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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 인물 정보 틀을 사용하는 게 맞을 듯 --> {{공직자 정보 |이름= 이수광 |원어명 = 李睟光 |정당 = [[남인]] |출생일= {{출생일|1563|3|24}}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1629|1|19|1563|3|14}} |학력 = |국가 = 조선국 |직책 = 이조좌랑 |임기 = 1585년 ~ 1588년 |종교 = [[유교]]([[성리학]], [[실학]]) |직책2 = 성균관 전적 |임기2 = 1588년 ~ 1589년 |임기3 = 1605년 ~ 1606년 |직책3 = [[함경남도|함경도]] [[안변군|안변부사]] |군주 = [[선조 (조선)|선조 이연]] |군주2 = [[선조 (조선)|선조 이연]] |군주3 = [[선조 (조선)|선조 이연]] |부모 = 이희검, 문화 류씨 |배우자 = 안동김씨 |자녀 = 이민구 |친인척= |서명= |웹사이트= }} '''이수광'''(李睟光, [[1563년]] [[3월 14일]]([[음력 2월 20일]]) ~ [[1629년]] [[1월 19일]](음력 [[1628년]] [[12월 2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실학자]], 외교관, [[저술가]]이다. 왕실 종친의 후손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동원(東園),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f name="역대">{{웹 인용 |url=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4982&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2005F00410031003500360033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800330031&pName=C774C218AD110028674E775F51490029 |제목=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확인날짜=2008-11-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25131933/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4982&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2005F00410031003500360033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800330031&pName=C774C218AD110028674E775F51490029 |보존날짜=2015-09-25 |url-status=dead }}</ref> [[선조 (조선)|선조]], [[광해군]], [[조선 인조|인조]] 세 임금 밑에서 병조좌랑, 안변부사, 순천부사,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공조참판, 이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고, 사신으로 세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관리로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모두 치렀다. 조선 후기 [[실학]]을 등장을 이끈 실학의 선구자이며, [[남인]] 실학 세력의 토대가 된 인물이다. <!-- 이 문단은 도입부에 들어가기에 내용이 많고, 뒤의 내용과 중복되므로 줄여서 정리하는 게 좋을 듯 --> 이수광은 뛰어난 외교력과 문장 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명나라 파견되었으며, 49세 때인 1611년에도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의 선진국 중국에서 그 문화를 보고 배우는 한편, 세 차례의 사행 기간 중에 안남(安南, 베트남)·유구(琉球, 류큐)·섬라(暹羅, 시암)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수광에 대한 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남·유구·섬라의 사신들이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그 시를 자기 나라에 유포시키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수광이 당대에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f>신병주,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2006) 119쪽 {{ISBN|895862096X}}</ref>[[실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증흥을 위한 사회,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ref>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03쪽 {{ISBN|9788991221284}} <!--“…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중흥을 위한 사회,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ref>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아들인 [[이민구 (1589년)|이민구]](李敏求)의 문하생은 [[남인]]의 거두이자 [[청남]]의 영수였던 백호 [[윤휴]]였다. == 생애 == === 생애 초반 === 이수광은 [[경기도]] [[장단군]] 관아에서 [[병조판서]]를 지내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이희검]](李希儉)과 문화유씨(文化柳氏)의 1남 4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 (조선)|태종]] 이방원의 서자로 [[효빈 김씨|효빈김씨]](孝嬪金氏) 소생 [[경녕군|경녕군 이비]]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모양군 직이고, 증조부는 선사정(仙槎正)으로 선사군에 추봉된 이승손(李承孫)이며 증조부 선사정은 할아버지 하동부령 증 하동군 이유와 양 할아버지 신당부령 증 신당군 이정 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신당군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하동군의 아들들 중 한사람인 [[이희검]]이 신당군의 양자가 되었다. 왕족의 후손으로 아버지 [[이희검]](李希儉)은 [[조선 중종|중종]] 때의 청백리 정승 [[류관 (여말선초)|류관]](柳寬)의 외증손이기도 했다. 류관은 정승의 신분임에도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고사가 전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이희검]]은 [[명종 (조선)|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청백리로도 녹선되었으며 두번 추증되어 영의정에 추증됐다. 어려서 [[한성부]] [[동대문]] 근처에 살았고 17세에 아버지 [[이희검]]을 여의었다. 그는 붕당에 거리를 두고 당색에는 초연하였으나 후일 그의 제자들과 그의 아들 [[이민구 (1589년)|이민구]]의 제자들은 대체로 [[남인]]과 [[북인]]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안동김씨 김대섭의 딸과 혼인했는데, 처제의 남편은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이었다. 허균은 당색으로 북인 당원이었고 그는 남인 당원이었다. === 과거 급제와 임진왜란 === {{참고|임진왜란}} 1585년([[선조 (조선)|선조]] 18년) [[과거 시험|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성균관]][[전적]]을 거쳐 [[호조]][[좌랑]] 겸 [[지제교]](知製敎), [[병조]][[좌랑]] 겸 [[지제교]]를 지냈다. 그 뒤 승문원의 관리가 되었고, 1590년(선조 23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ref name="글로벌 이수광"/> 그해 [[평난공신|평난]][[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1591년]] [[음력 6월 23일]] 수찬에 임명되었다.<ref>[[#선조실록 1616|선조실록 1616]]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406023_003 25권, 선조 24년 6월 23일 병진 3번째기사]</ref>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용인시|용인]]에서 패하였다.<ref name="글로벌 이수광" /> 그 뒤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이때 [[밀양]][[부사]] [[박진 (조선)|박진]](朴晉)이 [[일본군]]의 침략을 보고 [[밀양성]]을 불지르고 후퇴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그를 비판하였다. {{인용문2|[[박진 (조선)|박진]](朴晉)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며 비판하였다.<ref>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ref>}} 그 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여러 번 교전하였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해 [[의주]]로 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이반한 민심을 수습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의주]]에 파천한 조정을 따라 활동하며 1593년 [[홍문관]]교리, [[사헌부]]지평 등 삼사의 언관직을 거쳐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 [[병조]][[참지]] 등을 역임했다. === 관료 생활과 외교, 저술 활동 === 1597년(선조 30년)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그해 [[정유재란]]의 종결을 보았다. 1597년(선조 30년) 진위사(陳慰使)<ref>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보낸 사신. {{출처|날짜=2011-10-12|어떤 자료}}에는 1597년의 북경행이 "주청사(奏請使)" 자격이었다고 보고 있다.</ref> 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베트남]]의 [[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馮克寬, [[:vi:Phùng Khắc Khoan|Phùng Khắc Khoan]])과 만났고,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 동안 함께 머물렀다. 두 사람은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 조완벽의 일대기를 기록했다.<ref>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10쪽 {{ISBN|9788991221284}} <!--“1597년 진위사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안남(지금의 베트남)에서 온 풍극관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고국에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조선 학자의 지성에 깊이 감명받았기 때문이리라.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조완벽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일본 상인에 팔려 안남을 세 번이나 다녀온 사람이다. 안남에서 조완벽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수광과 같은 조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안남에서는 조완벽을 초대하여 이수광의 시를 보여주고 이수광에 대해 질문했다고 한다. 조선에 돌아온 조완벽은 이 사실을 알렸고 나중에는 이수광에게까지 그 소문이 전해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을 밝혔다.”--></ref> 1605년 외직인 [[안변]][[부사]]로 부임했다가 1606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07년 다시 홍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선조]]의 사후 1609년(광해군 1)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되돌아왔고,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도승지]]<ref>승정원 승지들의 우두머리로 국왕의 비서실장격</ref>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승지]]로 발탁된 뒤, [[대사헌]], [[예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고 [[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0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그해 12월 [[예조]][[참판]]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 [[5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주청사(奏請使)로 [[베이징|연경]]에 왕래하였으며,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사제|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 및 유변(劉汴)의《속이담(續耳譚)》 6권을 {{언제|날짜=2011-10-12|얻어 가지고 돌아와}} 한국 최초로 서양 학문을 도입하였다.<ref>[[이은직]] 저, 정홍준 역, 《조선명인전 3》 일빛 (2005) 407쪽{{ISBN|8956450889}}</ref> (→[[조선의 대외 관계]]) 귀국 후에는 대사간·대사헌 등의 언관직(言官職)과 지방 행정직을 맡았다.<ref name="글로벌 이수광"/> === 생애 후반 === {{참고|인조 반정}} 1613년 [[계축옥사]]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지식을 소개한《[[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ref name="송건호"/>{{Rp|306}} (→[[조선의 대외 관계]])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16년 [[순천부|순천]][[부사]]에 임명되어 발령되었는데, 1618년에는 인목대비가 폐비되어 서궁에 유폐되기까지 하자, 지방관 임기 3년을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듬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 인조|인조]]를 [[공주시|공주]]로 모셨다. 이괄의 난 당시 어가를 호종한 공로로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관계로 [[인조 반정]] 이후에도 [[서인]]계열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1625년(인조 3년)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1625년에는 만언차자(萬言箚子)를 왕에게 올려 시정(時政)을 비판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보인다.<ref name="글로벌 이수광"/> 그해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모셨다. 1628년 의주부윤으로 발령되었다가 얼마 뒤 [[홍문관]][[대제학]]으로 전임되었다. 다양한 저서를 남겼던 그는 시문(詩文) 32권, 《채신잡록(采薪雜錄)》ㆍ《독서록해(讀書錄解)》ㆍ《경어잡편(警語雜編)》 각 1권, 《병촉잡기(秉燭雜記)》ㆍ《잉설여편(剩說餘編)》ㆍ《승평지(昇平志)》 각 2권, 《찬록군서(纂錄群書)》 5부(部) 25권, 《지봉유설(芝峯類說)》 25권을 저술로 남겼다. 만년에 [[중풍]]으로 병석에 누웠다.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628년(인조 6년) 12월 이조판서로 재직 중 병사했다.<ref name="글로벌 이수광"/> 최종 품계는 정헌대부였다. 그가 죽자 인조는 이틀간 조회를 중단하였다. === 사후 === 아들 [[이성구 (1584년)|이성구]]는 후에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한다. 그의 사상은 [[성리학]]자 겸 [[실학]]자였던 또다른 아들 [[이민구 (1589년)|이민구]]와 [[허목]]을 통해 [[윤휴]], [[유형원]](柳馨遠), [[이서우]], [[이익 (1681년)|이익]](李瀷), [[채제공]], [[정약용]](丁若鏞) 등에게로 이어졌고 [[남인]] [[실학]]자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수원 청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죽은 후 두 아들이 [[원종공신]]에 녹훈된 연고로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채신잡록》·《병촉잡기》·《찬록군서》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f name="역대" /> 그의 묘소 《[[이수광선생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90-1번지, 선영 근처 [[노고산]] 아래, 길 옆에 위치하고 있다. 1978년 10월 1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묘소 바로 아래 오른쪽에는 아버지 이희검의 묘, 그 아래에는 아들 이성구의 묘소가 있다. == 저서 == 그의 저서 중 [[지봉유설]]은 사물의 이치를 설명한 일종의 백과사전 형태의 저작이다. * 《[[지봉유설]]》(芝峰類說) : 백과서적 * 《지봉집》(芝峰集) * 《채신잡록》(採薪雜錄) * 《병촉잡기》(秉燭雜記) * 《찬록군서》(纂錄群書) * 《해경어잡편》(解警語雜篇) * 《잉설여편》(剩說餘篇) * 《승평지》(昇平志) == 관련 유적 == * 비우당(庇雨堂), 부친 이희검이 살던 집이며 그가 저서를 저술한 곳, [[서울]] [[종로구]] 창신3동 원각사 근처 소재. 본래는 이희검의 부인 문화류씨의 고조부 [[류관]]이 살던 집이었다. == 가족 관계<ref>[https://royal.aks.ac.kr/Ge/JokboPageData?bookId=JSK_WJ_K21047&pid=2779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ref>== * 친조부 : 하동군(河東君) 이유(李裕) * 친조모 : 류곤원(柳坤元)의 딸 [[진주 류씨]] * 양조부 : 신당군(神堂君) 이정(李禎) * 양조모 : 강황(姜璜)의 딸 [[진주 강씨]] ** '''부친''' : 이희검(李希儉, 1516 - 1579) ** 모 : 강호덕(姜好德)의 딸 [[진주 강씨]] *** 이복 형 : 이겸광(李謙光, 1539 ~ ?) ** '''친모''' : 류오(柳塢)의 딸 [[문화 류씨]] *** 누나 : 이숙례(李淑禮, 1554 ~ ?) *** 누나 : 이숙란(李淑蘭, 1558 ~ ?) *** 누나 : 이숙희(李淑姬, 1560 ~ ?) ** '''배우자''' : 김대섭(金大渉)의 딸 [[안동 김씨]] *** '''장남''' : [[이성구 (1584년)|이성구]](李聖求, 1584 ~ 1644) *** 자부 : 윤열(尹說)의 딸 [[파평 윤씨]] (본처) *** 자부 : 권흔(權昕)의 딸 [[안동 권씨]] (후처) **** 손녀 : [[연안 이씨]] 이일상(李一相)의 처(1612 ~ ?) **** 손자 : 이상규(李尙揆, 1619 ~ ?) **** 손녀 : [[청주 한씨]] 한오상(韓五相)의 처(1620 ~ ?) **** 손자 : 이동규(李同揆, 1623 ~ ?) **** 손자 : 이당규(李堂揆, 1625 ~ 1684) **** 손자 : 이석규(李碩揆, 1627 ~ 1666) **** 손자 : 이태규(李台揆, 1631 ~ 1686) *** 자부(측실) : 이름 미상 **** 서손녀 : 윤두종(尹斗宗)의 처(1642 ~ ?) *** 자부(측실) : 정협(鄭協)의 서녀 [[동래 정씨]] **** 서손자 : 이선규(李善揆, 1644 ~ ?) *** '''차남''' : 이민구(李敏求, 1589 ~ 1670) *** 자부 : [[윤휘]](尹暉)의 딸 [[해평 윤씨]] **** 손자 : 이원규(李元揆, 1608 ~ ?) **** 손자 : 이중규(李重揆, 1614 ~ ?) *** 자부(측실) : 이름 미상 **** 서손녀 : [[평산 신씨]] 신변(申昪)의 처(1611 ~ ?) *** 자부(측실) : 영정(永貞) **** 서손자 : 이억규(李億揆, 1641 ~ ?) **** 서손자 : 이말규(李末揆, 1653 ~ ?) == 이수광의 사상과 철학 == 본래 총민강기(聰敏强記)하여 기억력이 뛰어났던 이수광은 그 때 중국에 들어가서 주자학이 아닌 새로운 학문 체계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고,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를 처음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ref>이준구, 강호성 공저, 《조선의 선비》 스타북스(2006) 203쪽 {{ISBN|899243300X}}</ref> 이수광의 철학적 특성은 [[성리학|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로 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에로 지향하고 있어서,<ref name="역대" />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ref>{{뉴스 인용 |제목 =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 |url =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2100119 |출판사 = 동아일보 |날짜 = 2007-02-10 |확인날짜 = 2008-11-13 }}</ref> 또한 [[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이 제 소임을 못하고 권신, 재상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질타, 탐관오리를 탄핵해야 한다고 말하며 [[사헌부]], [[사간원]] 관리들은 남달리 청빈해야 하며, 검소한 몸가짐을 가질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 == 평가 == 당대에 단아하고 염정하며, 또 문학에 재주가 있었다<ref>광해군일기 36권, 광해군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12월 22일(계사) 11번째기사 "이수광·장만·유공량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는 평가가 있다. [[실학]]의 길을 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 내에서 [[베트남]]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베트남에 관한 글을 쓴 이수광과 베트남에 다녀온 [[조완벽]]은 조선 사회에 베트남이라는 국가의 존재와 풍습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 기타 == 그의 상소문 중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올린 12조목의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 상소는 당시 상소문 중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중국어]]와 [[만주어]]에 능했고 [[한학]]과 고전 지식도 밝았다. 또한 [[일본어]]와 [[베트남어]] 역시 구사하고 통역, 번역할 수 있었다. 동작구 사당4동 산44-7번지 산에 있는 이수광의 묘는 그와 동명이인의 묘이다. 동작동에 묻힌 이수광은 정종의 아들 덕천군 후생의 후손이다. == 같이 보기 == * [[지봉유설]] * [[실학]] * [[이민구 (1589년)|이민구]] * [[윤휴]] * [[이원익]] * [[허목]] * [[유형원]] * [[이서우 (1633년)|이서우]] * [[이익 (1681년)|이익]] * [[오상렴]] * [[채제공]] * [[정약용]] == 각주 == {{각주| refs= <ref name="글로벌 이수광">《[[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사회변화와 대외관계/실학의 발생#이수광|이수광]]〉</ref> <ref name="송건호">[[송건호]], 《송건호 전집1 - 민족 통일을 위하여 1》 한길사 (2002) {{ISBN|8935655015}}</ref> }} == 참고 문헌 == * {{위키인용 |ref="선조실록 1616"| reference ={{서적 인용 |저자=춘추관 관원들 |연도=1616 |제목=[[선조실록]] |ref={{sfnRef|선조실록 1616}} }} }} == 외부 링크 == * [https://web.archive.org/web/20120204063020/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337-jibongusul.htm 지봉유설] * [http://old.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2505&clss_cd=150620&key=20061211.22020202819 신병주의 규장각 다시 읽기 <20> 이수광 '지봉유설']{{깨진 링크|url=http://old.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2505&clss_cd=150620&key=20061211.22020202819 }} 국제신문 2006년 12월 10일자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제목=실학의 발생}} {{1995년-이 달의 문화 인물}} {{전거 통제}}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1563년 출생]] [[분류:1628년 사망]] [[분류:사상가]] [[분류:조선의 왕족]] [[분류:조선의 문신]] [[분류:조선의 외교관]] [[분류:조선의 철학자]] [[분류:조선의 실학자]] [[분류:조선의 성리학자]] [[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조선의 작가]] [[분류:조선의 시인]] [[분류:조선의 저술가]] [[분류:서예가]] [[분류:조선의 번역가]] [[분류:임진왜란 관련자]] [[분류:원종공신]] [[분류:전주 이씨]]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분류: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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