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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정보 |이름 = 이근안 |원어명 = 李根安 |출생일 = {{출생일과 만나이|1938|3|21}}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인천]] [[송현동]]<ref>'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2013, 도서출판 강남)</ref> |별명 = 고문기술자, 박중령, 불곰, 반달곰, 김철수 |배우자 = 신옥영 |군복무 = {{공군|대한민국}} |복무기간 = [[1959년]] [[10월 1일]] ~ [[1962년]] [[9월 30일]]<ref>'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2013, 도서출판 강남)</ref> |계급 = [[대한민국 공군|공군]] [[사병]]<ref>'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2013, 도서출판 강남)</ref> |근무 = |지휘 = |자녀 = 슬하 3남 |정당 = [[무소속]] |종교 = [[불교]] → [[개신교]]([[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합동개혁]]) |경력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 전직 목사([[대한민국의 경찰|경찰]] 출신이며 전직 [[개신교]] [[목사]]) |학력 = [[한밭중학교]] 졸업 <br /> [[경동고등학교]] 졸업 |직책 = 대한민국 [[경기도남부지방경찰청|경기지방경찰청]] 공안분실 실장 |총리 = [[진의종]] 국무총리 <br>[[신병현]] 국무총리 권한대행<br>[[노신영]] 국무총리 서리<br>[[노신영]] 국무총리 |장관 = [[서정화 (1933년)|서정화]]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br>[[노태우]] 내무부 장관<br>[[주영복]] 내무부 장관 |차관 = [[이춘구]] 내무부 차관<br>[[김창식 (1929년)|김창식]] 내무부 차관 |임기 = 1984년 2월 29일 ~ 1987년 1월 8일 |대통령 = [[전두환]] }} '''이근안'''(李根安, [[1938년]] [[3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경찰관, 전직 목사였다. 경찰관 재직 시절 공안통, 강력계에서 활동했으며 한때 비공개 요원으로 방첩업무에 참여했다. 박정희 유신 정권 및 최규하 정권, 전두환 정권에서 고문기술자가 되어서 여러 범죄자 및 민주화 운동가들을 고문했다. 한때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의 수사에도 참여하였다. == 학력 == * [[1955년]] [[한밭중학교]] 졸업 * [[1958년]] [[경동고등학교]] [[졸업]]<ref>'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2013, 도서출판 강남)</ref> == 생애 == [[1959년]]에서부터 [[1962년]]까지 [[대한민국 공군]]에서 복무하였고 그 후 [[대한민국 경찰]] [[순경]]에 임명되었다. 가명은 김철수이고, 별칭은 박중령, 불곰, 반달곰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8년]]까지 대공, 방첩, 공안 분야 수사 담당관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 경찰관에 임용, 그해 [[7월]] 서울경찰학교를 마치고 순경으로 발령받았다. [[1972년]] [[8월]] [[내무부]]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본부|치안국]] 대공분실 [[형사]]로 발령받으면서 이후 [[1988년]]까지 경기도지방경찰청 등에서 대공, 강력계, 살인사건, 방첩 전문 수사관 등을 맡았다. 한때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를 찾지 못하자 그를 [[화성경찰서]]로 발령냈지만 용의자를 잡지 못하고, 5공 청산으로 그의 고문행위에 대한 진술이 쏟아져 나오면서 [[1988년]] [[3월]] 퇴임하였다. 경찰 재직 중 수많은 범죄자, 야당 인사와 학생 운동가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고문 기술자'''라고 불렸다. 그는 [[1979년]] [[남민전 사건]]과 1981년 전노련 사건, 1986년 반제동맹 사건 등을 수사했다. 타 기관으로 출장을 다녔다는 설도 있으나 그가 파견됐다는 타 기관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후 불법 체포 및 고문을 시도한 혐의로 수배되었고, 이후 약 10년간 도피생활을 하다 [[1999년]] [[10월 28일]]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자수했다. [[검찰]]에 자수함으로써 구속되어 이듬해 재판 결과 징역 7년과 자격 정지 7년 형을 언도받았다. 그 뒤 [[2006년 11월]]에 출감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71770</ref><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70062.html</ref><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184223&category=N1§ion=03</ref> 출감 후 [[2008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개신교 목사가 되었으나 목사로 설교를 하면서 "차라리 고문은 예술이었다."라는 등의 망언을 하면서 급기야 목사로서의 행적과 김근태에 대한 고문 등의 책임 관련 논란이 불거지면서 결국 목사 자격이 박탈되었다. === 초기 활동 === 그의 출생지는 [[인천]] [[송현동]]이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를 따라 [[대전]]으로 이주했다. 한때 그의 고향이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유년 시절 [[유도]]와 [[태권도]], [[합기도]] 등을 배웠으며, 경찰 인사기록카드에 의하면 그의 주특기는 [[합기도]]라 한다. [[대전광역시|대전]]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초등학교를 거쳐 [[1955년]] [[3월]] [[대전]] [[한밭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 고등학교를 서울 [[경동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생활했다. [[1958년]] [[3월]]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10월 1일]]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하여 [[공군기술교육단]](대전비행장)에서 훈련을 받고 공군기술교육단 사령부 감찰감실에서 복무하다 [[1962년]] [[9월 30일]] 사병으로 전역하였다. [[1960년]]대 초, [[충청남도]] [[공주군]] 출신의 부인 신옥영을 만나 결혼하였다.<ref name="rision">[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_donga/9912/wd991200280.html 10년동안 숨죽인 은거생활, 이근안 가족은 어떻게 살았나] {{웹아카이브|url=https://web.archive.org/web/20150707081814/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_donga/9912/wd991200280.html#}} 여성동아 1999년 12월호</ref> 결혼 초기에는 종업원 2~3명을 두는 등 [[미용실]]을 제법 크게 운영하기도 했지만 순경으로 경찰에 투신한 이씨가 고속승진을 하면서 생활에 안정을 찾자 미용실을 그만뒀다.<ref name="rision"/> [[1970년]] [[7월]] 경찰 공무원에 채용, 순경으로 임용되었다. 군인 출신으로 경찰 재직 중 '''박중령'''이라는 별명과 '''불곰''', '''반달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경찰 재직 중 사기꾼, 도박사범, 마약사범, 강력 범죄자 등을 여러 명 검거하여 실적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 경찰관 시절 === ==== 박정희 정권 시절 ==== [[1972년]] [[8월]] [[경찰청]]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본부|치안국]] 대공분실 [[형사]]로 발령되었고, [[1973년]] [[2월]] 간첩, 강도, 깡패 등의 검거 유공으로 [[경장]]으로 특진하였다. [[1974년]] [[7월]] [[경기도남부지방경찰청|경기도경찰청]] 대공분실로 발령받았으며 [[경기도남부지방경찰청|경기도지방경찰청]] 대공전문 수사관, [[강력범죄]] 수사관, [[살인]]전담 수사관, 방첩전문 수사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76년]] [[8월]] [[경사]]로 승진하고, [[1970년]]대 후반 [[경기도남부지방경찰청|경기도경찰청]] 대공분실장으로 승진했다. 대공분실장 재직 중 재야 인사 및 학생운동권 등을 고문하였고, [[1979년]] [[3월]] [[경위]]로 승진했다. 그러나 [[1979년]] 간첩 용의자가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자, 현대중공업에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위장 취업하기도 했다. 이후 신분을 숨기고 7개월간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며 용의자의 동태를 파악하여 검거했다. 1979년 10월, [[남민전 사건]]을 수사하였다. 그는 간첩 용의자와 야당 인사, 민주화 운동가들을 감시, 불법 체포하기 위해 엿장수, 월부책장사, 강냉이 장수 등으로 변장하여 활동하였다. [[1979년]] [[경위]]로 승진,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본부|치안본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발령받았다. [[1979년]] 성실 근무로 청룡봉사상과 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그 후 [[경기도남부지방경찰청|경기도 경찰청]] 공안분실장으로 부임하여, 경기도 경찰청 공안분실장으로 있으면서 [[김근태 (1947년)|김근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수배 후 불법 체포하였다. 범인 취조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관절 빼기, 볼펜심 꽂기 등의 고문 기술로 사람들을 고문하여 '''고문 기술자'''로 불렸다. ==== 전두환 정권 시절 ==== [[1980년]] [[9월]] 전두환이 집권하자 그해 [[9월 1일]]부로 기존의 군인 장교 및 경찰관들을 대대적으로 예편, 해임시켰지만 그는 강력범죄 및 간첩 검거, 조직폭력배 검거, 운동권 검거 능력 등을 인정받아 해임되지 않고 계속 유임되었다. [[1981년]] [[부림 사건]], 전노련 사건을 수사하여 그 관련자들을 전원 체포하기도 하였다. 특히, [[1985년]]에 [[김근태 (1947년)|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고문했던 혐의는 [[1999년]] 검찰 조사에서 자수 이후 일부 인정하였다.<ref name=yh>{{뉴스 인용|url=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2105|제목='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 목사됐다|뉴스=중앙일보|날짜=2008-11-01|확인날짜=2008-11-01}}{{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2105 }}</ref> 그 외에도 [[1983년]] 함주명 조작 간첩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고문하였다는 증언도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info.peoplepower21.org/pub-html/1662.html|제목=이근안이 자백하는 걸 보니 측은하기도 하대요. 하지만 지금 화해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출판사=참여연대|날짜=1999-12-01}}{{깨진 링크|url=http://info.peoplepower21.org/pub-html/1662.html }}</ref> [[2003년]] [[3월 31일]]에는 [[1984년]] 간첩조작사건에 간첩으로 몰렸던 전직 예비역 군인 출신 이장형 등이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ref name="오마이1">[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15638 묻혀진 진실, '이장형 간첩조작사건'] - 오마이뉴스</ref><ref name="천주1">[http://www.cathright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281 ::천주교인권위원회::<!-- 봇이 따온 제목 -->]</ref> 그 외에 반제동맹 사건 의혹도 받아왔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1029833 이근안씨 직권구속..“10년간 집에서 은신” - munhwa.com<!-- 봇이 따온 제목 -->]</ref> [[1984년]] [[경감]]으로 승진했다. [[1986년]] [[10월 23일]] [[경찰의 날]]에 대통령 [[전두환]]으로부터 [[대한민국의 훈장|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1986년]]부터 [[경기도]] [[화성시|화성군]]의 각처에서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경찰이 용의자의 정체를 찾아내지 못하자, 당시 내무부는 이근안을 [[오산경찰서|화성경찰서]]로 발령하여 살인자를 잡게 하였다. [[1987년]] [[삼성그룹]] 등 기업체의 직원 연수에 강사로 초빙, 운동권의 실태와 자신의 수사경험 등을 강연했다.<ref name="nod">[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812250028911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2-25&officeId=00028&pageNo=11&printNo=194&publishType=00010]</ref>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의 [[노조]] 설립을 방해하는데 앞장 서 노동자들을 납치, 폭행했다는게 노동자드의 주장이다.<ref name="nod"/> === 퇴임 이후 === 일각에서 그의 고문행위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어 오다가 [[6.29 선언]] 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이 붕괴되고, 수감된 일부 야당 인사와 학생 운동가들이 석방되면서 그의 고문 행위를 주장했다. 이후 그에게 고문당했다는 인사들의 증언과 목격담이 사회적으로 부각되면서 비판을 받았다. [[1987년]] [[12월 10일]] 간첩죄를 뒤집어쓴 납북 어부 김성학이 그를 고소했다.<ref name="nod"/> 1988년 12월까지도 [[서울고법]]에서 재판 중이었다.<ref name="nod"/> [[1988년]] [[3월]] [[화성경찰서]]에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경찰관직을 사퇴했다. 그런데 [[1988년]] 12월 퇴직 이후, 여러차례 공소가 제기되어 경찰은 그를 공개 수배하였다. 그러나 10년 10개월 동안, 집 근처 창고 뒤에 은신하고 있다가<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1029709 이근안씨, 집창고 상자뒤에 숨어 - munhwa.com<!-- 봇이 따온 제목 -->]</ref> [[1999년]] [[10월 28일]]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ref name=yh/><ref name="cho">{{뉴스 인용|url=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611/200611070051.html|제목=출소 이근안씨 "그땐 애국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역적"|출판사=조선일보|날짜=2006-11-07|확인날짜=2012-01-01|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016225819/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611/200611070051.html#|보존날짜=2011-10-16|url-status=dead}}</ref> 하였고, 1999년 11월에 구속 기소되었다.<ref name="hhh1">[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70163.html 김근태 “용서 빈 이근안, 진심이었을까” 심경 토로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봇이 따온 제목 -->]</ref> 2000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ref name="hhh1"/> 과 자격 정지 7년이 확정되었다.<ref name="cho"/> 이에, 그는 사과문을 발표하였는데, 정치인 김근태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여 옥중에 수감된 그를 면회하기도 했다. 그 후 [[2005년]] [[10월]] 법무부에서 가석방 부적격 결정을 받았다.<ref name="hhh1"/> 수감 생활 중 그는 자신이 고문했던 사람들 중의 한사람인 김근태에게 사과하였으나, 김근태는 "이 전 경감이 제게 ‘눈을 감을 때까지 용서를 빈다’고 했지만, ‘이 양반이 진심으로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눈물을 안 흘리는 것이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김근태는 "이제 두려움은 많이 가셨지만 1980년대 중반에 무참하게 짓밟혔던 악몽이 되살아 났다. 면회가 끝난 후 돌아와서 이근안 전 경감의 용서를 빌고 싶다는 이야기가 진심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조금 괴로웠다"라며 이근안의 사과에 대해 그 진의를 의심하였다.<ref name="hhh1"/> 여주교도소<ref>구. 수원교도소</ref>에서 복역을 하였고, [[2006년]] [[11월 7일]] 오전 0시 25분 경에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현.여주시 가남읍) 여주교도소에서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였다.<ref name="hhh1"/> 이근안은 출소 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라고 출소의 변을 대신했다.<ref name="lady">{{서적 인용|url=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8878 |제목=만기 출소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 |출판사 = 레이디경향 |저자 = 박연정 |연도=2006년 12월 |isbn=9780001329829}}</ref> 하지만 [[11월 16일]] 오전, 민가협과 유가협 회원 20여 명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경찰청 민원실에서 그와 관련하여, 경찰의 사죄 및 철저한 진상조사를 주장하며 경찰청장 면담을 요구하며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ref name="hhh1"/> 한편, 본인(이근안)을 모델로 한 MBC 특집드라마 <현악 6중주>가 [[1995년]] 6.25 특집극으로 편성될 예정이었는데<ref>{{뉴스 인용 | 제목 = '고문기술자'소재 드라마 만든다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1500289115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3-15&officeId=00028&pageNo=15&printNo=2176&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김도형 | 쪽 = | 날짜 = 1995-03-19 | 확인날짜 = 2020-04-05 }}</ref> 제작비 문제 때문에 연출자 고석만 PD(당시 단막극 팀장)가 MBC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데다 MBC가 경찰과의 관계 약화를 염려하여 제작을 달갑지 않게 여겼고 이 과정에서 연출자가 [[1995년]] [[3월 29일]] MBC에 사표를 제출한 후 프리랜서를 선언하여<ref>{{뉴스 인용 | 제목 = MBC 고석만PD 사표 프리랜서 선언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3000289110007&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3-30&officeId=00028&pageNo=10&printNo=2190&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김도형 | 쪽 = | 날짜 = 1995-03-30 | 확인날짜 = 2020-04-05 }}</ref> 편성이 무산됐으며 고석만 PD는 <현악 6중주>의 제작과 관련한 MBC와의 마찰 외에도<ref>{{뉴스 인용 | 제목 = MBC 고석만PD 사표 프리랜서 선언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3000289110007&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3-30&officeId=00028&pageNo=10&printNo=2190&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김도형 | 쪽 = | 날짜 = 1995-03-30 | 확인날짜 = 2020-04-05 }}</ref> [[1994년]] [[10월]] "평프로듀서로 일하고 싶다"며 당시 맡고 있던 단막극 책임PD(종합병원 전원일기 등등) 보직 사퇴의사를 밝혔지만 MBC 측의 반대로 무산되자 프리랜서를<ref>{{뉴스 인용 | 제목 = MBC 고석만PD 사표 프리랜서 선언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3000289110007&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3-30&officeId=00028&pageNo=10&printNo=2190&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김도형 | 쪽 = | 날짜 = 1995-03-30 | 확인날짜 = 2020-04-05 }}</ref> 선언했다. ==== 수형 생활과 종교인으로 변신 ==== [[2005년]] [[6월]], 이근안은 옥중에서 통신 과정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ref name="신학">[https://archive.today/20130426193926/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1981 [브리핑]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 목사 됐다- 중앙일보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수감 당시, 이근안은 신학 공부에 열중했었는데 한 때 모범수로 지목되기도 했다. 교도소에서 한국교정선교회를 통해 개신교를 접한 이근안은 출소한 다음 총신디지털신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전도사 시절에는 신앙 간증 집회에 참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10월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 산하 한 분파의 목사 임직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 목사가 되었다.<ref name="신학"/><ref> {{뉴스 인용 |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31/2008103101001.html |제목='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됐다 |출판사=조선일보 |날짜=2008-10-31 |확인날짜=2008-10-31}}</ref> ==== 논란과 목사 면직 ==== [[일베저장소]], [[디씨인사이드]] 등에서는 이근안을 애국자로 칭송하였고, 이근안은 목사 활동 중 자신의 고문 활동이 "애국",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등 논란을 빚었다. 이근안이 소속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결국 [[2012년]] [[1월 14일]] 목사직에서 면직하는 결정을 내렸다.<ref>(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0028&newsid=20120119102828528&p=yonhap 예수교장로회, 이근안 목사직 면직 결정)</ref> 2012년 12월14일 저서(《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출판 기념회에서는 "과거를 회개하며, (고문) 행위 자체가 잘못이었다"면서도 자서전에 사죄한다는 내용이 없다는 지적에 이씨는 "전반적으로 다 회개를 하는 것이지 한 건 한 건에 대해서 말하기는…"이라고 '사죄' '사과' 대신 '회개'라는 말을 사용했다.<ref>[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5990680?sid=102 연합뉴스, 이근안 "고문자체가 잘못"…자서전서는 '시대탓' 변명]</ref> 이후 2013년 1월7일자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는 "잘못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은 사실이다. 간첩을 소탕하며 공적을 쌓고 국가에서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다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에 ‘씹다 버린 껌’이 되니 처음에는 분한 마음도 들었다. 나라를 위해서만 일했는데 시대가 바뀌었다고 이런 취급을 받나 싶어 억울하기도 했다"며 "내가 고문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죄인이라 생각한다. 일일이 찾아가 사죄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교인으로서 참회, 회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사과라는 의미다"라고 말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315414, 서울신문, ‘고문 기술자’ 이근안 마지막 언론 인터뷰]</ref> == 가족 관계 == * 부인: 신옥영<ref name="lady"/> ** 자녀: 3남 == 수상 경력 == * 청룡봉사상(1979년) * 내무부장관 표창장(1981년), 무림사건 해결 유공 * 9사단장 표창장(1982년), 국가안보 기여 * [[근정훈장|옥조근정훈장]](1986년 10월 21일) == 이근안을 연기한 배우 == * 1993년 《[[사건 25시]]》 이근안 공개수배편 배우 : 미상 * 2012년 《[[남영동1985]]》 배우 : [[이경영 (1960년)|이경영]](배역 : [[이두한]]) * 2013년 《[[변호인]]》 배우 : [[곽도원]] * 2017년 《[[1987 (영화)|1987]]》 배우: [[김윤석 (배우)|김윤석은 박처원 역인데?]] == 저서 == *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 관련 기사 == * 이수영.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130 ‘고문기술자’ 이근안 직격토로 1탄]. 일요서울. 2010년 2월 9일. * 이수영.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140 ‘고문기술자’ 이근안 격정토로 2탄]. 일요서울. 2010년 2월 16일. * 김도형.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2641.html 김근태 전기고문 기술자는 이근안, 한겨레가 첫 보도]. 한겨레신문. 2011년 12월 30일. * 김혜영.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82079 김근태 "공지영, 나 너무 옹졸한가"]. 뷰스앤뉴스. 2011년 12월 30일. == 참고 자료 == * {{저널 인용 | 저자 = [[한홍구]] | 날짜 = 2001-05-22 | 제목 =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 저널 = 한겨레21 | issue = 360 | url = http://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1/05/021075000200105220360052.html | 확인날짜 = 2007-12-09}} * 《KBS 인물 현대사》 [http://www.kbs.co.kr/1tv/sisa/manhistory/vod/1314193_968.html 2004년 4월 2일] == 각주 == <references/>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1938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 [[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 [[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 [[분류:최규하 정부]] [[분류:대한민국 제5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6공화국]] [[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분류:대한민국의 목회자]] [[분류:냉전]] [[분류:반공주의자]] [[분류: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 [[분류:고문 가해자]] [[분류:한밭중학교 동문]] [[분류:경동고등학교 동문]]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경찰 범죄]] [[분류:국가에 의한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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