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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문서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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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rean Commission in Washington D.C.jpg|섬네일|구미위원부 건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미국]], [[유럽]] 측 대표기관으로,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미한국대사관]]의 전신이다.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이 [[미국]]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했으며, 그해 [[9월 11일]] 전세계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로 공식화하였다. 공식 명칭은 '''구미주차한국위원회'''(歐美駐箚韓國委員會,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이다.<ref name="sgd">{{웹 인용|url=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776|제목=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rchive-date=2020-10-09|url-status=|확인날짜=}}</ref> 이후 북미주와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 등지의 교민 사회에 '지방위원부'가 설치되었으며, [[서재필]]이 이끌던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 [[김규식]]이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의 파리위원부도 구미위원부의 관할 아래 포함시켰다.<ref name="qwe">{{웹 인용|url=https://terms.naver.com/entry.nhn?cid=62049&docId=2829607&categoryId=62049|제목=임시정부, 리더십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네이버 지식백과}}</ref>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미국]], [[유럽]] 측의 대표 기관이자 임시정부의 미국 주재 대사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주미, 유럽 동포와 한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홍보와 모금 활동, 한국의 독립 승인 외교 활동 등을 하였다. [[1925년]] [[3월 10일]] 철폐령이 내려졌다가, [[1941년]] [[6월 4일]]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로 복설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미한국대사관]]으로 바뀌었다.<ref name=":2">{{웹 인용|url=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614|제목=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 역사 == === 설립 (1919) === [[파일:Syngman Rhee and Kim Kyu Sik (Original Photo).jpg|왼쪽|섬네일|[[1919년]], 구미위원부 시절 [[이승만]]과 [[김규식]] [[워싱턴]]에서.]] [[1919년]] [[8월 25일]], 임시 집정관총재 [[이승만]]이 [[워싱턴 D.C.|워싱턴 D. C.]]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10_00010|제목=1) 大韓民國 特派 歐美駐紮委員部 設置 條款|성=|이름=|날짜=1919-08-25|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19년]] [[9월 11일]] 전세계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로 공식화하였다. 공식 명칭은 '''구미주차한국위원회'''(歐美駐箚韓國委員會,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이다.<ref name=":0" /> [[1919년]]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에 [[김규식 (1881년)|김규식]]이 임명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40_0010|제목=1) 歐美委員部 組織文, 公債票 發賣文 配布 要請. 附:公布文|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후 북미주와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 등지의 교민 사회에 '지방위원부'가 설치되었으며, [[서재필]]이 이끌던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 [[김규식]]이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의 [[파리위원부]]도 구미위원부의 관할 아래 포함시켰다.<ref name=":1" /> 숙소는 포틀랜드 호텔, 사무실은 [[백악관]]과 근접한 H가(街) 14번지에 있는 15층 남짓의 컨티넨탈 빌딩 두 방을 얻어서 활동하였다.<ref name=":10">{{서적 인용|제목=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성=林炳稷|판=1964|출판사=女苑社}}</ref><ref>{{서적 인용|제목=내일을 위한 證言 : 許政回顧錄|성=許政|판=1979|출판사=샘터사|쪽=p. 75-75}}</ref> 공관에서는 한국 독립을 돕는 미국의 명사들을 초청해서 간소한 행사도 열었다.<ref name=":11">{{서적 인용|제목=人間 李承晩|성=李元淳|판=1965|출판사=新太陽社|쪽=p. 227-228}}</ref> === 독립공채표 발매 (1919) === {{여러그림 | 정렬 = right | 방향 = vertical | 머리말 = | 크기 = 200 | 그림1 = Independence Bond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jpg | 설명1 = [[1919년]] [[9월 1일]] 발행된 10달러 독립공채표. | 그림2 = Korean Commission Receipt.png | 설명2 = [[1920년]] [[8월 13일]], [[송헌주]]가 보낸 독립기금 95달러 영수증. }} [[1919년]] [[9월 12일]], 구미위원부는 [[독립공채표]] 혹은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10_00020|제목=2) 공채표 발매|성=|이름=|날짜=1919-09-12|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40_0010|제목=1) 歐美委員部 組織文, 公債票 發賣文 配布 要請. 附:公布文|성=|이름=|날짜=1919-09-12|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 공채를 소화시키기 위해서 미 대륙을 양분하여 동서부에 각각 1명, 하와이와 쿠바, 멕시코 등지에 각각 1명씩을 선발하고 그들로 하여금 교포들을 일일이 찾아가 호응을 얻도록 하였다.<ref name=":11" /> [[독립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 원래 이 애국공채는 한국의 건국시에 공채 형식으로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84년]] [[6월 28일]], [https://www.law.go.kr/%EB%B2%95%EB%A0%B9/%EB%8F%85%EB%A6%BD%EA%B3%B5%EC%B1%84%EC%83%81%ED%99%98%EC%97%90%EA%B4%80%ED%95%9C%ED%8A%B9%EB%B3%84%EC%A1%B0%EC%B9%98%EB%B2%95%EC%8B%9C%ED%96%89%EB%A0%B9/(11444,19840628) 독립공채상환에관한특별조치법]<ref>약칭 독립공채상환법</ref>이 제정되어 채권에 명시된 액면가 금액에 소정의 이자를 합산하여 지불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총수입은 69,000달러였는데, 이 가운데 인구세는 2,940달러로 4.3%, 애국금은 44,583달러로 64.6%를 차지했다. 또 구미위원부에서 송금해온 돈도 12,354달러로 17.9%를 점했다. 애국금의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1920년까지 애국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공채 판매액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직접 미주 지역의 모든 재정을 관할하고 공채도 자신의 책임하에 발행하겠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임시정부로부터 미주의 재정업무를 위임받아 애국금 등을 관장하고 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애국금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이미 임시정부로부터 위임을 받아 수납해온 것이니 취소할 수 없고, 공채는 장차 주미재무관을 파견하여 발행하겠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했다. 이승만은 크게 반발했다. 결국 임시정부는 [[이동녕]], [[이시영 (1868년)|이시영]]의 주장에 따라 공채 발행을 구미위원부에 위탁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1920년 6월부터 임시정부에 송금을 시작했는데, 그 액수는 1919년 8월 이후 2년 동안 구미위원부 총 지출액 91,640달러의 18%인 16,452달러였다.<ref name=":1" /> [[1920년]] [[8월 7일]] [[김규식]]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회장 이종관을 구미위원부 하와이구역 시찰원에 임명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30_0030|제목=3) 하와이구역 시찰원 위촉. 부:위임장|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김기창을 구미위원부 멕시코구역 시찰원에 임명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30_0040|제목=4) 멕시코구역 시찰원 위촉. 부:위임장|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외교활동 (1919~1925) === [[파일:임정 구미위원부 일동.jpg|섬네일|380px|[[1920년]] [[3월 1일]],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 앞줄 왼쪽부터 [[이희경]]<ref>초대적십자회장을 역임한 이희경 의학 박사</ref>, 송헌주, [[이승만]], [[김규식]], [[노백린]] 뒷줄 왼쪽부터 [[남궁염]], [[임병직]], 식모 신 씨<ref>구미위원부에서 살림을 맡던 여성.</ref>, 신형호.]] 한 외교사절기관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업무범위나 대상에서는 구미(유럽과 미국)라는 이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주미대사관, 주한미대사관 등의 범위보다는 넓은 유럽과 미국을 대상으로 한 외교기관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나 활동무대가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며 성격상 정식 대사관은 아니었다. === 현순 사태 및 김규식 사퇴 (1921) === [[파일:7481koreancommissionmembers.png|섬네일|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던 [[김규식]], [[이승만]], 송헌주.]] [[1920년]] [[9월 28일]] 임정 대통령 [[이승만]]과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현지 취임을 위해 미국을 떠나 [[상하이시|상하이]]로 가기 전에 [[현순]]에게 위원장대리(서리)를, [[정한경]]에게 서기를 맡겼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10_0080|제목=8) 대통령 · 구미위원장 부재중 업무처리 지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70_0080|제목=8) 委員長 不在時 委員 玄楯이 代理하는 件|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승만]]은 [[1920년]] [[12월]], [[김규식]]은 [[1921년]] [[1월]] 임정에 도착하였다. [[1921년]] [[3월 9일]] 구미위원부 위원장서리 [[현순]]은 [[이승만]]에게 보낸 업무보고에서 [[워런 G. 하딩]]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일관계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이승만]]에게 알리면서 구미위원부를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개편하여 미국 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 후 [[현순]]은 독단적으로 '주미대사'라는 직함을 사용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1exp|제목=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7 17권 구미위원부 Ⅰ > 해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에 [[1921년]] [[4월 14일]] 오전에 [[이동녕]], [[이시영 (1868년)|이시영]], [[안창호]], [[신규식]], [[신익희]], 김규식이 임정 대통령 [[이승만]]의 사저를 내방하였다. [[이승만]]은 "지금 구미위원부 일이 매우 절박합니다. [[현순]]은 마땅히 파면해야 하며 [[서재필]] 박사가 임시위원장에 피선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비록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에 찬동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규식]]이 사면장(辭免狀)을 내면서 "뜻을 결정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아직까지 지연되어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김규식]]은 "내가 이와 같은 문제에 답을 하지 못했는데, 나는 그 (내용)을 알지 못하겠다"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20_0180|제목=18) 備忘錄:歐美委員部 金奎植 辭任 狀況|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즉 당시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이 위원장서리 [[현순]]이 일으킨 파동에 대해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된 것이다. [[1921년]] [[4월 25일]] [[김규식]]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ref name=":4">{{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20_0110|제목=11) 歐美駐箚委員部 委員長 依願免職|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4월 26일]] [[현순]]은 구미위원부 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ref name=":5">{{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20_0120|제목=12) 歐美委員部 委員 玄楯 解任|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4월 26일]] [[서재필]]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ref name=":6">{{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20_0140|제목=14) 歐美駐箚委員部 委員長 兼任|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4월 29일]] [[김규식]]은 임정 학무총장직을 사퇴하였다.<ref name=":0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5_0030_00020|제목=2. 각료 · 국무원 · 국무위원 명단|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워싱턴 군축 회담에 대표단 파견 (1921) === [[파일: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 촬영 영상 (1921. 8. 16.).webm|thumbtime=26|왼쪽|섬네일|291x291px|[[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 회의|워싱턴 군축 회담]]에 참가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이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ref>파테 뉴스(Pathe News)와 주간 국제뉴스(International News Weekly)가 [[금문교]] 공원에서 촬영하였다.</ref>]]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태평양회의(對太平洋會議)' 외교 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태평양 회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ref name=":1">{{서적 인용|제목=雩南 李承晩|성=許政|판=1970|출판사=太極出版社|쪽=p. 155-160}}</ref> 당시 이승만은 밀항하여 [[상해]]에 와 있었는데 [[1921년]] [[5월 20일]], 많은 임시정부 요인과 교포들의 환송을 받으며 미국 기선 컬럼비아 호를 타고 [[필리핀]]의 [[마닐라]]를 거쳐 [[워싱턴]]으로 향하였다.<ref name=":1" />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는 파견된 대표단의 활동을 뒤에서 후원하였으며, [[뉴욕]]에서도 후원회가 조직되어 대표단의 외교 경비를 뒷받침해 주었다.<ref name=":1" /> 특히 뉴욕서 유학하던 [[조병옥]], [[허정]] 등의 청년 유학생들이 함께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ref name=":1" /> 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 회담(Washington Naval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ref name=":9">{{서적 인용|제목=Log Book : 이승만 일기|성=David P. Fields 외 공편|판=2015|출판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쪽=p. 111}}</ref><ref name=":14">『Oakland Tribune』, 1921년 8월 17일자 기사</ref> 오전 8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 도착하자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이승만을 인터뷰 하였다.<ref name=":9" /><ref name=":14" /> 이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한국민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워싱턴으로 돌아왔으며, 회의가 미국 영토에서 열리기 때문에 파리 평화회의에서처럼 한국 대표들이 일본 외교관들에게 질식을 당하지는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ref name=":9" /><ref name=":14" /> [[파일:Residence of Korean Mission.jpg|섬네일|[[1921년]] [[12월 25일]], 구미위원회 [[워싱턴 D.C.|워싱턴]] 본부 건물.]]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국 대표가 공식적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꾸리기 시작하였다.<ref name=":1" /> 임시정부 대표단이 공식적이라는 인상을 가능한 띄기 위하여 이승만의 평생의 [[독립운동]] 동지인 국제 [[통신사]]인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젊은 기자 [[J. 제롬 윌리암스]] 주선으로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기자 회견]]을 열고 억압에 눌린 [[한국인]]들의 투쟁사를 설파하며 [[기자]]들을 통해 먼저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도록 노력하였다.<ref name=":1" /> 그러나 이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임시정부가 과연 한국민의 전체를 대표한 것인지 의문을 품는 자들도 상당하였다.<ref name=":1" /> 이에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공식 신임장을 전보로 요청하였고 [[1921년]] [[9월 29일]], 다음과 같은 신임장을 받게 되었다.<ref name=":1" /> {{인용문|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9월 25일]], 정식으로 전 각료의 특별 회의를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음을 이에 밝히는 바이다. 즉,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군비 축소회의에 전권을 가질 한국 대표단을 다음과 같이 선정 임명한다. '''전권대사 이승만, 전권부사 [[서재필]], 비서관 [[정한경]], 고문관 [[프레드 A. 돌프]]''' 전권 대사에게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며 대표 1명을 더 추가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대표단의 전 인원은 5명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본 군축 회의에 한국 문제에 관한 주장을 제의할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군축 회의에서 제기되는 모든 협정, 의정서, 조약 일체에 대한 협정 및 체결을 할 권한을 부여하는 바이다.<ref name=":1" />}}[[파일:Syngman Rhee and Fred A. Dolph.jpg|섬네일|[[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의 교섭을 위한 [[구미위원부]] 팀 단체 사진. 앞줄 왼쪽 끝이 이승만, 타이피스트 메이본 여사<ref>Mayborne, Etta Irene (1857~)</ref>, 법률 자문관 프레드 돌프<ref>Fred A. Dolph (1875~)</ref>.]]이 신임장을 미국 대표단의 단장인 허그스 [[미국의 국무장관|미 국무장관]]과 군축 회의 사무국에 직접 제출하고 한국 대표단이 이 회의에 정식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렇다할 아무런 회답도 얻지 못하였다.<ref name=":1" /> 그래서 한국 대표부는 [[옵저버]]로서라도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ref name=":1" /> 그러나 끝내 목표한 바는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법률자문|법률 고문]]이었던 프레드 돌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논설이 [[1921년]] [[12월 1일]]자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결과만을 달성했다. 애초에 [[제국주의]] 열강간의 과도한 군비경쟁 해소 및 이권 조정이 회의의 목적이였던만큼 그들의 [[식민지]]에 대한 [[독립]] 등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ref name=":0">{{서적 인용|제목=雩南 李承晩|성=許政|판=1970|출판사=太極出版社|쪽=p. 157-159}}</ref> 이 때 그는 이 회의가 끝나자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였다.<ref name=":0" /> {{인용문2|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탈취할 수 있는대로 탈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통용될 때, [[강대국]]은 이해가 상반되는 다른 강대국으로부터 정치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 결과가 [[전쟁]]을 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오직 이러한 현실에서 외면당한 [[약소국|약소 국민]]만이 그들의 정당한 주장조차 펴지 못하고 [[주권]]을 유린당하게 되는 것이다.<ref name=":0" />}} 이 회의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서구]] [[강대국|열강]]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고, 마침 [[소련]] 주도로 [[공산주의]] 운동이 커지면서 좌익과 우익 분화를 촉진하는 영향을 끼쳤다. === 구미위원부 철폐령 및 독자활동 (1925~1937) === [[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기 직전에 그의 측면 지원세력으로 분류되던 구미위원부에 대한 철폐령을 내렸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80_0030|제목=3) 歐美委員部 事務引繼에 關한 件|성=|이름=|날짜=1925-03-10|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25년]] [[4월 15일]] '구미위원부 통신 제9-5호'에는 구미위원부를 폐지하고 [[대한인국민회]]에 사무를 인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 미주 동포들이 분개하였으며 뉴욕, 로스엔젤레스, 시카고 대한인교민단 등이 임시정부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실렸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40_00380|제목=구미위원부 통신 제9-5호(1925. 4. 15)|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25년]] [[4월 29일]] 이승만은 '대통령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포문에서 이승만은 "민국 원년에 한성에서 조직하여 세계에 공포한 아 임시정부는 해내외에 일반국민의 성복애대(誠服愛戴)하는 바이어늘 단 상해에 일부 인사들이 파괴를 시도하여 정부 소재지로 일장난국을 성함은 세인이 공지하는 바라. 도금(到今)하여는 전부 전복의 계획을 실현하기에 지하였스니 아 충애동포가 엇지 차를 용인하리오"라고 한 다음, "한성계통의 대표적 외교기관인 구미위원부를 유지하여 외교선전사업을 계속 진행함으로 부원(府院:행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말함)의 문제가 정경(政經)으로 해결되기를 시사(是俟)하라"고 했다. 요컨대 [[한성 임시정부|한성정부]]의 '법통'을 고수하여 구미위원부를 계속 유지해 나가자는 당부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10_00110|제목=11) 歐美委員部 維持|성=|이름=|날짜=1925-04-29|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25년]] [[5월 11일]] 임시정부는 주미외교위원부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설치하였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80_0060|제목=6) 駐美外交委員部 設置 公布|성=|이름=|날짜=1925-05-11|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최진하(崔鎭河)를 임명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17_0020_00080_0070|제목=7) 歐美外交委員部 設置의 件|성=|이름=|날짜=1925-05-12|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33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 등에 임시정부와 한국민의 입장을 알리고 홍보하는 활동을 하였다.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조병옥]]·[[허정]]·[[장택상]] 등이 나타나 업무를 보좌하였다. 이승만이 단독으로 운영하면서 구미위원부가 언제 문을 닫았는지는 학자마다 주장이 다르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5&aid=0001171956&sid1=001|제목=복원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사라진 ‘歐美위원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국민일보}}</ref> 적어도 1937년, [[윤치영]]이 귀국할 때까지는 활동하였음이 확인된다.<ref name=":12">{{서적 인용|제목=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성=尹致暎|판=1991|출판사=三星出版社|쪽=p. 121}}</ref> [[1930년]] 초, [[김현구]]에 이어 윤치영이 [[워싱턴]]에서 구미위원회 업무를 맡으면서 미국 정부와 교섭하거나 [[중남미]] 특히 [[멕시코]]와 [[쿠바]]의 교민들 그리고 [[동남아]]의 동포들에게 《[[태평양주보]]》 배포에 주력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성=尹致暎|판=1991|출판사=三星出版社|쪽=p. 116}}</ref> 그가 국내로 돌아오기 직전 아내 [[이은혜 (교육인)|이은혜]]와 위원부를 운영할 때에 미국인 여자 비서 2명, 흑인 남자 사환이 1명, 그리고 흑인 여자 1명 해서 총 4명이 있었는데, 후에 이 직원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정부 수립]]이 되고 서울로 2번씩이나 찾아와 윤치영 내외를 방문하였다고 한다.<ref name=":12" /> === 주미외교위원부 복설과 외교활동 (1941~1945) === [[파일:Korean Commission.jpg|섬네일|왼쪽|350x350픽셀|[[1944년]] [[5월 28일]], [[워싱턴]]의 구미위원회 팀. 첫째줄 왼쪽부터 정기원(Jeong Giwon), 김현철(Kim Hyeoncheol), 배민수(Bae Minsu) 목사, 강택모(Kang Taekmo), 한영교(Han Yeonggyo), 둘째줄 왼쪽부터 신상근(Shin Sanggeun), 제임스 신(James Shin), 임창영(Im Chang-yeong), 뒷줄 왼쪽부터 7번째부터 [[임병직]] , 김세선(Kim Seseon),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 최용진(Choe Yongjin), [[이승만]], 뒷줄 오른쪽 맨 끝이 [[이원순]], 한 명 넘어서 오른쪽 3번째 여인이 그의 부인 [[이매리 (1903년)|이매리]].]]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워싱턴 D.C.|워싱턴]]에 위치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대미교섭의 전권을 위임하는 신임장을 교부했다. 사무실은 당시 워싱턴 동부 5번가에 있는 컬럼비아 빌딩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해당 빌딩은 구미위원부 고문 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스태거스]]의 소유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ref name=":8">{{서적 인용|제목=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성=李元淳|판=1988|출판사=新太陽社|쪽=p. 256}}</ref> 스태거스 외에 캐나다 대사였던 제임스 크롬웰 씨, [[아메리칸 대학]] 총장이던 더글러스 박사 등이 무보수로 아낌없이 협조를 해주었다.<ref name=":8" />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일본]]의 [[진주만 습격]]이 벌어지자 [[이승만]]은 [[코델 헐]] [[미국의 국무장관|국무장관]]의 [[극동]] 담당 비서 [[:en:Alger_Hiss|알저 히스]](Alger Hiss)와 스탠리 혼백(Stanley K. Hornbeck) 극동 국장을 만나서 한국이 [[사보타주|사보타쥬]]와 [[게릴라 활동]]으로 대일 전쟁을 강화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현 시점에서 [[동북아]]의 커다란 이해 관계를 일으키는 정치적인 문제 제기는 시기 상조라고 거절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雩南 李承晩|성=許政|판=1970|출판사=太極出版社|쪽=p. 177-178}}</ref> 한편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재미교포|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신분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1943년]] 여름, 한국인 두 사람이 통행금지 시간인 오후 8시가 지나 시내를 배회했다 하여 적성국민에게만 적용되는 통금위반 혐의로 군 당국에 체포된 사건이 터진 것이다.<ref name=":7">{{서적 인용|제목=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성=李元淳|판=1988|출판사=新太陽社|쪽=p. 270-271}}</ref> 한국 교포가 일본의 부속(部屬) 민족이 아님을 이미 [[미 법무부]]로부터 승인을 받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명의로 신분증을 발급하여 연합국 국민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와이]] 주둔 미 육군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적성국민으로 취급하고 있었다.<ref name=":7" /> 이 사건에 대해 구미위원부는 즉각 [[스팀슨]] 미 국방장관에게 공한을 보내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 망명 정부]]가 일본군에게 항전을 전개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한편 [[비들]] 법무장관이 승인한 한국인 지위에 대해 유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공문에 대해 [[1943년]] [[4월 30일]], 스팀슨 국방장관은 답신을 보내왔다.<ref name=":7" /> {{인용문2|귀하의 [[3월 30일]]자 서신은 [[4월 6일]]에 나의 비서관에 의하여 접수되었으며 그 후 필요한 조사 관계로 귀하에게 답신하는 것이 늦어진데 대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육군성]]은 [[1940년]]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등록을 하였으며 등록 시부터 적국의 시민 또는 그 시민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이탈한 [[한국인]]은 적성 시민에 가한 제약으로부터 면제된다는 취지를 모든 관계자에게 알리는 훈령을 관하 일선 사령관에게 내린 바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현지 사령관들은 귀하의 공한에 지적된 사항을 취급함에 있어 신중을 기할 것은 물론, 귀하의 국민과 그들의 후손에 대한 처우를 시정하는데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한다는 보고를 보내왔습니다. 나는 현재 이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충실한 수만의 한국인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그들 [[한반도|조국 땅]]을 침략하고 있는 [[일본 정부]]에 동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이 결국 [[민주주의]]의 신봉자가 되며 [[미국]]에 충성을 다 바칠 것을 굳게 믿는 바입니다. 나는 귀하께서 나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신데 대하여 감사하는 바이며 한국 국민이나 또는 한국 혈통의 군인에 대하여 금후 곤란한 일이 발생될 경우는 이를 본인에게 통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파일:Korean Delegation.jpg|섬네일|285x285px|[[1945년]] [[5월 22일]], [[UN]] 창립 총회에 파견된 한국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송헌주]](Song Heonju), [[이승만]], [[이살음]](Yi Sal-eum)<ref>다뉴바에서 식품상을 경영하면서 한인 장로교회에서 [[목사]]로 목회를 하였다.</ref>. 뒷줄 왼쪽부터 [[윤병구 (1880년)|윤병구]], [[정한경]], [[유경상]](Yu Gyeongsang), [[임병직]].]] [[1945년]] [[5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UN]] 창립 총회에 [[이승만]], [[윤병구 (1880년)|윤병구]], [[정한경]], [[임병직]] 등과 함께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하려고 하였다.<ref name=":13">{{서적 인용|제목=雩南 李承晩|성=許政|판=1970|출판사=太極出版社|쪽=p. 196-197}}</ref> 그러나 그곳의 모인 여러 [[한인]] 단체 대표들간의 의견 충돌이 벌어졌고, 어떤 대표는 한국의 장래가 민족 진영과 공산 세력이 합하여 [[연립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13" /> 그 후 며칠동안 격한 분위기 속에서 결국 아무런 결정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 때 [[미국 국무부|미 국무성]] [[:en:Alger_Hiss|앨저 히스]]의 지시에 의하여 [[극동]] 국장인 발렌타인은 한국 대표 몇 사람을 접촉하여 [[좌우합작|연립 정부]]안을 수락할 것을 종용하였다.<ref name=":13" /> 또 이 회의에는 미 국무성의 극동국 한국과 주무인 한국 태생 [[:en:George_M._McCune|조지 맥큔]]이 동석하여 시종 방청하고 있었다.<ref name=":13" /> 회의가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않자, 국무성의 극동 국장 발렌타인은 [[국민 정부|중국]] 외교 부장 [[송자문]]으로 하여금 [[5월 22일]], 한국인들을 만찬회에 초청하여 [[연립 정부|연립 정부 수립안]]을 채택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승만]]과 그의 팀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ref name=":13" /> 이처럼 양쪽이 모두 자기 주장을 양보하지 않자, 이승만은 이러한 논란을 종식하고 하나의 단일안을 일단 만들어 [[유엔 총회|총회]]에 [[옵저버]] 자격이라도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ref name=":13" /> {{인용문2|우리가 국제 무대에서 이렇게 싸움만하면 한인들이 분열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연립이니 무어니 하는 그런 문제는 [[독립 국가]]를 이룬 다음에 연구하기로하고 우선 무엇보다도 급한 것이 우리나라의 [[독립]]이니 여기서는 다른 표현은 그만두고 무조건 '독립 국가'를 원한다고 합의하여 대외적으로 표방하도록 합시다.<ref name=":13" />}} 이러한 [[이승만]]의 설득과 제의에 의하여 겨우 합의를 본 한국인 각파 대표자들은 [[유엔]] 창립 총회에 건의서를 제출하는 일을 이승만에게 일임하도록 결정하였다.<ref name=":13" /> 이후 이승만은 한국 대표를 [[유엔 총회]]에 참석하게 해달라는 문서와 합의를 본 건의서를 유엔 사무를 담당하고 있던 알저 히스에게 전달하였다.<ref name=":13" /> 그러나 이런 한국인들의 활동은 유엔 기구를 주관하는 미 국무성이 애초에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정식 발언권은 얻지 못하였지만, 총회에는 옵저버로서 참관할 수 있었다.<ref name=":13" />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고 그의 비서이며 임시정부 [[광복군]]의 대령에 임명된 [[임병직]]이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선출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미한국대사관]]으로 바뀌었다.<ref name=":2" /> 워싱턴시 16번가의 마운트플레이선트 언덕에 위치한 2백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건평 약 60평의 2층집이었다. 아래층을 구미위원부 사무실로, 2층을 이승만의 살림집으로 사용했다.<ref name=":3">{{뉴스 인용|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115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1-15&officeId=00032&pageNo=4&printNo=9016&publishType=00020|제목=秘錄 韓國外交<1> : 건국前夜①|날짜=1975-01-15|출판사=경향신문|쪽=4|확인날짜=2011-04-10|archive-date=2019-02-02|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90202151046/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115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1-15&officeId=00032&pageNo=4&printNo=9016&publishType=00020|url-status=}}</ref> [[1948년]] [[9월]],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미국 대사]]로 임명된 [[장면]] 등 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각국의 정식 대사와 [[영사]]로 부임할 때까지 워싱턴에 체재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국]]간 중계 연락업무와 국내와 미국, 유럽을 대상으로 하는 외교업무활동을 전담하였다. == 역대 위원장 == === 위원장 === * [[김규식 (1881년)|김규식]]([[1919년]] [[8월]] ~ [[1921년]] [[4월 25일]]<ref name=":4" />) * [[서재필]]([[1921년]] [[4월 26일]]<ref name=":6" /> ~ [[1921년]] [[9월 2일]]) * [[이승만]]([[1921년]] [[9월 3일]] ~ [[1941년]] [[3월 3일]] ) * [[이승만]]([[1941년]] [[3월 4일]] ~ [[1948년]] [[5월 10일]]) * [[임병직]]([[1948년]] [[5월 10일]] ~ [[1948년]] [[9월 2일]]<ref>이승만이 1945년 10월 귀국 후, 구미위원부 업무를 대신했다.</ref>) === 위원장대리 === * [[현순]]([[1920년]] [[4월]] ~ [[1921년]] [[4월 26일]]<ref name=":5" />), 위원장 대리(서리) === 부위원장 === * [[서재필]]([[1919년]] [[8월]] ~ [[1919년]] [[9월]]) * [[김규식 (1881년)|김규식]]([[1919년]] [[9월]] ~ [[1920년]] [[4월]]) * [[서재필]]([[1920년]] [[4월]] ~ [[1921년]] [[4월 18일]]) * [[서재필]]([[1921년]] [[11월]] ~ [[1924년]]) * [[임병직]]([[1941년]] [[3월]] ~ [[1948년]] [[5월 10일]]) === 장재/참사관 === * [[송헌주]](宋憲澍, [[1919년]] [[8월]] - [[1920년]] [[7월 30일]]) * [[현순]](玄楯, [[1920년]] - [[1921년]] [[4월 26일]]) * [[서재필]]([[1921년]] [[4월 26일]] - [[1922년]] [[8월 26일]]) * [[남궁염]]([[1922년]] [[8월 26일]] - [[1948년]] [[8월 15일]]) 이후 미국과 유럽각국에 대사·영사관이 설치되면서 폐지. == 같이 보기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주한미국대사관]] * [[이승만]] * [[김규식]] * [[여운홍]] * [[윤치영]] * [[임병직]] * [[장택상]] * [[허정]] * [[김구]] * [[장면]] * [[독립공채표]]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11870358 “미국내 親韓여론 조성” 歐美위원부 설치] 조선일보 2005.01.08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 [[분류:1919년 설립]] [[분류:1948년 폐지]] [[분류:한국의 독립운동]] [[분류:한국의 독립운동단체]] [[분류:이승만]] [[분류:김규식]] [[분류:서재필]] [[분류:윤치영]] [[분류:한국의 대외 관계]] [[분류:미국-한국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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