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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보<!--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아닌 정보는 삽입하지 말아주세요--> |이름 = 을지문덕 |원어이름 = 乙支文德 |본명 = 을지문덕(乙支文德) |그림 = 초등대한역사 제2편 10.jpg |그림크기 = 250px |출생일 = 미상 |출생지 = 미상 |사망일 = 미상 |사망지 = 미상 |배우자 = 미상 |자녀 = 미상 |국적 = [[고구려]] |성별 = 남성 |관직 = 대장군 |부친 = 미상 |모친 = 미상 |주군 = [[고구려 영양왕]] |주요 참전 전투/전쟁 =[[고구려-수 전쟁]] * [[살수 대첩]] |설명 = [[대한제국]] 교과서 《초등 대한역사》에 실린 삽화 |본관 = |충성 = [[고구려]] |다른 이름 = 위지문덕(尉支文德) }} '''을지문덕'''(乙支文德, ?~?)은 [[고구려]] 대신(大臣)<ref>삼국사기 기록</ref>이자, 무장이다. [[제2차 고수 전쟁]] 당시 [[살수 대첩|살수에서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친]] 인물로 유명하다. [[612년]] [[수 양제]]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요동성]]에서 지지부진하자 별동대 30만 5천 명을 뽑아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 (고구려)|평양성]]을 직공하였다. 별동대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기는 했지만 모두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이었고, 극도의 피곤과 [[군량]] 부족으로 인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별동대가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서 강을 건널 때 습격하여 궤멸시켰다. == 기록 == === 기록의 멸실 === 생몰연대부터 출신, 관직 등 [[살수 대첩]]을 제외한 삶은 모든 것이 미상이다. 평양의 석다산(石多山)에서 태어났다거나<ref>[[홍양호]], 《해동명장전》, 1794</ref> [[선비족]] 출신의 귀화인이라는 [[언어|말]]도 있지만<ref>[[김원용 (고고학자)|김원용]], 〈을지문덕의 출자에 대한 의론〉, 《전해종박사화갑기념 사학논총》, [[일조각]], 1979. 을지와 울지는 발음이 비슷하고, 《자치통감고이》 8권에 인용된 《혁명기》(革命記)라는 기록에는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 되어 있다.</ref> 모두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혹은 을지는 [[우태]](于台), 오졸(烏拙), 울절(鬱折) 등과 함께 ‘웃치’의 음차로서 대인과 같이 윗사람을 뜻한다거나<ref>[[양주동 (1903년)|양주동]], 《고가연구》1965 ;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1977 ; 정구복 외,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2012.</ref> 고구려의 [[귀족]] 가문이었던 을(乙)씨 가문에 귀인에 대한 존칭사 지(支)를 붙인 것이라고도 하지만<ref>유창균, 〈고구려 인명표기에 나타난 용자법의 검토〉, 《동양학》vol.5,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75</ref> 역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는 없다. [[조선]]에서는 고구려 고유의 복성(複姓)으로 파악하였다.<ref>《[[증보문헌비고]]》53권 제계고 제14 부록씨족8</ref> 원전인 《[[삼국사기]]》에는 ‘가문의 계보는 알 수 없고,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과 문장력도 갖추었다.’라고만 적혀 있다. 이때의 국제 정세는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힘의 균형이 급격하게 기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大臣)이었다. === 제2차 고수전쟁 발발 === {{참고|살수 대첩}} 612년 1월([[음력]]) [[수 양제|양제]]가 100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로 출병하였다. 그러나 [[요동성]] 전선에서 몇 달 간 발목이 잡히자 6월(음력), [[우문술]], [[우중문]], [[설세웅]], [[위문승]] 등 30만 5천 명의 아홉 군을 별동대로 조직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진군하게 하였다. 별동대는 100일 치 양식, [[무기]], [[옷감]] 등 온갖 물자를 지고 행군을 시작했지만, 병사들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몰래 버리는 바람에 고작 [[압록강]]에 닿았는데도 [[식량]] 부족에 허덕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하며 수나라군의 군영에 들어가 그 형편을 엿보았다. 만약 을지문덕이 오면 사로잡으라는 양제의 밀지를 받았었던 우문술과 우중문은 그를 억류하려 하였는데, 위무사로 종군하고 있던 [[유사룡]]이 말린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다. 이내 후회한 우중문이 다시 오라는 것을 을지문덕이 무시하자 수나라군의 정예[[기병]]이 추격해왔다. 이에 싸울 때마다 지고는 우중문에게 희롱하는 [[시 (문학)|시]]를 보냈다.<ref>《삼국사기》에서는 수나라군이 평양 근처까지 왔을 때 시를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ref>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다시 회유하기에 약 올리듯 영채를 [[불]]태우고 철수했다.<ref name="함정카드 발동">《수서》60권 열전 제25 우중문</ref> 우문술은 을지문덕도 놓쳤고 군량도 다 떨어졌으므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우중문이 지금 돌아가면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볼 수 있겠냐고 성을 내며 계속 나아갈 것을 고집했다. 우문술도 언성을 높였으나, 이전에 양제가 우중문이 계획성이 있으니 그의 의견을 경청하라고 하였기에 부득이 따랐다.<ref name="함정카드 발동" /> 압록수를 건너 몰려오는 수나라군을 을지문덕이 막으려 했으나 [[날|하루]]에 7번 겨뤄 모두 지는 등 후퇴를 거듭하였다. 승리에 도취한 수나라군은 계속 진격하여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 진을 쳤다. === 모든 것은 계획대로 === 사실 모든 것은 을지문덕의 기만에 의한 유도 작전이었다. 수나라군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일부러 달아났던 것이었다.<ref>[[청야 전술]]까지 구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고구려대수당전쟁사》(高句麗對隋唐戰爭史), 1991</ref> 수나라군은 지칠대로 지쳐서 다시 싸우기가 힘들었던 데 반해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했다. 을지문덕이 우문술에게 ‘[[군대]]를 돌리면 [[영양왕|왕]]을 모시고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뵙겠다’고 거짓 항복하는 [[서신]]까지 보내자 수나라군은 결국 이를 명분 삼아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수나라군이 방진(方陣)을 치며 퇴각하는 것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가다 싸우기를 반복했다. 7월(음력), 마침내 수나라군이 살수에 이르러 반 즈음 건너자 뒤에서 후군을 공격했다. 수나라군은 [[신세웅]]이 [[작전 중 사망|전사]]하는 등 여러 부대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달아나기에 급급해 하루 만에 450리 거리의 압록수에 닿았다. 이때 [[왕인공]](王仁恭)이 최후의 부대가 되어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막았다. [[요동]]으로 되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이었고 수많은 군수물자와 공성병기는 모두 잃어버렸다. 양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총퇴각하니 [[제2차 고구려-수 전쟁|제2차 여수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 후대의 평가 == 국난의 영웅으로 인식되던 을지문덕은 [[병자호란]] 이후 자존심 회복과 [[사회]]의 응집 차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ref>이정빈, 〈1847년 평안도 안주지역의 을지문덕비 건립과 의미〉, 《역사와실학》vol.51, 역사실학회, 2013</ref> [[1645년]] 평양에, [[1670년]] [[평안도]] [[안주시|안주]]에 사우가 건립되고 [[조선 숙종]] 때 각각 충무사(忠武祠), 청천사(淸川祠)로 사액했다.<ref>[[김정호]], 《[[대동지지]]》21권 평안도</ref> 다만 그 이전에도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f>[[이식 (1584년)|이식]], 〈[[백상루]]에 제하다〉, 《택당집》속집 3권</ref> 이외에도 많은 [[문인]]들의 소재가 되었다.<ref>[[조준]], 〈안주회고〉, 《송당집》1권 칠언절구. 오광운, 〈살수첩〉, 《약산만고》5권 해동악부. 김수민, 〈을지문덕가〉, 《명은집》기동악부 등</ref> ==== [[김부식]]의 평가 ==== " 수나라에 비해 작았던 고구려가 [[수 양제|양제]]의 엄청난 수의 군대를 거의 섬멸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으며, 그가 있었기에 고구려도 존재했다. " ==== [[신채호]]의 평가 ==== " 동서고금 허다한 싸움이 있지만, 적은 군사로 강대국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쳐서 그림자도 못 돌아가게 하고, 백만 병 적진에 출입하기를 을지문덕같이 한 자가 있는가? 어린 아이도 그 위엄을 듣고 울음을 그치며 [[풀|초]][[나무|목]]도 그 이름을 알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 [[털]] 끝 하나, [[침]] 하나만 본받아도 독립을 보전하고 [[역사]]에 빛날지니, 을지문덕은 우리 4,000년 동안에 제일의 위인이요 온 [[세계]]에서도 그 짝이 드물다. "<ref>신채호, 《을지문덕전》</ref> == 수공에 대한 오해 == 살수 대첩 하면 흔히 [[귀주 대첩]]과 함께 수공(水攻)을 떠올린다. 그러나 《[[삼국사기]]》, 《[[수서 (역사서)|수서]]》, 《[[자치통감]]》, 《[[동사강목]]》, 《[[해동역사]]》 등 한국과 중국의 사서에는 상류의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오직 [[근대]] 기록에만 등장하는데<ref>신채호, 《[[조선상고사]]》</ref> 이는 민간의 [[전설]]이었던 칠불전설(七佛傳說)<ref>‘세상에 전하기를 “수나라군이 강가에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선박|배]]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일곱 [[중]][僧]이 와서는 여섯 중이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가니, 이를 보고 깊이가 얕은 줄 알고 다투어 건너다가 빠져 죽은 [[시체]]가 강에 가득하여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사찰|절]]을 짓고 칠불사라 하였으며 일곱 중처럼 일곱 [[돌]]을 세워 놓았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52권 평안도 안주목 불우(佛宇) 칠불사</ref>이 변형되어 수록된 것이다.<ref>남재철, 〈살수대첩에서의 칠불전설과 조선조 한시에의 수용 양상〉《한문학보》 Vol.24, 우리한문학회, 2011</ref> 실제 수공을 활용한 [[전투]]는 [[흥화진 전투]]뿐이다. == 을지문덕의 시 == 정해진 제목이 없어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증수장우중문시(贈隋將于仲文詩), 유우중문(遺于仲文) 등으로 불린다. [[한국]]에서 현전하는 이른 시기의 5언4구 고시(古詩)이다. {{인용문| *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 신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 싸움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 만족함을 알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 이름을 따온 것 == * [[을지로]] : [[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중구]]에 있는 [[도로]]이자 동네 * [[을지무공훈장]] : [[무공훈장]] 2등급 * [[을지 프리덤 가디언]] : [[행정기관]] 등 범정부 상황대비 연습 및 [[한미]] 합동 지휘소 연습([[시뮬레이션]]) * [[DDH-972 을지문덕]] :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제2번함 * [[을지부대]] : [[대한민국]] 제12보병사단의 별칭 == 을지문덕이 등장하는 작품 == * 《[[삼국기]]》, [[한국방송공사|KBS]], [[1992년]] ~ [[1993년]], [[배우]]:[[김길호]] * 《[[연개소문 (드라마)|연개소문]]》, [[SBS]], [[2006년]] ~ [[2007년]], 배우:[[이정길 (1944년)|이정길]] * 《[[한국사기]]》, [[한국방송공사|KBS]], [[2017년]]~[[2017년]], 배우:[[성찬호]] === 소설 === {{위키문헌|을지문덕전}} {{위키문헌|을지문덕}} * 《을지문덕전》, 신채호, 1908 * 《을지문덕》, [[김동인]] * 《살수》, [[김진명]], 2005 == 같이 보기 == * [[고구려-수 전쟁]] * [[살수 대첩]] == 각주 == {{각주|2}} == 참고 문헌 ==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g_044r_0020 《삼국사기》44권 열전 제4 을지문덕]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g_020r_0020 《삼국사기》20권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23년] == 외부 링크 ==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68654&cid=59015&categoryId=59015 네이버캐스트 - 을지문덕] {{고구려}} {{고구려 사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을지문덕| ]] [[분류:생몰년 미상]] [[분류:생년 미상]] [[분류:7세기 한국 사람]] [[분류:고구려의 대장군]] [[분류:여수 전쟁 관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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