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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이름 = 은언군<br><small>恩彦君</small> |작위 = 조선 장조의 왕자 |휘 = 이인(李䄄) |출생일 = {{출생일|1754|2|1}} {{font color|gray|(음력)}}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801|6|30|1754|2|1}} {{font color|gray|(음력)}}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강화도|강화]] |별명 = '''자''' : 명흥(明興) |시호 = 충정(忠貞) |배우자 = [[군부인 송씨|상산군부인 송씨]], [[전산군부인 이씨]] |자녀 = [[상계군]] 이담, 이창덕, 이창순, <br /> [[풍계군]] 이당, [[전계대원군]] 이광, <br /> [[이성득]], [[이철득]] |아버지 = [[조선 장조|사도세자]] (장조) |어머니 = [[숙빈 임씨|양제 임씨]] (숙빈 임씨) }}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년]] [[음력 2월 1일|2월 1일]] ~ [[1801년]] [[음력 6월 30일|6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조선]] [[영조]]의 손자이자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셋째아들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아들 중 [[정조]], [[은전군]]과 함께 성년기까지 살아남았다. [[조선 철종|철종]]의 할아버지로, 25대 왕 [[조선 철종|철종]]은 그의 서자 [[전계대원군]]의 서자이자 셋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전주, 자는 명흥(明興),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771년]]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의 빚을 [[홍봉한]] 등이 대신 갚아주자, 영조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776년 석방되어 돌아와 원릉 수릉관, 종부시제조, 가덕대부 수릉관, 수덕대부 등을 역임하였다. [[1778년]](정조 2) 그의 아들 [[상계군]]이 [[홍국영]]에 의해 [[원빈 홍씨]]의 양자로 내정되었으나 [[1786년]] 상계군을 추대하려던 구선복(具善復)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노론]][[벽파]]는 여러 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요구하였으나 [[정조]]는 상소를 물리치고 그를 보호하였다. [[정조]] 사후 그를 죽이라는 상소는 계속되었다. [[1801년]] 그의 정실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상계군부인 신씨가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실을 알고 배소에서 탈출하려다가 붙잡혀 사사되었다.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복권되고, 그와 [[상계군]]에 관련된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기사는 대량 세초되었다. [[양주군|양주]] [[신혈면]] [[진관리]](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의 지산 [[이말산]]에 안장된 그의 분묘는 [[6.25 전쟁]] 중 유실되었다. == 생애 == === 불우한 소년기 === ==== 생애 초기와 가족사항 ==== [[영조]]의 손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아버지는 [[조선 장조|장조]]이며, 어머니는 [[숙빈 임씨]](肅嬪 林氏)이다. 부인은 진천인(鎭川人) [[송낙휴]](宋樂休)의 딸로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이다. 그에게는 친동생 [[은신군]], 이복형 [[의소세자]], [[정조]], 그리고 이복동생 [[은전군]] 찬이 있었다. 장조의 서장남으로 [[1754년]](영조 30) 탄생하였다.<ref>장조의 아들로는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ref> [[1763년]] 도정에 봉해진 뒤, [[1764년]](영조 40) 10세에 은언군(恩彦君)에 봉해지고, [[1765년]](영조 41) [[7월 11일]] 11세에 진천 송씨(鎭川宋氏) [[참봉]] [[송낙휴]](宋樂休)의 딸인 군부인 송씨와 관례를 행하였다. [[1757년]](영조 33) [[1월 2일]] [[영조]]는 특별히 [[왕손]]교부에 [[홍계능]]을 임명하여 은신군, 은언군 형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왕손의 나이 6세에 왕손사부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영조는 1757년에 두 왕손을 가르칠 왕손교부를 초빙, 임명하였다. [[홍계능]] 이후, [[윤상후]](尹象厚, [[1757년]] [[1월 27일]]~[[1759년]] [[9월 25일]]), 윤득관(尹得觀, [[1759년]] [[11월 24일]]~[[1760년]] [[12월 15일]]), [[홍낙인]](洪樂仁, [[1760년]] [[12월 22일]]~[[1761년]] [[3월 11일]]), 김이안(金履安, [[1761년]] [[5월 12일]]~[[1762년]] [[12월 21일]]), 김재구(金載久, [[1763년]] [[6월 20일]]~[[1763년]] [[9월 7일]]), 한용화(韓用和, [[1763년]] [[12월 20일]]~[[1764년]]) 등이 두 왕손을 교육할 왕손교부로 부임하였다. 이 중 [[홍낙인]]은 이복 형 정조의 외삼촌이었고, 김이안은 청음 [[김상헌]]의 후손으로 김창협의 증손자이며 김원행의 아들이다. 김이안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1년간 왕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김재구는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재물을 탐냈다는 의심을 받고 파직되었다. ==== 정치와 사회적 물의 ==== [[사도세자]]의 사후 출궁되었으며, 이후 동생 [[은신군]] 진 등과 함께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다가 [[홍봉한]]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지원받았다. 정확한 시기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런데 1769년 김귀주(金龜柱) 등이 이를 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탄핵을 당했다. [[1768년]](영조 44) [[1월 1일]] [[승정원]]의 건의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768년]](영조 44) [[2월 3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官)에 제수되고, 같은 해 [[4월 20일]] 숭헌대부(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1769년]](영조 45) [[5월 5일]] 영조로부터 [[용동궁]](龍洞宮<ref>순회세자에게 주어진 집으로 순회세자 사후 왕비 소유였던 집</ref>)을 사저로 하사받았다. [[1771년]] 외람되게 근수(跟隨)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다닌다 하여 친동생 [[은신군]](恩信君)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市廛) 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영조]]에게 알려져 [[영조|친]]동생 은신군과 함께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안치되었다. 또한 그의 외조부는 [[대정현]]에 군역 충군되었다. 이 해 [[3월]] 친동생 [[은신군]]은 제주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그는 천극(栫棘)죄인 신분으로 혼자 버티다가 [[1771년]] [[4월 19일]] 영조의 석방 명령이 내려졌지만 [[1774년]](영조 50) [[5월]] 서용, 복직되었다.<ref>승정원일기에 의하면 5월 15일에 이미 숭헌대부의 직책에 있었는데 심상운이 은언군, 은전군의 직급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ref> [[1774년]] 가을, 안치된 지 3년 만에 [[영조]]의 특명으로 은언군은 석방되어 [[한성부|한성]]으로 돌아왔다. [[조인영]]이 지은 신도비에 의하면 그는 제주 유배에서 돌아와 공검근신(恭儉謹愼)하게 생활하며 학문에 주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론]] 및 혜경궁 홍씨의 친정 일부는 세손이 자신들에게 원한을 품었을 것이라 단정하고, 은언군, [[은전군]] 등에게 수시로 접근하였다. 이후로도 그는 몇몇 사건에 연루되었다. === 정치 활동 === ==== 복권과 관료생활 ==== 이후 [[한성부]]로 돌아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가 2품으로 품계가 올라가고, [[1776년]](영조 52) [[4월]] 할아버지 [[영조]]가 별세하자 [[원릉]] [[수릉관]](元陵守陵官)에 임명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즉위하자 그해 [[5월 8일]]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 겸 [[종부시]]제조(宗簿侍提調)에 제수하고 가덕대부(嘉德大夫)에 가자되었다. 이해 [[8월]] [[산릉]] [[수릉관]](山陵守陵官)에 임명되고, 이해 [[8월 24일]] 수덕대부(綏德大夫)에 가자되었다. [[1777년]](정조 1) [[3월 5일]] 흥록대부(興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고 이해 [[8월 28일]] [[현록대부]](顯祿大夫)에 가자되었다. 같은 날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그는 매년 [[6월]] [[혜경궁 홍씨]]의 생일을 전후하여 혜경궁의 탄신일을 각별히 챙기고 준비하였다 한다. [[1778년]](정조 2) [[12월]] 은언군 집에서 [[소]]를 밀도살하여 팔았다는 물의를 일으켰다. 이후 양사와 [[홍문관]], [[의금부]] 등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당했으나, 그때마다 정조가 무마시켰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수묘관]](守墓官)에 임명된 뒤, 같은 해 [[6월 28일]] 다시 [[종부시|종부]]제조(宗簿提調)을 거쳐 [[7월 23일]] 다시 종친부 유사당상을 겸임하고, [[1779년]](정조 3) [[12월]] [[교정청]]제조(校正廳提調)가 되었다. ==== 상계군의 세자 지목 ==== [[1778년]](정조 2) [[홍국영]](洪國榮)이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후사가 없는 것을 기화로 누이동생을 [[원빈 홍씨]](元嬪 洪氏)를 들여 왕세자를 낳게 하려 하였으나 이듬 해인 [[1779년]](정조 3)에 죽자, 대신에 은언군의 맏아들인 담(湛)을 원빈의 장례 때에 대준관(代尊官)을 시켜 양자로 삼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은언군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결국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들이는 것을 수용하고 만다. 한편 [[1779년]] 가을 유학 이덕희(李德喜)의 딸을 소실로 들였다. 첩 이씨는 후일 서손자 [[조선 철종|철종]]이 왕이 되면서 [[전산군부인]](全山郡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홍국영]]은 그의 아들 담을 완풍군(完豊君 : 완(完)은 왕족의 본관인 완산(完山)을 가리키고 풍(豊)은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豊山)을 가리키며 후에 [[상계군]](常溪君)으로 개칭함.)이라 부르면서 가동궁(假東宮)이라 하여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홍국영이 쫓겨나 병사한 뒤로도 그 일당이 계속 역모를 꾸몄고, 그의 장인이자 상계군의 외조부 송낙휴조차 상계군의 불평불만을 조정에 고해 바치면서, 그 일당들은 상계군이 역심을 품었다는 이유로 사형시킬 것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동시에 상계군의 생부인 은언군 역시 죽여야 된다고 상소를 연일 올렸다. ==== 상계군 사건과 유배 ==== [[1786년]] [[11월]] [[상계군]]이 자살 혹은 의문의 음독사망하자, 바로 금성위 [[박명원 (조선)|박명원]](錦城尉 朴明源), 창성위 황인점(昌城尉 黃仁點), 참봉 조관진(趙寬鎭), 도사(都事) 조응진(趙應鎭), [[돈녕부]][[영사]] [[홍낙성]](洪樂性), 전 승지 홍낙신(洪樂信)ㆍ[[홍낙임]](洪樂任), 유학 홍낙륜(洪樂倫), 전 주부 [[홍수영]](洪守榮), 유학 홍최영(洪最榮), 보덕 김치묵(金峙默), 전 목사 김지묵(金持默), [[사복시]] [[첨정]] 홍의영(洪義榮) 등과 함께 종척 집사로 [[상계군]]의 빈전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이에 연루되어 죽을 뻔하였으나, 정조가 대신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유배형으로 낙착되었다. 그 해 은언군은 군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현록대부]] [[오위도총부]]도총관 직에서도 파면되고 [[강화도]]에 처자와 함께 유배되었다. [[정순왕후]]는 대신들을 시켜 은언군을 죽일 것을 청했으나 정조는 증거도 불충분하다, 하나뿐인 혈육이라 이제는 죽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은언군에 대한 탄핵상소는 [[1786년]](정조 10) [[11월]] 이후 매일 올라왔고, 상소가 계속되자 정조는 음식을 물리고 단식에 들어간다. 그러자 정순왕후도 단식을 하며 맞불을 놓게 된다. 그러나 [[송낙휴]]의 고변으로 [[훈련원|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 등이 [[홍국영]]과 함께 모의를 했다가 [[김종수]]에게 발각되면서, 역모의 증거로 논정되었다. 그러나 은언군을 죽이라는 삼사와 금부의 요구는 계속되었다. [[구선복]]과 그의 조카 병마절도사 [[구명겸]], 병마절도사 [[구이겸]] 등이 처형당한 뒤 은언군을 사형시키라는 여론은 일시적으로 수그러들었다가 다시 은언군 사형 여론이 형성되었다. 정조는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라며 양보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남인]] 역시 은언군 처형을 상소하였다. 정조는 계속 도성 밖으로 나가거나, 단식으로 맞섰고, [[노론]] 대신들 및 [[남인]]은 굴복하여 [[사형]]에서 한 등급 감하여 [[유배형]]으로 결정하고, 은언군을 죽이지 않는 대신 유배지는 [[제주도]]로 정했다. 그러자 정조는 반발했고, 대신들은 다시 은언군의 유배지를 [[전라도]] [[진도군|진도]]로 정했다. 그러나 정조는 진도는 너무 멀다며 유배지를 [[강화도]]로 바꾸도록 지시하였다. 여러 번의 조율 끝에 은언군의 유배지는 [[강화도]]로 결정되었다. 은언군이 유배되면서 그가 살던 집, 혹은 그의 어머니 [[숙빈 임씨|양제 임씨]]가 살았던 집을 시중에서는 폐궁으로 불렸다. === 생애 후반 === ==== 강화도 유배생활 ==== [[강화도]]로 유배된 뒤에도 그가 [[홍국영]] 등과 한패거리이며, 상계군 추대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의금부]] 등에서는 번갈아가며 은언군의 토죄, 처벌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은언군이 [[홍국영]]과 적극적으로 모의했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은언군과 그 일가의 [[강화도]] 유배생활은 기록이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은언군과 그 일가들에 대한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은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대량으로 세초되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재위기간에도 일부 남아있었으나 고종 대에 와서 먹줄로 긋거나, 해당 기사를 잘라버리는 식으로 대부분 [[기록]]을 말소시켰다. [[1786년]](정조 10) [[5월]]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고, 이어 같은 해 [[9월]]에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출산 과정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러자 [[노론]]은 은언군과 [[홍국영]]을 의심하였다. [[노론]] 계열에서는 은언군에게도 흑심이 있었을 것이라며 노론계 언관들을 통해 그를 사형을 처해야 한다는 탄핵 상소를 거듭해서 올렸으나, [[정조]]는 이를 거부하였다. [[남인]]에서도 은언군의 처형을 상주하였다. 계속해서 [[노론]]계 관원들, [[남인]] 관원들의 탄핵이 계속 폭주하자, [[1789년]](정조 13) [[9월 26일]] 정조는 비밀리에 변복하고 출궁하여 은언군에게 연락, 변복하고 [[썰매]]를 타고 [[강화도]] 입구로 나왔다. 정조는 은언군을 데리고 [[한성부|한성]]으로 도착했지만, 이 사실이 노론 벽파계 대신들에게 알려졌고, 이때 정순왕후의 명으로 [[의정부]][[영의정]] 김익(金熤)은 은언군을 체포, 배소에 도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조]]는 [[강화도]]로 가서 은언군의 유배지 근처에서 유숙하며 항의성 시위를 벌였다.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당장 돌아오라며 연락을 보낸다. 정조의 은언군 구하기 항의성 시위는 그 해 [[9월 28일]] 일단 벽파대신(僻派大臣)들, [[남인]] 신료들이 정조의 체신을 생각하여 수용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1789년]] [[10월]] 은언군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혜경궁 홍씨]]의 생일과 [[사도세자]]의 생일과 기일, [[정순왕후]] 김씨의 생일 등에만 일시 방면되어 왕궁에 초대되고는, 탄신행사가 끝나면 다시 강화도로 돌려보내졌다. 이때 은언군의 [[강화도]] 감시를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당시의 [[강화]][[부사]] [[윤승렬]](尹承烈) 역시 계속 탄핵당하게 된다. ==== 정조의 배려, 조정의 공격 ==== [[1789년]](정조 13)부터 계속 은언군이 국법을 어기고 [[강화도]]를 빠져나왔다는 탄핵이 빗발쳤다. 그러자 정조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왕대비 말만 듣고 대신들이 [[포도청|포도대장]](捕盜大將)과 [[의금부]]의 당상을 시켜 은언군을 [[강화도]]로 돌려보냈다며 탄핵상소를 물리쳤다. 한편 [[신기현]](申驥顯)이 [[포도대장]], [[의금부]] 당상들이 임의대로 은언군을 강화도로 돌려보냈다며 탄핵상소를 올리자, [[의정부]][[우의정]] [[김종수]], [[형조판서]] [[심이지]]는 정조를 찾아가 신기현의 상소가 잘못되었다고 논정하였다. 그해 [[10월]] [[노론]]계 태학 유생들과 노론계 [[사부학당]] 유생들은 연명상소를 올려, 은언군을 역적의 괴수(賊魁)라며 토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정조는 이를 물리쳤다. [[10월]] [[수원성]] 축성을 맡았던 [[남인]] [[중추부]][[판사]] [[채제공]](蔡濟恭) 등도 역시 은언군을 역적이라 칭하며 토죄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은언군이 유배지에서 고통받고 있다며 아우를 잃을까봐 걱정된다는 뜻을 자주 피력하였고, 은언군의 석방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삼사와 [[의금부]], [[승정원]] 등에서 반대하며 은언군을 탄핵했고, 관학과 사부학당의 유생들도 들고 일어나 반발하여 은언군 석방은 번번히 무산되었다. [[1790년]](정조 14) [[11월 13일]] 정조는 사람을 강화도로 보내 은언군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방해로 만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정조는 친히 용산(龍山) 별영(別營)에 나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은언군을 기다렸다. 은언군은 비밀리에 강화부 유수의 묵인하에 강화도를 벗어났지만 [[한성부|한성]] [[용산]] 근처에서 사전에 발각되고, 다시 강화도로 압송되었다. [[1790년]] [[12월 13일]] [[강화부]] 유수 [[홍수보]](洪秀輔)가 이임하면서 후임자를 차출하여 은언군을 감시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파일:은언군과 상산군부인 송씨의 묘비.JPG|섬네일|200px|오른쪽|[[절두산]]에 있는 은언군과 그의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의 묘비]] [[1794년]](정조 18) [[4월 10일]] 정조는 강화부 유수 이홍재(李洪載)와 [[경기도]][[관찰사]] [[서용보]](徐龍輔)를 파직하고,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는 은언군을 다시 [[한성부|한성]]으로 불러들였다. 이 소식을 접한 [[정순왕후]]는 바로 모든 신하들에게 [[한글]] 전교(언문교서)를 내려 역적을 성토할 것을 촉구하였고, 대신들은 정조에게 면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은언군을 숨기면서 대신들의 면담을 거절한다. 그러자 대신들은 정조의 허락 없이 합문(閤門)을 밀치고 들이닥쳤다. 이어 [[사헌부]]지평 강극성(姜克成)은 도끼를 가지고 와서 합문 밖에 엎드려 손가락을 도끼로 베어, 직접 혈서(血書)를 써서 올리며 역적 은언군 이인의 머리를 베어 종묘사직을 편안히 하라고 상소하였다. 결국 정조는 [[4월 19일]] 은언군을 [[강화도]]로 되돌려보냈다. ==== 탈출 실패와 최후 ==== [[1797년]](정조 21) [[5월 29일]] 새벽 3시~4시 경 비밀리에 집 담벼락에 구멍을 내고, 비밀리에 서자 [[이철득]]을 데리고 강화도에서 탈출하려다가 강화와 [[김포시|김포]]의 경계에서 [[병졸]]에게 적발, 체포되어 다시 그곳에 안치되었고.<ref>순조실록 3권, 1801년(순조 1년, 청 가경 6년) 5월 28일 계묘 4번째기사, "황승원이 은원군과 그 아들 철득이 달아나다 잡힌 일을 장계하다"</ref>, 그뒤로도 벽파대신들과 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남인]] 신료들로부터 역모의 화근으로 지목되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조선 정조|정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은언군을 사형시키라는 여론이 계속되자 정조는 비밀리에 출궁해서 은언군을 만나는 식으로 정순왕후와 노론 등에게 계속 항의하였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탄신일이나 자신의 생일 때마다 경사 기념이라는 명분으로 은언군을 석방시키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 [[8월]] [[정조]]가 등창과 연훈방 중독으로 갑자기 죽고, 나이 어린 [[조선 순조|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자 상황이 뒤바뀌게 되었다. 순조 즉위 초부터 조정에는 다시 은언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자손들 중 [[정조]], [[은전군]]과 더불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몇 안되는 자손이기도 했다. 또한 은전군이 19세에 사사당함으로써 40세 이상 생존한 혈족은 정조와 그가 유일했다. [[1801년]] [[5월 27일]] 새벽 비가 오는 틈을 타 아들 이철득(李鐵得)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려다가 붙잡혔다. 이 일로 [[강화군|강화]] [[유수]] 황승원(黃昇源)으로부터 탄핵을 당한다. [[1801년]](순조 1) [[2월]] [[신유박해]] 때 [[의금부]]에 체포된 양제궁 나인의 진술로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가 [[청나라]]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인 [[주문모]](周文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ref>당시 조선의 국교는 유교 성리학이었다.</ref>, [[상산군부인 송씨]]이 [[주문모]] 신부를 양제궁에 숨겨둔 것도 밝혀지면서 대간과 사헌부의 탄핵을 무수히 받고 [[1801년]](순조 1년) [[3월 17일]] [[사약]]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은언군은 삼사로부터 가족이 사교(邪敎)에 물들도록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줄기차게 탄핵을 받았고, 삼사와 정부 관료들은 [[상계군]], [[홍낙임]] 등과 관련해서도 계속 탄핵당하였다. 그해 [[6월 13일]] [[사사]]령이 내려지고, [[6월 30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이때 그의 향년 48세였다. === 사후 ===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神穴面) [[진관리]](津寬里,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 78-1번지인 [[북한산]]의 지산 [[이말산]](莉茉山) 서쪽 유좌(酉坐) 언덕에 안장되었으며, 부인인 [[상산군부인 송씨]]는 그의 묘소 오른쪽에 합장되었다. 그의 제각이 세워진 곳은 후일 제각말, 잿말, 재각말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근처에는 다른 왕족인 [[성종 (조선)|성종]]의 13째 서자 [[영산군 (왕족)|영산군]] 일가의 제각도 있다. 후에 첩인 [[전산군부인]] 이씨는 [[통진군]] [[통진면]] 마송리 자좌(子坐)에 안장된다. 그러나 은언군과 본부인 송씨의 묘는 [[6.25 전쟁]] 중 실전되었다. 통진 마송리는 은언군의 어머니 [[숙빈 임씨]]의 친정 일가들이 살고 있었다. 그의 자손들은 이미 사망한 [[상계군]], [[은전군]]의 양자가 된 [[풍계군]]을 제외하고는 [[강화도]]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후일 1849년에 그의 손자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할때 별명 중 '강화도령'이라는 별칭은 여기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한편 [[1836년]](헌종 2)에 남응중 일당이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때 이들은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ref>[네이버 지식백과] 남응중역모사건 [南膺中逆謀事件]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f><ref>헌종실록 3권, 헌종 2년 12월 23일 임신 1번째기사</ref> 또한 [[1844년]](헌종 10)에 은언군의 손자인 [[이원경 (1827년)|이원경]](서자 [[전계대원군|이광]]의 아들)이 [[민진용]]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면서 역모로 몰려 사사되었다.([[민진용의 옥사]])<ref>[네이버 지식백과] 민진용의옥 [閔晉鏞─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849년]](헌종 15) [[조선 헌종|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여 그해 [[6월 8일]] 그의 서손자 원범(元範)이 추대되어 [[조선 철종|철종]]으로 즉위하자 곧 작위가 복구되었다. 이해 [[9월 12일]]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에 의하여 은언군가의 역모에 관한 일을 적은 모든 문적(文蹟)이 세초(洗草)되었으며, [[1851년]]에 대제학 [[서기순]](徐箕淳)에 의하여 신유사옥 때 은언군의 무죄를 변증하는 주문(奏文)이 지어 올려졌다. [[신도비]]문은 운석 윤정현(雲石 尹定鉉, 1793~1874)이 지었다. 한편 그의 묘비석은 후일 1989년 9월26일 후손 우용이 [[천주교]]에 기증,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96-1번지 [[절두산]]의 [[절두산 순교 성지]]로 이송되었다. 한편, 철종이 즉위하면서 은언군가문에 대한 문적들을 상당수 세초하거나 없애버려,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 명예 회복 ==== 철종이 즉위하면서 은언군이 억울하게 죽었다며, [[1850년]] [[11월 12일]] [[청나라]]에 은언군 변무사(辨誣事)를 파견하였다. 변무사의 글은 [[대제학]] [[서기순]](徐箕淳)이 지었다. {{인용문|신(臣)의 아비 선각왕(宣恪王)은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었는데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어려운 때를 당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는 권병(權柄)을 훔쳐 국가에 변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이 때를 틈탈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듬해 신유년에 신의 본생조(本生祖) 은언군(恩彦君) 인(䄄)이 제일 먼저 그 칼날을 받았는데 그때 우리 나라에는 불행하게도 [[천주교|사학]](邪學)의 옥(獄)이 있게 되었습니다. 심환지의 무리들이 신의 본생조도 역시 사교(邪敎)에 물들었다고 말하면서 감히 천만 이치에 닿지 않는 지목(指目)을 하고, 천만 이치에 맞지 않는 죄를 씌워 이 옥사에 몰아 넣어 싸잡아 죽임을 당하였으니, 공의(公議)가 아직껏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그를 위해 슬퍼하자 급히 겸제(箝制) 하여 감히 의논하지 못하게 하고, 그후에 또 반드시 천청(天聽)에 알려 천하에 폭로하고자 하여 마침내 무함하여 주문(奏聞)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 전후 주어(奏御)한 글 역시 내부(內府)의 편집(編輯)하는 반열(班列)에 갖추어져 있으니 일의 허실과 주문의 진위(眞僞)는 오로지 우리 나라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만약 단지 신유년의 무함한 주문만을 의거하여 말한다면, 효경(梟獍)이 되고 귀역(鬼蜮) 이 되었으니 비록 헌경(軒鏡) 이 높이 달리고 우정(禹鼎)이 모습을 드리우더라도 어떻게 남김 없이 다 통촉하시겠습니까? 감히 신의 본생조(本生祖)가 신유년에 망극하게 무함 당한 것을 가지고 눈물을 뿌리며 진문(陳聞)하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은언군에 대한 명예회복에 앞서 [[조선 철종|철종]]은 [[청나라]]에 은언군 변무사를 파견하여 변무소를 제출하였다. [[1851년]](철종 2) 손자 [[조선 철종|철종]]이 친필로 [[신도비]]문을 짓고, [[조인영]](趙寅永)이 [[신도비]] 글씨를 썼다. 신도비는 1850년 [[강화군]] [[석모도]]에서 공수하여 1851년 10월경 신도비가 수립되었다. [[1871년]](고종 8) [[2월 21일]] 왕족 은언군과 [[은전군]]의 시호를 의논하게 하고, 전교하기를, "은언군(恩彦君)은 왕실의 가까운 친족이다. 증시(贈諡)의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세 때문에, 중간에는 겨를이 없어서 못하였으니 모두 까닭이 있었으나, 선대왕(先大王)의 성충을 우러러 체득하고 있는 만큼 의당 숭보(崇報)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고, 은전군(恩全君)에게 증시하는 은전도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일체(一體) 시호를 의정하게 하라." 하였다. 이해 [[2월 25일]] 은언군 등의 시호는 행실과 업적에 따라 짓게 하고, 전교하기를, "시호(諡號)는 행적에 대한 자취이니, 그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어야 받은 사람으로도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번 시호에 대한 의논이 과연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나, 만일 조금이라도 지나치게 찬양한다면 이것이 어찌 옛 법이겠는가? 안면에 구애되지 말고 청탁에 관계없이 전적으로 실제 행실과 업적에 따라 정함으로써 옛날의 규례를 회복하도록 홍문관(弘文館)에 분부하라." 하였다. 이해 [[3월 16일]] 시호를 충정공(忠貞公)으로 추증하였다. 그러나 철종 즉위 이후, 철종대와 고종대에 은언군 및 은언군 가족, 상계군 등에 관련된 [[조선왕조실록]] 기사, [[일성록]], [[승정원일기]] 기사는 대부분 삭제, 세초되거나 먹줄로 칠해지는 등 대량으로 인멸되었다. 은언군은 정실부인 [[상산군부인]] 송씨 외에도 몇명의 첩에게서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실록과 기록을 통해 송씨부인 소생 두 아들과 딸 1명, 전계대원군으로 추증된 이광의 존재만이 알려졌다가 후일 은언군의 묘비명이 발견되면서 어려서 죽은 다른 아들 이창순, 이창덕의 존재가 알려졌고, [[1970년]]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이 한글로 해석되면서 이철득, 이쾌득, 이성득 등 다른 서자들의 존재도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20세기에 와서 첩인 [[전산군부인]]의 묘가 [[김포시|김포]] [[통진면]]에서 발견되면서, 전계대원군이 전산군부인 소생이라는 것과 전산군부인이 아들 2명을 두었으나 첫 아들은 어려서 요절한 것 등이 알려지게 되었다. [[1914년]]에 와서 은언군 묘소 주변에 개인의 묘소들이 많이 설치되었는데, [[1914년]] [[4월 1일]] 은언군의 후손인 [[이완용 (조선자작)|이완용]]은 은언군 묘소 주변의 땅을 타인에게 매각하였다.<ref>"墳墓堀移의 紛擾", 매일신보 1914년 04월 01일자 2면 5단</ref> 은언군과 본부인인 [[상산군부인 송씨]]의 묘소는 [[6.25 전쟁]] 중 실전되었다. 은언군 묘소 홍살문과 사당은 [[1951년]] [[1.4 후퇴]] 당시 [[영국]] 군대가 숙영하면서 묘소 [[홍살문]]과 사당을 뜯어서 땔감으로 써 사라지게 되었다. 묘소 근처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145번지 주변에 세워진 [[신도비]]각 역시 실전되었다. [[은평구]] [[진관외동]] 산 18번지에 있던 비석은 [[1989년]] [[9월 26일]] 7대손 이우용이 기증, 절두산 [[천주교]] 성지 내, [[남종삼]] 동상과 순교사적비 옆으로 옮겨졌다. 은언군의 묘소 근처에는 [[상궁 임씨]]의 묘소가 있고, 은언군 묘터와 [[상궁 임씨]] 묘소가 있는 [[이말산]] 아래에는 [[1970년]] [[연성공업기술고등학교]]가 개교했다. 연성공업기술고등학교는 후일 [[은평웹미디어고등학교]], [[은평메디텍고등학교]] 등으로 개명되었다. == 가족 관계 == 그의 첩 중의 한명인 [[전산군부인]] 이씨는 [[조선]] 중기 이후 [[동성동본]] 금혼령이 내려졌음에도 본관이 [[전주 이씨|전주]]이다. 한편 정조 때에 [[영의정]]을 역임한 [[서용보]]는 그의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내외종사촌간이다. ; 왕가(王家)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조부 : 제21대 [[영조|영조대왕]](英祖大王, 1694 ~ 1776, 재위 1724 ~ 1776) * 조모 : [[영빈 이씨|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1764) ** 부 : 추존 [[조선 장조|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 법모 : [[헌경왕후|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 ~ 1815) *** 이복형 :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 ~ 1752) *** 이복형 : 제22대 [[정조|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1752 ~ 1800) *** 이복동생 :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 ~ 1821), 광은위(光恩尉) [[광산 김씨|광산인]] 김기성(金箕性)에게 하가. *** 이복동생 :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 ~ 1802), 흥은위(興恩尉) [[연일 정씨|연일인]] 정재화(鄭在和)에게 하가. ** 생모 : [[숙빈 임씨]](肅嬪 林氏, ? ~ 1773) *** 동생 : [[은신군]](恩信君, 1755 ~ 1771) ** 서모 :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景嬪 朴氏, ? ~ 1761) *** 이복동생 : [[청근옹주]](淸瑾縣主, 1758 ~ 1835), 당은위 홍익돈(洪益惇)에게 하가. *** 이복동생 : [[은전군]](恩全君, 1759 ~ 1778) ;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 ~ 1801) * 정실 :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 1753 10 15, ~ 1801 03 17), [[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 아들 :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 ~ 1786) ** 며느리 : [[군부인 신씨 (상계군)|군부인 신씨]](郡夫人 申氏,1769 ~ 1801) *** 양손자 : [[이희 (1824년)|익평군 이희]](益平君 李曦, 1824 ~ 1863)<ref>[[풍계군]]의 서자였으나 상계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ref> ** 며느리 : 이름 미상,<ref>상계군 이담의 첩, 궁인 출신</ref> *** 손자 : 이름 미상, 요절<ref>은언군 생전에 태어난 손자였으나 일찍 요절했다.</ref> ** 아들 : 이창순(李昌順, 생몰년미상) ** 아들 : 이창덕(李昌德, 생몰년 미상) ** 아들 : [[풍계군]] 이당(豐溪君 李瑭, 1783 ~ 1826)<ref>[[은전군]] 이찬(恩全君 李禶, 1759년 - 1778년)에게 출계.</ref> *** 서손자 : [[이희 (1824년)|익평군 이희]](益平君 李曦, 1824 ~ 1863)<ref>[[풍계군]]의 서자로 상계군의 사후 양자로 입양.</ref> ** 딸 : 이씨(李氏, 1796년 8월 4일 ~1872년 4월 4일) ** 사위 : [[한각신]](韓覺新, 1795년 8월 28일 ~ 1853년 8월 14일), 참봉(參奉), 현령(縣令) 역임, 한유천(韓天維)의 자 *** 외손자 한응국 *** 외손자 한응필(1832년 12월 14일 ~ 1883년 12월 1일) * 첩 : 이름 미상 ** 서자 : [[이성득]](李成得, 1775 ~ 1817, 11, 27)<ref>순조실록 20권, 17년(1817 정축 / 청 가경(嘉慶) 22년) 11월 27일(병인) 1번째기사, 의금부에서 강화 죄인 성득이 물고되었으니, 금부 도사를 보내 검험하라고 하다</ref> ** 서자 : [[이철득]](李鐵得, [[1780년]] ~ ?)<ref>1801년 5월, 초 아버지 은언군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 도주하려다 실패했다.</ref> * 첩 : [[전산군부인 이씨]](全山郡夫人 李氏, 1764 ~ 1819), 전주인(全州人) 유학 이덕희(李德喜)의 딸. ** 서자 : 요절 ** 서자 : [[전계대원군]] 이광(全溪大院君 李㼅, 1785 ~ 1841) ** 며느리 : [[완양부대부인]] 최씨(完陽府大夫人 崔氏, 1804 ~ 1840)<ref>전계대원군 광의 본처</ref> *** 손자(적손) : [[이원경 (1827년)|회평군]] 명(懷平君 明, 다른 이름은 원경(元慶), [[1827년]] - [[1844년]]) ** 며느리 : 이씨(李氏),<ref>전계대원군 광의 첩</ref> *** 손자(서손) : [[영평군 (1828년)|영평군]] 경응(永平君 景應, [[1828년]]~ [[1901년]]) ** 며느리 : [[용성부대부인]] 염씨(龍城府大夫人 廉氏, 1793 ~ 1863)<ref>전계대원군 광의 첩</ref> *** 손자(서손) : [[조선 철종|덕완군]] 변(德完君 昪, [[1831년]] ~ [[1864년]]) - 철종(哲宗) == 은언군이 등장한 작품 == * [[1991년]] [[KBS]] 드라마 《[[왕도 (드라마)|왕도]]》- ? * [[2001년]] [[MBC]] 드라마 《[[홍국영 (드라마)|홍국영]]》- ? * [[2007년]]~[[2008년]] [[MBC]] 드라마 《[[이산 (드라마)|이산]]》 - [[이다윗]] * [[2007년]] - 뮤지컬 《정조대왕》, 박종한 == 기타 == 은언군과 관련된 기록들은 철종 때와 고종 때 대부분 편집, 실전되어 많이 남아있지 않다. [[홍국영]] 등의 [[상계군]] 추대음모 사건,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의 [[천주교]] 관련 사건들은 후일 철종 즉위 후 [[순원왕후]]의 명으로 대부분 세초되었고, 남은 부분도 고종 때에 가서 편집되거나 먹줄, 혹은 인위적으로 삭제 편집되거나 인멸되었다.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도 대부분 철종, 고종때 가서 세초되거나 인멸되었다. 철종이 은언군가문의 봉사손들에게 하사한 은언군 표적비는 [[서울]] [[북한산]] 입구의 한 음식점에서 의자로 이용되다가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2001년]] 이 식당은 은언군 표적비를 버렸고, 누군가에 의해 땅에 파묻혔다. [[2005년]] 생태보전시민모임과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의 합동 조사로 삼천동 사슴목장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은언군 관련 일부 석물은 [[흥창사]]내에 있다. [[1801년]] 상산군부인 송마리아와 평산군부인 신마리아가 사형당하자 서자들 중 [[이철득]]만을 데리고 새벽에 탈주하려다가 체포되었다. 몸이 병약한 이성득, 이당, 나이가 어렸던 이해동은 두고 [[이철득]]만 데리고 도주하다가 강화와 김포지역 병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 같이 보기 == {{Col-begin}} {{Col-2}} * [[정조]] * [[영조]] * [[조선 장조|장조]] * [[숙빈 임씨]] * [[은신군]] * [[은전군]] * [[상산군부인 송씨]] * [[전산군부인 이씨]] *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 {{Col-2}} * [[풍계군]] * [[완평군]] * [[이철득]] * [[의소세손]] * [[문효세자]] * [[홍국영]] * [[주문모]] * [[조선 철종|철종]] * [[순원왕후]] {{Col-end}} == 참고 문헌 == * 영조실록 * 정조실록 * 순조실록 * 헌종실록 == 각주 == <references/> {{조선의 왕자}}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1754년 출생]] [[분류:1801년 사망]] [[분류:조선의 왕자]] [[분류:조선의 왕족]] [[분류:사형된 사람]] [[분류:독살된 사람]] [[분류:운현궁]]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분류:조선 영조]] [[분류:조선 철종]] [[분류:전주 이씨]] [[분류:조선 장조의 자녀]] [[분류:18세기 한국 사람]] [[분류:19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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