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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녕 (17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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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이름 = 이봉녕 |원어명 = 李鳳寧 |그림 = |그림설명 = |본명 = |로마자 표기 = |출생일 = 1793년 9월 21일 |출생지 = 경기도 포천 |사망일 = 1871년 5월 5일 |사망지 = |국적 = 조선 |학력 = 성균관 |경력 = 금부도사, 사헌부감찰, 이문학관, 부사맹, 승문원 이문학관, 평시서주부, 선공감주부, 서부령, 하양현감, 영천군수, 제감감찰, 행돈녕부판관, 사옹원주부, 고양군수, 지평현감 겸 광주진관 |직업 = 문신, 외교관, 시인, 작가, 서예가 |병역 = |활동기간 = |소속 = |종교 = |배우자 = 광주이씨 부인 |상훈 = |웹사이트 = |서명 = }} [[파일:문보 이재명 편.gif|섬네일|200px|문보의 이재명 편<br/>2번째 칸에 그의 이름이 있다.]] '''이봉녕'''(李鳳寧, [[1793년]] [[9월 21일]] - [[1871년]] [[5월 5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시인, 외교관이자 서예가, 작가이다. 본관은 [[우계 이씨|우계]](羽溪), 자(字)는 주경(周經), 호(號)는 분서(汾西)이다. 태화 [[이현상 (1770년)|이현상]](太華 李顯相)의 아들이다. [[경기도]] [[포천군|포천]] 출신. [[1819년]](순조 19)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교하여 유생이 되고 그 뒤 [[음서]]로 관직에 올라 금부도사, 사헌부감찰을 거쳐 [[1826년]](순조 26)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절의 동지부사 [[신재식]](申在植)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5년]](헌종 1) [[이문학관]] 등을 거쳐 부사맹으로 [[1836년]](헌종 2) [[동지사]] [[신재식]](申在植)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다시 [[승문원]] [[이문]][[학관]]이 되고, [[1839년]] [[평시서]]주부, [[1840년]] [[선공감]]주부, [[1841년]] 서부령(西部令) 등을 거쳐 [[1842년]](헌종 8) [[하양]][[현감]], [[1844년]] 다시 하양현감, [[1846년]] [[영천군|영천]][[군수]]를 지냈다. 이후 제감감찰 등을 거쳐 [[1858년]](철종 9) 행[[돈녕부]]판관 등을 역임했다. [[1860년]](철종 11) [[사옹원]][[주부]]를 거쳐 [[고양]][[군수]](高陽郡守)로 나갔다가 [[1861년]] [[지평]]현감(砥平縣監) 겸 광주진관(廣州鎭管) 등을 지내고 [[1864년]](고종 1) 다시 고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사퇴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는 [[단군 왕검]]에게서 시작된다고 봤고, [[성리학]]의 정통은 [[이황]]에서 [[이이]]로 이어졌다고 봤다. 저서로는 《분서집 (汾西集)》과 미간행 유고 《분서고 (汾西稿)》 등이 있다. == 생애 == === 출생과 가계 === [[1793년]](정조 17년) [[9월 21일]]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현,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태화 [[이현상 (1770년)|이현상]](李顯相)이고, 어머니는 풍양조씨(豊壤趙氏)로 승지,[[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조성보]](趙聖輔)의 5대손 [[승사랑]] 조기영(趙基永)의 딸이다. 이봉녕의 5대조 [[이상우]](李商雨) 역시 [[포천]]에 살던 먼 일가인 이영구(李英久)의 양자로 입양갔지만<ref>문과방목에는 양아버지 이영구의 아들로, 거주지는 포천으로 나타난다.</ref>, 다시 이봉녕의 생가 7대조 할머니이자 [[이상우]]의 생조모 전주이씨는 재상 [[이홍주]](李弘胄)의 측실 소생 서녀로<ref>국조방목, 이홍주 묘갈명편</ref>, 고령신씨 신순복(申福順) 소생이었고 신순복은 [[신숙주]]의 5대손 진사 신례(申椽+忠+忠)의 서녀였다. 이상우의 생모 전주이씨 역시 서출로, 그 친정아버지 이집이 영해군 이당의 5대손 가선대부 이숙무의 서자였다. 이상우의 양부 이영구와 양조부 이규(李規), 이여추(李汝樞)는 모두 후대에 세계가 실전되어 우계이씨 족보에서 누락되었다. 1910년 이후에 편찬된 족보에서 이봉녕의 5대조 이상우는 다시 생가 쪽 족보에 편입되었다. 생가쪽 8대조는 [[이희헌 (조선)|이희헌]](李希憲)으로 [[선조 (조선)|선조]]~[[조선 인조|인조]] 때의 [[한의사]]이며, [[임진왜란]] 직후 [[허준]]이 [[선조 (조선)|선조]]의 명으로 의서들을 저술, 편찬할 때 의서인출감교관으로 의서들의 영인과 발행을 감독했다. 증조부 [[이성석 (1714년)|이성석]](李聖錫)이 [[경기도]] [[영평군]] [[일동면]] [[기산리]](후일의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에서 [[한성부]] 북부로 이사왔고, 다시 할아버지 이한운(李漢雲)이 [[1795년]] 무렵 [[한성부]] [[종로]]방 [[세심대]]로 이사왔다. 증조부 이성석의 대에 [[사대부|사부]](士夫)로 인정되었다.<ref>일성록 정조 19년 을묘(1795) 1월 2일(을유)자 11번째기사, "한성부가 노인의 세찬에 관해 별단으로 아뢰었다."</ref><ref>일성록 정조 20년 병진(1796) 1월 1일(무신)자 10번째기사, "기로(耆老)의 대신과 문무(文武)의 경재(卿宰) 이하에게 세찬(歲饌)을 사급(賜給)하였다."</ref> 어머니 풍양조씨는 [[승사랑]] 조기영(趙基永)의 딸이며, [[승지]]와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한 [[조성보]](趙聖輔)의 6대손이다. 그러나 어머니 풍양조씨의 5대조 조상만(趙尙萬)은 그의 6대조 [[조성보]]의 서자였다.<ref>장순순, 〈朝鮮後期 通信使行의 製述官에 대한 一考察〉, 《전북사학 제 13집 (1990년 12월호)》 (전북사학회, 1990) 60페이지</ref> 조기영은 승사랑을 역임했는데, 후에 2016년 경매에 나왔던 이일녕(李馹寧, 뒤에 인령(麟寧))의 과거 시험 답안지에 외조부 승사랑 조기영 본 풍양으로 기록되었다. 형제으로는 형 이학령(李鶴寧), 이기령(李騏寧)과 동생 [[이인녕 (1800년)|이인령]](李麟寧)이 있었다. 이학령은 익증(翼增)이라는 아들을 두었지만 모두 일찍 죽고, 둘째 형 이기령은 [[단양군|단양]]으로 이주하였으며, [[1861년]](철종 12년) 76세의 고령에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고, 후에 노인직으로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다. 동생 [[이인녕 (1800년)|이인령]]은 [[승문원]] [[이문]][[학관]]과 군직, [[돈녕부]][[도정]] 등을 역임했다. 그밖에 누이 2명이 더 있었다. 우계이씨 족보에는 실전되었으나, 풍양조씨 한산군파의 족보 기록에는 누이 1명이 있어 청주한씨 한석동(韓奭東)에게 출가한 누이가 1명이 전한다. 그밖에 1827년의 족보에 수록되었으나 뒤에 실전된 또다른 누이는 청주한씨 한용관(韓容觀)에게 출가했는데, 주부 한상홍(韓象洪)의 아들이다. 교류하던 인사로는 신희석(申錫禧), 이선호(李善浩), 우촌 [[남상교]](雨村 南尙敎), [[최헌수]], 황파 정환균 등이 있다. 직재 김익동 (直齋 金翊東)과도 교류했는데, [[1853년]] 그의 아들 재흥이 그의 환갑일에 김익동을 초청했다 한다. === 사행길 수행원 === [[1819년]](순조 19년) 식년과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되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의 [[1833년]] [[9월 9일]]조 기사에는 그가 생원으로 나타난다.<ref>승정원일기 2294책(탈초본 115책) 순조 33년 9월 9일 병자 17번째기사</ref> [[1822년]] 어머니 풍양조씨와 아버지 [[이현상 (1770년)|이현상]]이 연이어 사망하여 3년상을 치렀다. 이후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의금부|금부]][[도사]]로 시작, [[사헌부]]감찰을 거쳐 다시 금부도사가 되었다. [[1826년]](순조 26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에 동지부사 자제군관(子弟軍官)에 임명되어, 부사 [[신재식]](申在植)의 수행원으로 [[홍양후]](洪良厚), [[신태희]](申泰羲)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홍양후]] 등과 [[중국]]의 명소를 방문했고, 왕희손(汪喜孫), 왕균(王筠), 월정(月汀) 또는 약정(篛汀) 이장욱(李璋煜) 등을 만나보았다. [[1827년]] [[3월]] 귀국하였다. 이후 [[이장욱]](李璋煜)과 교류하다가 어느 시점에 연락이 끊어졌는데, 이장욱은 [[1831년]](순조 31년) [[청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된 [[홍석주]](洪奭周)의 사위이자 자제군관 겸 [[타각]][[군관]](打角軍官)으로 파견된 한필교(韓弼敎)에게 [[김노경]](金魯敬), 청산 [[김선신]](淸山 金善臣), 홍군 일능(洪君 一能, 홍양후(洪良厚), 이군 주경(李君 周經, 이봉녕) 등의 안부를 물었다 한다. [[1833년]](순조 33년) 생원(生員) 홍매섭(洪邁燮)을 비롯, [[성균관]] 및 [[사부학당]] 유생인 관학[[유생]] 668명이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의 덕행을 칭송하고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하는 연명 상소에 공동 서명하였다.<ref name="sadang17">승정원일기 2294책 (탈초본 115책) 순조 33년 9월 9일 병자 17/18 기사, 1833년 道光(淸/宣宗) 13년</ref> 그런데 [[승정원일기]]의 기록에는 진사가 아닌 생원으로 오기되어 있다.<ref name="sadang17"/> [[1833년]]에도 부사를 따라 연행하였다.<ref>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세기 조선 지식인 의 문화 지형도》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6) 634페이지</ref> [[1835년]](헌종 1) [[12월 23일]] [[승문원]][[도제조]]의 천거로 제술관으로 승차한 안영(安泳)을 대신할 [[이문]][[학관]](吏文學官)이 되었다.<ref>승정원일기 2325책 (탈초본 116책) 1835년(헌종 1년, 도광 15년) 12월 23일 정축 14번째기사</ref> 제술관 서사순(徐士淳)이 6품으로 승진하자 이문학관 안영(安泳)이 제술관이 되고, 그 대임으로 천거되었다. [[1836년]](헌종 2년) [[1월 3일]] 부사맹(副司猛)이 되었다가<ref>승정원일기 2326책 (탈초본 116책) 1836년(헌종 2년, 도광 16년) 1월 3일 정해 18번째기사, 兵批의 관원현황</ref>, 그해 [[10월 16일]]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 [[신재식]], 부사 이노집(李魯集)이 파견되자, 그는 정사 신재식의 수행원으로 임백연(任百淵)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6년]]의 [[청나라]] 연행길에는 [[청나라]]에서 만난 중국인 학자 [[황작자]](黃爵滋), [[예인원]](倪印垣) 등이 조선 사절과 [[시|시문]]을 주고받았다. 이때 동지사 [[신재식]]과 이봉녕 외 5명이 [[황작자]]와 주고받은 시문은 《상간편 (相看編)》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간행되었다. 특히 [[예인원]]은 그와 [[신재식]]을 따로 찾기도 했다. [[청나라]] [[북경]]에서 그는 《연대묵연 (燕臺墨緣)》을 선물로 받아왔다. [[장요손]](張曜孫) 등은 추사 [[김정희]]에게 서한을 보내 그의 안부와 그의 서신을 구하려 하기도 했다. 1836년 동지사 연행길에 이봉녕은 신재식, 이노집(李魯集), 이상적(李尙迪), 임백연, 조계승(趙啓昇), 정환균(鄭煥杓), 최헌수(崔憲秀) 등과 함께 차운 시를 지었는데, 이들의 시는 상간편(相看編)이란 시선집으로 묶여 [[청나라]]에서 목판으로 간행됐다. 이봉녕의 시는 120수 정도 실렸다. 그는 황작자에게 《상간편 (相看編)》을 증정하는 한편, 《상간편 (相看編)》의 서문을 써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황작자와 證交를 맺은 것이 인생의 큰 즐거운 일이라고 하면서 상간편 전권을 증정할 테니 서문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또 황작자의 시우(詩友)였던 예장(艾暢)에게도 상간편을 보내겠다고 하였다<ref>임영길, 〈淸 문인 黃爵滋와 朝鮮 문인의 교유 - 『仙屛書屋初集年記』를 중심으로 -〉, 《한국한문학연구 제64집》 (한국한문학회, 2016) pp356</ref> === 관료 생활 === ==== 내직 근무 ==== [[1837년]](헌종 4년) [[3월 2일]] 귀국, 그 해 [[3월 17일]]에 [[한성]]에 도착해 다시 [[승문원]] [[이문]][[학관]]이 되고, 그해 [[6월 27일]] 6품으로 승진 영전한 안영(安泳)을 대신하여 [[승문원]] [[제술관]](製述官)에 임명되었다.<ref>승정원일기 2343책 (탈초본 117책) 1837년(헌종 3년, 도광 17년) 6월 27일 계유 17번째기사</ref> [[1839년]](헌종 5년) [[12월 22일]] [[평시서]]주부(平市署 主簿)가 되고<ref>승정원일기 2374책 (탈초본 118책) 1839년(헌종 5년, 도광 19년) 12월 22일 갑신 17번째기사, 李翊會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ref>, [[12월 23일]] [[승문원]]도제조의 건의로 제술관(製述官)으로 다녀온 것을 시상하여 승륙, 체임되었다.<ref>승정원일기 2374책 (탈초본 118책) 헌종 5년 12월 23일 을유 15번째기사 1839년 道光(淸/宣宗) 19년</ref> [[1840년]](헌종 7년) [[5월 1일]] [[선공감]]주부<ref>승정원일기 2379책 (탈초본 118책) 1840년(헌종 6년, 도광 20년) 5월 1일 경인 16번째기사, 吏批의 관원현황</ref>, [[1841년]](헌종 8) [[1월 5일]] 선주(繕主)로 [[종묘]] 사직사곡대제(社稷祈穀大祭)의 봉조관(捧俎官)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ref>掌禮院(朝鮮) 編, 제등록 (祭謄錄), (辛丑正月)初二日行, 4pp</ref> [[1841년]] [[1월 8일]] 서부령(西部令)에 임명되었다.<ref>승정원일기 2387책 (탈초본 118책) 1841년(헌종 7년, 도광 21년) 헌종 7년 1월 8일 갑오 12번째 기사, "吏批의 관원현황"</ref> [[2월 25일]] 헌관(獻官) 좌윤(左尹) 장교근(張敎根) 등이 [[성황묘]]에 고유하고 [[여제]](厲祭)를 할 때, 재랑(齋郞)으로 참여했다.<ref>掌禮院(朝鮮) 編, 《제등록 (祭謄錄)》, 今(壬寅)二月二十二日行</ref> [[1842년]](헌종 8) [[5월 28일]] [[이조판서]] [[김좌근]](金左根)이 복제(服制)로 불참하고 [[이조]][[참판]] [[홍재철]](洪在喆)이 참여한 [[이조]] 정사에서 고령현감(高靈縣監) 후보자의 물망에 올랐으나 3순위였다.<ref>홍재철, 《과환록 (科宦錄)》 (辛酉十二月)二十九日</ref> [[8월 15일]] 헌관(獻官) 행호군(行護軍) 김경선(金景善) 등이 주관하는 [[종묘]] [[망제]](宗廟望祭) 겸 추석제 겸 고유제(秋夕祭兼告由祭) 때, [[소령원]] 동제(昭寧園同祭)의 알자(謁者)로 참여했다.<ref>掌禮院(朝鮮) 編, 《제등록 (祭謄錄)》, 今(壬寅)八月十五日行</ref> ==== 지방관 근무 ==== [[1842년]](헌종 8) [[8월 29일]] [[하양군|하양현감]](河陽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ref>승정원일기 2405책 (탈초본 119책) 1842년(헌종 8년, 도광 22년) 헌종 8년 8월 29일 을사 22번째 기사, "吏批의 관원현황"</ref><ref>외안 (外案), 慶尙道 河陽</ref>, [[9월 21일]]에 하직인사를 하고 출발하였으나, 질병으로 [[10월 7일]]에 임지에 도임, [[경상감영]]에서 계를 올렸다.<ref>《각사등록(各司謄錄)》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 헌종(憲宗) 8년(1842년) 10월 초9일자</ref> 임지에 늦게 도착한 것이 문제시 되었으나 질병의 발병으로 부임이 늦어 면책되었다. 1843년 용궁현감으로 부임했다가 1844년 초 다시 하양현감에 재임명됐다. [[1844년]] [[6월 15일]], 경산현령 이휘재(李彙載) 등과 함게 그해 [[3월 7일]]에 있었던 김유선(金裕璿), 김기(金璣) 일당이 미신·풍수·도참설을 이용해 돈을 편취하다가 이를 은폐하고 공포감을 조성하려고 괘서를 붙인 사건의 참핵관(參覈官)의 한 사람으로 차출됐다.<ref>일성록 1844년 06월 15일(경술)자</ref> [[1846년]] 음력 윤5월 2일 [[영풍군 (경상북도)|영천]][[군수]](榮川郡守)로 임명되고<ref>승정원일기 2451책 (탈초본 120책) 헌종 12년 윤 5월 2일 병술 14번째 기사 1846년 도광 26년, "吏批의 관원현황"</ref><ref>외안 (外案), 慶尙道 榮川편</ref>, 바로 [[영풍군 (경상북도)|영천]](현, [[경상북도]] [[영주시]])으로 도임했다. [[1847년]](헌종 13) [[5월 18일]] 경상감사 김공현(金公鉉)의 건의로 다시 영천군수에 유임되었다. 같은 날 경상감사 김공현의 청으로 본도에 가뭄이 극심함을 들어 상경중이던 지방관 상주목사, 영천군수, 용궁, 비안현감 등 지방관을 도로 임지로 돌아가게 해줄것, 신임자의 빠른 부임 등을 상소하여 윤허받았다.<ref>승정원일기 2461책 (탈초본 120책) 1847년 헌종 13년, 청 도광 27년 5월 18일 병신 7번째 기사</ref> [[1849년]] [[3월 11일]] 경상좌병영에서 각 군현의 진(鎭)의 속오군(束伍軍) 및 주진(主鎭)의 군병 현황 취점, 점검할때 점검에서 통과하였다.<ref>《각사등록(各司謄錄)》, 경상좌병영계록(慶尙左兵營啓錄)○헌종(憲宗) / 헌종(憲宗) 15년(1849) 3월 11일자</ref> [[1850년]](철종 1) [[2월 20일]] [[경상좌병영]]의 도내 각 군현, 각 진(鎭)의 속오군(束伍軍) 및 주진(主鎭)의 군병들을 취점, 점검할 때 통과했다.<ref name="gaksa">《각사등록(各司謄錄)》, 경상좌병영계록(慶尙左兵營啓錄), ○철종(哲宗) 원년(1850) 3월 11일자</ref> 그의 임지도 역처(役處) 취점, [[공역 (동음이의)|공역]](公役), 군액(軍額) 결원 여부, 기계(器械) 완비, 각 진(鎭)의 영장(營將) 및 수령(守令) 점검받고 이상없이 통과하였다.<ref name="gaksa"/> [[9월 20일]] [[경상좌병영]]에서 도내(道內) 각 진(鎭)의 속오군(束伍軍) 및 주진(主鎭)의 군병들을 취점, 점검할 때 통과했다.<ref>《각사등록(各司謄錄)》, 경상좌병영계록(慶尙左兵營啓錄) ○철종(哲宗) / 철종(哲宗) 원년(1850) 10월 11일자</ref> 그해 [[12월]] 조병원(趙秉元)과 교체되어 한성부로 돌아왔다. [[1850년]](철종 1) 금부도사, 제감감찰(祭監監察)을 거쳐 그해 [[12월 26일]] 다시 금부도사가 되고<ref>승정원일기 2512책 (탈초본 122책) 1850년 道光(淸/宣宗) 30년 철종 1년 12월 26일 계미 17/25 기사, 吏批의 관원현황</ref>, [[1851년]] 행[[의금부]] 형방색[[도사]](刑房色都事)가 되었다. [[1851년]](철종 2) [[1월 15일]] [[어영청]]에서 지방 수령(守令)에 적합한 3인을 추천할 때 추천받았다.<ref>어영청등록 (御營廳謄錄) 철종 2년(1851, 신해) 1월 15일자</ref> ==== 의금부 형방도사 근무 ==== [[1851년]](철종 2) [[10월 6일]] [[형방]][[도사]]의 한 사람으로 동 권택하(權宅夏)와 어느 노파를 추국하는데 참여했다.<ref>일성록 39권, 1851년 10월06일 무자</ref> [[10월 7일]] 형방도사로 채희재(蔡喜載), 기덕우(奇德佑), 최치각(崔致珏)의 추국에 참여했다.<ref>일성록 39권, 1851년 10월07일 기축</ref> [[10월 20일]] 채희재(蔡喜載)와 고변인(告變人)고성욱(高成旭), 다른 혐의자 기덕우(奇德佑)을 대질심문할 때 형방도사의 한 사람으로 추국에 참여했다.<ref>일성록 40권, 1851년 10월20일 임인</ref> [[10월 20일]] 채희재, 기덕우, 최치각, 김응도(金應道) 등의 형문과 장형 3대를 받은 유희균(柳喜均)의 형문에 참여하였다.<ref>일성록 40권, 1851년 10월20일 임인</ref> [[10월 23일]] 형방도사의 한 사람으로 추국에 참여, 유염신(柳廉臣)의 추국, 채희재(蔡喜載)와 정치상(丁穉常)을 대면신문하고 채희재에게 장1대를 주고 정치상에게는 장5대를 친 후 기덕우,최치각, 김응도 등을 추국하고 각 장 3도(杖第三度)를 치고 형문을 마쳤다.<ref>일성록 40권, 1851년 10월23일 을사</ref> [[10월 24일]] 정치상에게 형문을 가한 후 장 제5도(杖第五度)를 주고 채희재를 형문 후 1차로 장 제3도(杖第三度)를 주고, 기덕우(奇德佑)를 형문한 후 1차로 장 제7도(杖第七度)를 주고, 최치각을 형문 후 1차로 장 제5도(杖第五度)를 주고 김응도를 추국 후 1차로 장 제7도(第杖七度), 정득현(鄭得顯)을 형문 후 1차로 장 제9도(杖第九度)를 집행하였다.<ref>일성록 40권, 1851년 10월24일 병오</ref> [[11월 4일]] 의금부에서 유기균(柳基均), 유희균(柳喜均), 최치각(崔致珏) 관련 형문을 가할 때 형방도사(刑房都事)의 한 사람으로 추국에 참여했다.<ref>일성록 철종02 (1851) 년 11월 4일 ( 을묘 )자</ref> [[11월 5일]] 최치각, 유기균, 정득현(鄭得顯), 유희균 관련자 형문을 가할 때 형방도사(刑房都事)의 한 사람으로 추국에 참여했다.<ref>일성록 철종02 (1851) 년 11월 5일 ( 병진 )자</ref> [[11월 6일]] 최치각, 정득현 관련자를 신문할 때 별형방도사(別刑房都事)의 한 사람으로 추국에 참여했다.<ref>일성록 철종02 (1851) 년 11월 6일 ( 정사 )</ref> [[11월 7일]] 최치각(崔致珏)의 추국에 별형방도사의 한 사람으로 추국에 참여했다.<ref>일성록 철종02 (1851) 년 11월 7일 ( 무오 )</ref> [[11월 8일]] 최치각(崔致珏) 관련 추국을 시행할 때 형방도사로 추국에 참여하였다.<ref>일성록 철종 2년(1851) 11월 8일(기미)자</ref> [[1852년]] [[2월 7일]] [[어영청]]에서 수령 별천(守令別薦) 3인을 추천할 때 한 사람으로 추천되었다.<ref>어영청등록 (御營廳謄錄) 철종 3년(1852, 임자) 2월 7일자</ref> [[1852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의금부]][[도사]](行義禁府都事), 서부령(西部令)을 역임했다. [[1852년]](철종 3년) [[10월 2일]] [[조선 철종|철종]]이 [[종묘]] 동향대제전(宗廟 冬享大祭)에 친히 임할 때 제감감찰로 제전에 참여했다.<ref>승정원일기 2535책 (탈초본 123책) 철종 3년 10월 2일 기묘 14/15 기사, 1852년 咸豊(淸/文宗) 2년</ref> [[1853년]] [[1월 8일]] 친제에 참석한 [[아헌관]] 이하 관원을 포상할 때 아마 1필(兒馬一匹)을 사급(賜給)받았다.<ref>승정원일기 2538책 (탈초본 123책) 철종 4년 1월 8일 계축 20/29 기사, 1853년 咸豊(淸/文宗) 3년</ref><ref>일성록 철종 4년(1853) 1월 8일 ( 계축 )자</ref> [[1852년]](철종 3년) [[10월 22일]] [[비변사]]에서 수령 별천 별단(守令別薦別單)을 천거할 때, 동지중추부사 이경순(李景純)으로부터 지방관에 적합한 인물로 천거받았다.<ref>국역 비변사등록 철종 3년 1852년 10월 22일자(음), "守令別薦單子을 써서 들인다는 備邊司의 啓와 그 別單"</ref> [[1855년]](철종 6년) [[4월 11일]] [[순강원]] [[작헌례]](順康園酌獻禮)에 제감감찰로 참여하였다.<ref>승정원일기 2538책 (탈초본 123책) 철종 4년 1월 8일 계축 20/29 기사 1853년 咸豊(淸/文宗) 3년</ref><ref>일성록 철종06 (1855) 년 4월 11일 ( 계묘 )자</ref> [[1855년]](철종 6년) 제감감찰을 거쳐 [[형조]][[좌랑]], [[1857년]](철종 8) [[사헌부]]감찰을 역임했다. [[1857년]] [[2월 21일]] [[철종]]의 [[영희전]][[작헌례]](永禧殿酌獻禮) 친행에 제감감찰로 참여했다.<ref>승정원일기 2588책 (탈초본 124책) 철종 8년 2월 21일 계묘 18번째 기사 1857년 咸豊(淸/文宗) 7년</ref> 그해 [[12월 14일]] [[이조 (육조)|이조]](吏曹)의 구전정사에서 서부령(西部令) 주진옥(朱鎭珏)과 보직상환(相換)령을 받고 다시 서부령이 되었다.<ref>승정원일기 2598책 (탈초본 124책) 철종 8년 12월 14일 신유 8/17 기사, 1857년 咸豊(淸/文宗) 7년</ref> [[1858년]] [[1월 5일]] 행[[돈령부]][[판관]](行敦寧府判官)이 되었다.<ref>승정원일기 2599책 (탈초본 124책) 철종 9년 1월 5일 임오 20/55 기사, 1858년 咸豊(淸/文宗) 8년</ref> === 생애 후반 === [[1859년]](철종 10) [[9월 15일]]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다시 [[돈녕부]][[판관]]이 되고, [[9월 16일]] [[이조 (육조)|이조]]의 구전정사로 [[사재감]]주부 김현익(金顯翼)와 다시 직을 바꿔 다시 사재감주부가 되었다.<ref>승정원일기 2619책 (탈초본 125책) 철종 10년 9월 16일 임오 18번째 기사, 1859년 咸豊(淸/文宗) 9년</ref> [[1860년]] 음력 윤 3월 11일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 그해 [[8월 19일]] [[고양군|고양]][[군수]](高陽郡守<ref>일성록 철종 11(1860) 년 8월 19일(경진)자</ref>) 겸 [[양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楊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로 나갔고, [[1861년]](철종 12) [[5월 16일]] 지평현감 김홍남(金鴻男)과 상환 보직변경되어<ref>일성록 철종 12(1861)년 5월 16일(계묘)자</ref> [[지평]][[현감]](砥平縣監) 겸 [[광주부|광주]][[진관]]병마절제도위(廣州鎭管兵馬節制都尉)로 부임하였다. [[6월 13일]]의 [[지방관]] 근무포폄에서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일천(日淺)이라 하여 보류판정을 받았다.<ref>洪在喆, 과환록 (科宦錄), 辛酉 六月十三日</ref> [[1861년]](철종 12) [[7월 21일]] 정언 이만기(李晩耆)의 상소 내용을 규탄하는 임백연(任百淵), 이만용(李晩用), [[장악원]]정 이한영(李漢永) 등의 연명상소에 공동 서명하였다.<ref>승정원일기 2642책 (탈초본 126책) 철종 12년 7월 21일 정미 29번째 기사, 1861년 咸豊(淸/文宗) 11년</ref> [[12월 29일]] 지방관 근무포폄에서 合試大處惜其老矣를 이유로 근무고과 상(上)을 받았다.<ref>洪在喆, 과환록 (科宦錄), 辛酉 十二月二十九日</ref> [[1862년]] [[6월 13일]]의 경기도 도사(都事) 이규하(李奎夏)의 지방관 포폄에서 公納無愆一可反三을 이유로 근무고과 상(上)을 받았다.<ref>洪在喆, 과환록 (科宦錄), 壬戌 六月十三日</ref> [[1862년]] [[12월 20일]] 지평현감에서 면직되었다. [[1864년]](고종 1) [[2월]] [[고양군|고양]][[군수]] 겸 [[양주]][[진관]]으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6월 4일]] 사직하였다. 그가 주로 교류하던 인물로는 [[183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절 때 수행한 [[신재식]](申在植)과 직재 김익동(直齋 金翊東), 우산(愚山) 또는 산가(山佳) 최헌수(崔憲秀), [[현풍]][[현감]], [[풍기]][[군수]] 등을 지낸 [[소북]]계열인 [[남상교]](南尙敎), 무관 출신으로 [[한문]]과 [[백화문]]에 두루 능통했던 권시형(權時亨) 등이 있다. 이 중 [[신재식]]은 그의 아버지 [[이현상 (1770년)|이현상]]과도 교류가 있었는데, [[신재]]식은 [[1804년]](순조 4)에 그의 아버지 [[이현상 (1770년)|이현상]]이 편찬한 《[[역대언사]]》의 발문을 써주기도 했다. 그밖에도 [[청나라]]에 두 번째로 다녀올 때 만난 중국인 [[황작자]](黃爵滋), [[예인원]](倪印垣) 등과도 편지서신을 주고받으며 시문과 간찰, [[성리학]] 등에 관련된 주제를 주고받았다. [[황작자]]와 주고받은 서신 중, 조선의 역사를 설명한 한 소책자에서 그는 [[조선]]의 역사는 [[단군 왕검]]에서 시작된다 하였고 [[성리학]]의 법통은 퇴계 [[이황]]의 뒤를 율곡 [[이이]]가 정통을 계승하였다고 보았다. 그밖에 그는 조선과 [[청나라]]의 지인들로부터 받은 시문 모음집 《연대묵연 (燕臺墨緣)》 을 선물로 받았다. 저서로는 《분서집 (汾西集)》과 미간행 유고 《[[분서고]] (汾西稿)》 등이 있다. 분서고는 자신이 부임한 부임지의 선생안, 명사들과의 교류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1871년]](고종 8) [[5월 5일]]에 [[경기도]] [[광주군 (경기도)|광주군]] [[언주면]] [[내곡동]](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서 사망했다. === 사후 ===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경기도)|광주군]] [[언주면]] [[내곡동]](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북쪽 산 자좌(子坐), [[헌인릉]] 인근에 부인 광주이씨와 합장되었다. 그의 묘소 인근에는 동생 이인령 내외의 묘가 있고, 그 근처에 인령의 며느리 순천이씨 등의 묘소가 있다. [[대한제국]] 때 평리원 검사, 판사를 역임한 [[이휘선]]은 그의 여섯째 아들 [[이재명 (1830년)|이재명]]의 아들이고, [[인천부]]주사, [[인천감리서]] 주사, [[안산군]] 군주사를 지내고 [[시흥]]에 사립 초등학교 초지초등학교를 세운 [[이민선 (대한제국 관리)|이민선]]도 봉녕의 손자였다. [[1881년]](고종 18년) [[8월]] ~ [[9월]] [[한성]]에서 발생한 [[안기영의 옥사]] 때, 그의 생전 그의 집에 문객으로 있던 [[강화군|강화]](江華) 사람 이철구(李哲九)의 이름이 [[의금부]] 채동술(蔡東述)의 공초에 언급되었다.<ref>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고종 18년(1881년, 淸 德宗 光緖 7年, 日本 明治 14年) 8월 30일자, "의금부, 채동술의 제1차 심문 결과를 보고함"</ref> 그러나 당시 그는 이미 사망자였고 별 혐의점이 없어 그에게는 영향이 가지 않았다. [[1907년]](광무 10) [[7월 8일]] 손자 [[이휘선]](李徽善)이 [[가선대부]] 행[[평리원]][[검사]]에 올랐으므로, 의법전(依法典)에 따라 [[증직|증]] 정3품 [[통정대부]] [[규장각]][[부제학]](贈 正三品 通政大夫 奎章閣副提學)에 [[추증]]되었다.<ref>대한제국 관보 제4123호 隆熙二年七月十一日 土曜, "敍任及辭令"</ref> 규장각부제학 추증 기사는 [[승정원일기]], [[대한제국 관보]] 제4123호에 등장한다. == 저서 == * 《[[분서집]] (汾西集)》 * 《[[분서고]] (汾西稿)》 2권, 미간행 유고 == 가족 관계 == 부인 광주이씨는 아들 [[이재명 (1830년)|이재명]]의 문과방목편에 의하면 장사랑 이세복(李世福)의 딸이라는 설이 있고, 일설에는 둔촌 [[이집 (1327년)|이집]]의 후손 통덕랑 이시복(李時福)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 할아버지 이한운(李漢雲, [[1735년]] [[6월 22일]] ~ [[1806년]] [[6월 8일]]) * 할머니 밀양 박씨([[1735년]] [[6월 12일]] ~ [[1813년]] [[11월 27일]]), 동지중추부사 박성희(朴聖希)의 딸 * 아버지 : [[이현상 (1770년)|이현상]](李顯相, [[1770년]] [[6월 14일]] - [[1822년]] [[7월 14일]]) * 어머니 풍양 조씨([[1767년]] [[4월 1일]] ~ [[1822년]] [[6월 24일]]), 승사랑 조기영(趙基永)의 딸 ** 형 이학령(李鶴寧) ** 형 [[이기령 (1786년)|이기령]](李麒寧, [[1786년]] [[9월 6일]] ~ [[1876년]] [[2월 13일]]) ** 동생 [[이인령]](李麟寧, [[1800년]] [[8월 28일]] ~ [[1883년]] [[11월 5일]]), 다른 이름은 일녕(馹寧) ** 누이 : 우계이씨 ** 매부 : 한석동(韓奭東, 청주한씨) ** 누이 : 우계이씨 ** 매부 : 한용관(韓容觀, 청주한씨) * 부인 : 광주이씨([[1791년]] [[1월 4일]] ~ [[1860년]] [[1월 14일]]), 장사랑 이세복(李世福)의 딸, 외조부는 한양인 조선(趙鐥) ** 아들 : 이재승(李在升, 1809년 10월 13일 ~ 1853년 4월 16일), 초명은 계증(棨增) ** 며느리 : 연안이씨(1808년 10월 1일 ~ 1829년 4월 23일), 이정계(李鼎季)의 딸 ** 며느리 : 전주이씨(1810년 8월 23일 ~ 1879년 윤 3월 24일), [[임영대군]] 예천부수 이언형(醴川副守 李彦亨) 8대손 이진방(李鎭邦)의 딸 *** 양 손자 : 이교선(李敎善) ** 아들 : 이재응(李在應, [[1812년]] [[12월 10일]] ~ [[1878년]] [[3월 28일]]), 초명은 참증(參增) *** 손자 : [[이민선 (대한제국 관리)|이민선]](李敏善, [[1857년]] [[10월 20일]] ~ [[1938년]] [[7월 24일]]) ** 아들 : 이재긍(李在兢, [[1818년]] [[11월 2일]] ~ [[1876년]] 윤 5월 11일), 초명은 후증(後增) ** 며느리 : 전주이씨(全州李氏, ? ~ [[1850년]] [[3월 16일]]), [[효령대군]]후 [[강성정]] 이견손(江城正 李堅孫) 9대손 인의(引儀) 이용구(李龍九)의 딸, 외조부는 동래정씨 [[성균관]]전적 정완(鄭浣) ** 며느리 : 진주류씨(晋州柳氏, [[1832년]] [[10월 9일]] ~ [[1871년]] [[9월 19일]]), 류성은(柳聖殷)의 딸, 이재긍의 후처 ** 아들 : 이재성(李在星, 1823년 11월 9일 ~ 1867년 6월 9일) ** 며느리 : 해주오씨(1819년 9월 7일 ~ 1879년 8월 24일), 진사 오언용(吳彦鏞)의 딸, 조부 좌랑 명철(命哲), 추탄(楸灘) [[오윤겸]]의 후손, 외조부 무안박씨 박겸빈(朴謙彬) *** 손자 : 이돈선(李敦善, 1854년 3월 7일 ~ 1876년 5월 20일) *** 손부 : 진주류씨(晉州柳氏, [[1852년]] [[1월 14일]] ~ ?), 부 선전관 기선(冀善), 야당 [[류혁연]] 후 *** 손자 : [[이민선 (대한제국 관리)|이민선]](李敏善), 숙부 이재응의 양자로 출계 ** 아들 : 이재흥(李在興) ** 아들 : [[이재명 (1830년)|이재명]](李在明, 1830년 11월 20일 ~ 1891년 5월 14일) ** 며느리 : 동래정씨([[1829년]] [[12월 5일]] ~ [[1901년]] [[10월 12일]]), 장사랑 정기홍(鄭基弘)의 딸, [[정태화]]의 장남 정재대 7대손 *** 손녀사위 : 이규재, 연안인 *** 손자 : [[이휘선]]([[1865년]] [[7월 4일]] ~ ?) * 처부 : 이세복(李世福, 광주인), 부는 택(澤), 조부는 지건(志健) * 장모 : 한양조씨, 조선(趙鐥)의 딸 == 기타 == 그의 친구 중 [[최헌수]], [[남상교]]의 시집에는 그와 주고 받은 시문이 실려 있다. 황파 정환균, 분서 이봉녕 등은 최헌수의 절친한 벗이자 우산고 시집에도 자주 거명되고 있다.<ref>서울대학교 奎章閣, 《奎章閣韓國本圖書觧題 續集: 集部2》 (서울대학교 奎章閣, 2002) 371페이지</ref> [[남상교]]의 저서 우촌시고를 통해 확인되는 남상교의 교유자로는 소교 심능숙(小楠 沈能淑), 동천 [[조병황]](洞天 趙秉璜), 미산 권영좌,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추재 조수삼(秋齋 趙秀三), 동번 이만용(東樊 李晚用), 분서 이봉녕, 黃坡 鄭煥杓, 강산 이경재(絳山 李經在), 석애 [[조인영]](石厓 趙寅永) 등이 있다. [[남상교]]는 천주교 신자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집이 간행되지 못하였고 다만 필사본 몇 종이 남아 있을 뿐이다.<ref>서울대학교 奎章閣, 《奎章閣韓國本圖書觧題 續集: 集部2》 (서울대학교 奎章閣, 2002) 378페이지</ref> 그의 형 [[이기녕 (1786년)|이기녕]]의 사위 남준희(南俊熙)는 [[남상교]]의 일족이었다. == 같이 보기 == {{Col-begin}} {{Col-2}} * [[동지사]] * [[제술관]] * [[통역]] * [[이현상 (1770년)|이현상]] * [[남상교]] * [[홍양후]] * [[이인령 (1800년)|이인령]] * [[:zh:黄爵滋]] (중국어판) {{Col-2}} * [[신재식]] * [[김이교]] * [[임백연]] * [[신태희]] * [[한필교]] * [[:zh:李璋煜]] (중국어판) * [[이민선 (대한제국 관리)|이민선]] {{Col-end}} == 외부 링크 ==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gov/govView.aks?govId=GOV_JBK_6JOc_MN_1KK_12KOYG_000321&curSetPos=2&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B 이봉녕]{{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gov/govView.aks?govId=GOV_JBK_6JOc_MN_1KK_12KOYG_000321&curSetPos=2&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B }}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19_029484&isEQ=true&kristalSearchArea=B 이봉녕]{{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19_029484&isEQ=true&kristalSearchArea=B }} *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 상간편 (相看編)],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관련 서적 == * 임영길,〈청(淸) 문인 황작자(黃爵滋)와 조선(朝鮮) 문인의 교유:선병서옥초집연기(仙屛書屋初集年記)를 중심으로〉,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64권 (2016년 12월호)》(한국한문학회, 2016) pp.333-369 * 신로사, 〈湛軒의 손자, 洪良厚의 生涯와 그의 燕行에 관한 고찰〉,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大東文化硏究 제81집》(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3) pp.261-293 *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문화 지형도》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6) * 신희철, 《외안고》 (보경문화사, 2002) * 정후수, 《추사 김정희 논고》 (한성대학교출판부, 2008) 74~75페이지 * 신태희, 《국역 북경록》 (박은정, 이홍식 번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8) * 김한중, 《慶山誌》 (고향문화사, 1989) 109페이지 == 참고 자료 == * 승정원일기 * 일성록 * 각사등록(各司謄錄) * 상간편(相看編), 申在植 * 우촌시고(雨村詩稿) *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 * 경상좌병영계록(慶尙左兵營啓錄) * 성호보휘(姓號譜彙) * 직재집(直齋集), 김익동(金翊東) * 성호보휘(姓號譜彙) * 경오유연일록(鏡浯遊燕日錄) 중 鏡浯行卷 坤, 임백연(任百淵) * 팔도총록(八道總錄) * 북경록(北京錄), 신태희(申泰羲) * 삼산집(三山集), 신희철(申羲澈) * 수사록(隨槎錄) 권5 / 반형총화 상(班荊叢話上), 한필교(韓弼敎) * 북경록(北京錄) / 신태희(申泰羲) * 推案及鞫案 * 各司謄錄 11, 慶尙道篇 / 慶尙監營啓錄 7 * 各司謄錄 11, 慶尙道篇 / 嶺左兵營啓錄 1 == 각주 == {{각주}}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1793년 출생]] [[분류:1871년 사망]] [[분류:조선의 문신]] [[분류:조선의 시인]] [[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조선의 외교관]] [[분류:조선의 역사가]] [[분류:조선의 작가]] [[분류:통역사]] [[분류:음서]] [[분류:역사 평론가]] [[분류:번역가]] [[분류:우계 이씨]] [[분류:포천시 출신]] [[분류:서예가]] [[분류:18세기 한국 사람]] [[분류:19세기 한국 사람]]
이봉녕 (17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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