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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세 (18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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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 | 이름 = 이기세 | 그림 = 李基世.jpg | 출생일 = [[1888년]] [[10월 11일]]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개성부]] | 사망일 = [[1945년]] (58세) | 활동기간 = [[1907년]] ~ [[1945년]] | 직업 = 문학가, 작사가, 연극인, 영화인 | 대표작 = | 수상 = }} '''이기세'''(李基世, <small>일본식 이름: </small>高山基世<small>다카야마 기세이</small>, [[1888년]] [[10월 11일]] ~ [[1945년]])는 [[일제강점기]]에 문예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인물이다. 대중가요 작사가로서는 필명 '''이현경'''(李賢卿)을 사용했다. [[임성구]](林聖九), [[윤백남]](尹白南)과 함께 신파극 초창기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ref name="글로벌_1">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파극/신파극의 작가와 작품/이기세,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 생애 == 1888년에 당시 [[황해도]]에 속해 있던 [[개성부]]에서 태어났다. 신연극을 실행할 목적으로 교토로 건너가서 당시 일본 신파극계 9간부의 한 사람이며 교토 신파극의 거두였던 시즈마(靜間小次郞)의 문하에서 2년간 주로 남의 연극을 산기(算記)하여 오는 일을 맡아보며 연극공부를 하고 귀국했다.<ref name="글로벌_1"/> [[1912년]] 안광익(安光翊), 김영근(金永根), 고수철(高秀喆) 등과 함께 신파극단인 [[유일단]](唯一團)을 조직하고,<ref name="글로벌_1"/> 극장 개성좌를 건립하며 초창기 연극계에서 [[신파극]]의 선구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때 대표작인 《장한몽》에서는 주인공 이수일 역으로 열연하여 후세인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있다. 한국사극의 세 번째 극단인 유일단은 1914년까지 《처(妻)》, 《자기의 죄(罪)》 등 인기 레퍼토리를 상연했다. 유일단이 해산된 후 이기세는 [[1916년]]에 윤백남, 이범구(李範龜) 등과 함께 ‘예성좌(藝星座)’를 조직, 그 해 말 해산될 때까지 《카추샤》, 《쌍옥루(雙玉淚)》 등을 공연했다. [[1919년]]에는 다시 ‘조선문예단’을 발족시켜 연쇄극(連鎖劇)을 상연했고, 잠시 연극을 떠나 《시사신문사(時事新聞社)》에 근무하다가, [[1922년]]부터는 개량 신파극단인 ‘예술협회(藝術協會)’를 창단하여 《운명》, 《희망의 눈물》, 《눈오는 밤》 등 개량신파극을 공연했다.<ref name="글로벌_1"/> 1930년대 들어서는 음반 및 영화 보급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기세는 이미 1920년대에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이며 대중 가수인 [[윤심덕]]을 데뷔시킨 일이 있다.<ref>{{웹 인용 |url=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244430 |제목=사의찬미 |출판사=엠파스 백과사전 |확인날짜=2008-04-25 }}</ref> 〈[[황성옛터|황성의 적]]〉으로 유명한 [[이애리수]]도 이기세가 발굴했다.<ref>{{서적 인용 |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SBN=978-89-90626-26-4 |페이지=266쪽}}</ref> [[1930년]] [[조선음률협회]]를 창립하였으며, 영화배급사인 기신양행을 운영하기도 했다. [[1934년]]에는 인기 레코드사인 [[일제 강점기의 음반사#빅타레코드|빅타레코드]]의 문예부장을 지냈다. == 친일 논란 == 21세인 [[1908년]]에 국채보상동맹이라는 단체의 관서 지역 발기인을 맡으며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일본]] 유학을 다녀온 것은 분명하나 어느 학교에서 수학했는지 학력 사항은 확인되지 않았다. [[1920년]]부터 [[국민협회]]의 기관지 《시사신문》에 근무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민원식]]과의 인연으로 시사신문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21년에는 국민협회 평의원을 지내는 등 [[3·1 운동]]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신일본주의를 내세운 이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21년 1월에 경성공회당에서 국민협회 창립 1주년 기념식이 열렸는데, 이때 이기세는 '소위민심악화'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923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인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발탁되어 3년 동안 재직했다. [[1927년]]에 매일신보 이사 겸 편집국 주사로 승진했고, 곧 편집인 겸 발행인에 올랐다. 1927년 7월 23일부터 1928년 2월 27일까지 이기세가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근무하는 동안 매일신보는 사설을 통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불상사'라며 비난하는 등 총독부 외곽 단체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1938년]]에 유명한 유흥 음식점인 [[국일관]]을 인수했다. 같은 해 [[중일 전쟁]]을 위한 국방헌금으로 거액인 5백원을 헌납하기도 했다. [[1942년]]에 유한회사 국일관을 설립해 이사가 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되었다. == 각주 == <references/> == 같이 보기 == * [[국민협회]] * [[매일신보]] == 참고 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제목=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연도=2007 |발행월=12 |id=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출판위치=서울 |쪽=1822~1841쪽 |장=이기세 |장url=http://www.pcic.go.kr:8088/pcic/UserFiles/File/2007JOSA/SUJAKSUBSAK/148-LKS.pdf }}{{깨진 링크|url=http://www.pcic.go.kr:8088/pcic/UserFiles/File/2007JOSA/SUJAKSUBSAK/148-LKS.pdf }} * {{서적 인용 |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SBN=978-89-90626-26-4 |페이지=243~246쪽}}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7HIL_A9999_1_0009182|이기세|李基世}}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1888년 출생]] [[분류:1945년 사망]] [[분류:일제강점기의 연극 배우]] [[분류:일제강점기의 영화 배우]] [[분류:일제강점기의 언론인]] [[분류:한국의 남자 배우]] [[분류:일제강점기의 기업인]]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분류:개성시 출신]] [[분류:신파극]]
이기세 (18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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