 가서 시호가 개정되어 [[1864년]](고종 1) [[7월 9일]] 충정(忠正)의 시호가 내려졌다. 손자 [[대한제국 고종|명복]]이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1864년]](고종 1년) [[의정부]][[영의정]] [[조두순 (1796년)|조두순]] 등의 발의로 [[불천지위]]에 올랐다. 비석과 신도비는 손자 고종이 즉위한 후인 [[1865년]] [[5월]]에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던 [[김병학]]이 짓고, 비석의 글씨는 종정경을 겸하던 아들 [[흥인군]]이 썼으며, 그의 손자인 [[이재원 (1831년)|이재원]]이 새겼다. [[1868년]](고종 5) [[5월 10일]] 저녁, 통상 수교 요청을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 묘가 도굴 당하려 했으나 봉분 아래에 큰 무쇠에 도끼가 튀어 실패하였다. 그러나 남연군묘 도굴 미수사건은 서양인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감정을 자극하여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 가족 관계 == * 조부 : [[이진익]](李鎭翼, [[1728년]] - [[1796년]]), 증 영의정 ** 숙부 : 이병준(李秉濬) * 생부 : [[이병원]](李秉源, [[1752년]] - [[1822년]]), [[진사 (칭호)|진사]], [[영의정]]에 추증 * 생모 : 증 정경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 형 : [[이도중]](李䆃重, [[1784년]] - [[1872년]]), 공조판서 ** 동생 : 이휘중(李彙重, [[1803년]] - [[1888년]]) *** 조카 : [[이명응]](李明應, [[1827년]] - [[1895년]]), 형조판서 **** 종손 : 이재택(李載宅, [[1861년]] - ?) - [[이관용 (황족)|이관용]]의 생부 * 양조부 : [[낙천군]](洛川君, [[1720년]] - [[1737년]]) - [[연령군]]의 양자 * 양부 : [[은신군]](恩信君, [[1755년]] - [[1771년]]) - [[조선 장조|장조의황제(사도세자)]]의 서자 * 양어머니 : 남양홍씨, [[홍대현]]의 딸, [[홍대용]]의 종질녀 ** 부인 : 군부인 여흥민씨([[1784년]] [[6월 26일]] - [[1831년]]),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 장남 : [[이창응]](李昌應, 흥녕군(興寧君), [[1809년]] - [[1828년]]) *** 차남 : [[이정응]](李晸應, 흥완군(興完君), [[1814년]] - [[1848년]]) **** 손자 : [[이재원 (1831년)|이재원]](李載元, [[1831년]] - [[1891년]]) - 백부 [[흥녕군]](興寧君) [[이창응]](李昌應)에게 출계. *** 삼남 : [[이최응]](李最應, 흥인군(興寅君), [[1815년]] - [[1882년]]) **** 손자 : 이재긍(李載兢, 1857년 - 1881년 1월 23일) *** 사남 : [[이하응]](李昰應,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 [[1820년]] - [[1898년]]) **** 손자 : [[흥친왕]](興親王, [[1845년]] - [[1912년]]) **** 손자 : [[조선 고종|고종황제]](高宗) **** 서손자 : [[이재선 (1841년)|이재선]](李載先, ? - [[1881년]]) *** 장녀 : 신억(申檍, [[음서]]로 [[관찰사]], 판서 역임, 증 판서 신명구(申命求)의 아들)의 처 {{운현궁 가계도}} == 참고 자료 == *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82%A8%EC%97%B0%EA%B5%B0&keyword=%EB%82%A8%EC%97%B0%EA%B5%B0 조선왕조실록] == 각주 == <references/> == 같이 보기 == {{Col-begin}} {{Col-3}} * [[운현궁]] * [[조선 순조|순조]] * [[조선 철종|철종]] * [[대한제국 고종|고종]] * [[대한제국 순종|순종]] * [[은신군]] * [[은언군]] * [[조선 장조|사도세자]] * [[낙천군]] * [[연령군]] * [[흥선대원군]] * [[흥인군]] {{Col-3}} * [[오위도총부]]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흥녕군]] * [[흥완군]] * [[이재선 (1841년)|이재선]] * [[전계대원군]] * [[이준용]] * [[이문용 (왕족)|이문용]] * [[이관용 (황족)|이관용]] * [[김정희]] * [[홍대용]] * [[홍대현]] {{Col-3}} * [[인현왕후]] * [[민정중]] * [[민유중]] * [[여흥부대부인]] * [[민치구]] * [[예산 가야사지]] {{Col-end}} {{운현궁 가계도}} {{전임후임 |전임자 = [[은신군]]<br />(양아버지) |후임자 = [[이재원 (1831년)|완림군 이재원]]<br />(손자) |대수 = 4 |직책 = [[계동궁]] 종주 |임기 = [[1815년]] - [[1836년]]| }} {{종묘배향공신}}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1788년 출생]] [[분류:1836년 사망]] [[분류:음서]] [[분류:조선의 문신]] [[분류:유교인|이구]] [[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당뇨병으로 죽은 사람]] [[분류:조선의 왕족]] [[분류:조선의 외교관]] [[분류:전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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