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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용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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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정보 |이름 = 이윤용 |원어이름 = 李允用 |그림 = Lee Yun-yong Portrait.jpg |그림설명 = |서명 = |문장 = |문장설명 = |작위 = [[남작]] |재위 = |대관식 = |즉위식 = |전임자 = |후임자 = [[이병옥 (조선귀족)|이병옥]] |섭정 = |재상 = |수상 = |총리 = |휘 = |별호 = 자(字)는 경중(景中) |연호 = |묘호 = |존호 = |휘호 = |시호 = |능호 = |출생일 = {{출생일|1854|0|0}} |출생지 = [[조선]] [[평안도]] [[평양직할시|평양]]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39|9|8|1854|0|0}} |사망지 = [[일제강점기]] [[서울특별시|경성부]] [[가회정]] 9번지 |매장지 = |능묘 = |전각 = |가문 = [[우봉 이씨|우봉]] |아버지 = 이호준 |어머니 = |배우자 = 이씨(사별) <br /> 김씨(재혼) |자녀 = [[이명구]](아들) |친인척 = [[이병옥 (조선귀족)|이병옥]](손자)<br/>[[이항구]](조카) <br> [[이병길]](종손) <br> [[이병주 (조선귀족)|이병주]](종손) <br> [[이완용]](이복 적제) <br> [[흥선대원군]] (장인) <br> [[대한제국 고종|고종]], [[흥친왕]] 이재면 (이복 처남) |종교 = }} '''이윤용'''(李允用, [[1854년]]~[[1939년]] [[9월 8일]])은 [[조선]]의 말기의 문신, 정치가, [[대한제국]]의 황족이며, [[한일 병합]] 과정에서 [[일본]]에 협력했다. [[이완용]]의 이복 서형이다.<ref>이윤용은 판사 이호준(李鎬俊)의 서자(庶子)로, 이호준은 정실과 아들을 두지 못해 먼 친족 이호석(李鎬奭, 아명(兒名) 이석준(李奭俊))의 아들인 [[이완용]]을 양자로 들였으며, 첩과는 이윤용을 둠.</ref> 중추부 판사 이호준(李鎬俊, 1821년~1901년)의 서자(庶子)로 [[이완용]]의 이복 서형이다. 본관은 [[우봉 이씨|우봉]](牛峰), [[평양특별시|평안도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금천군|황해도 금천]]에서 유아기를 잠시 보낸 적이 있고 훗날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얼|서녀]] 사위, [[신정왕후 (조선)|조대비]]의 조카인 [[조성하 (1845년)|조성하]]의 서(庶) 처남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고종|고종]], [[흥친왕]] 이재면의 서(庶) 매부가 된다. == 생애 == === 생애 초반 === ==== 출생과 가계 ==== [[파일:Lee Wan-yong Portrait.jpg|섬네일|180px|왼쪽|이복 동생 [[이완용]]<br />(그가 서자였던 탓에 아버지 이호준은 먼 친족의 아들인 이완용을 양자로 들였다.)]] [[평양직할시|평안도 평양]] 출신으로, [[판서]]를 지낸 이호준의 [[서얼|서자]](庶子)였다. 이호준은 그를 적자로 올리지 않는 대신, 생전에 자신의 재산을 이윤용에게 대부분 상속하였다. [[입양|양자]](養子)인 [[이완용]]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주변의 반발에도 자신은 제사를 받들러 온 양자라 하였다. 한편 이윤용에게 다른 친형제 자매나, 아버지 이호준의 다른 첩에게서 나온 다른 서출 형제들이 있었는지 여부는 정확하게 전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 이호준은 처세술의 달인이었다. 고종 재위기간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을미사변]], [[아관파천]]과 같은 정치적 사변이 끊이지 않던 격동의 시기였다. 이런 와중에서 수많은 조정 대신들과 정객이 참살당하거나 외국에 망명하고 아니면 감옥에 갇히거나 귀양을 갔다.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권력은 부침을 거듭해서 계속해서 온전하게 자리를 지킨 자를 찾기가 힘들었다.<ref name="yun32">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2페이지</ref> 그런데 이런 격동의 시기를 살면서 이호준만은 이와 같은 정치적 사건에 단 한번도 휘말리지 않고 무려 30년 이상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평탄한 벼슬살이를 했다. 이것은 조선 말기의 정치사에서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로 미루어 그는 처세의 달인 중에서도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ref name="yun32"/> 이러한 아버지의 처신은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 유년 시절 ==== 이윤용의 첫 부인은 [[흥선대원군]]의 [[서얼|서녀]]로 계성월 소생이었다.<ref>사별 후 김기태(金箕台)의 딸과 재혼하였다.</ref> 동시에 [[이재선 모역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이재선 (1841년)|이재선]]의 동복 친누이였다고 한다.<ref name="kong176">황현, 《역주 매천야록 (상) (임형택 외 역, 문학과지성사, 2005) 176페이지</ref> 이재선의 역모 사건을 고변한 이들 중에 이재선의 친매부였던 이윤용도 있었다고 한다. 이윤용은 '운현궁이 안기영·권정호의 모의에 통하여 일이 이루어지면 대권이 다시 올 것이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면 천하고 어리석은 내 자식을 죽게 만드는데 불과하다고 하여 드디어 우물쭈물 모호하게 자식을 사지로 밀어 넣은 셈이 될 수 있으니, 이는 크게 인륜을 저버리고 도리에 어긋난 행위이다.'라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운현궁을 배반하고 마음을 털어 양전(고종, 민비)에 고해 바쳤다.<ref name="kong176"/> 한편 그가 [[흥선대원군]]의 [[서얼|서녀]]와 결혼한 일로 그의 아버지 이호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호준은 [[조선 철종|철종]] 말기, 후사가 없이 병세가 위중하자 자신의 정실 사위인 [[조성하]], [[조영하]]를 흥선대원군에게 연결시켜주기도 한다. === 한일합방 이전 === ==== 관료 생활 ==== 그는 과거에는 응시할 수 없었지만 [[1869년]](고종 6) 특별히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계속 관직에 있었고, [[1881년]] 양덕현감이 되었다. [[1881년]](고종 18) 처남인 [[이재선 (1841년)|이재선]]이 역모로 몰려 죽자 한때 연루되어 위기를 맞았으나 [[이재선 (1841년)|이재선]]의 역모를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에게 고변하였다.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1884년]] 통정대부<ref>정3품 당상관</ref>로 승자했다.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다시 [[가선대부]]로 승진, [[한성부]][[좌윤]], [[금군]]별장,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1887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자했다가 [[1889년]]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다. 그 뒤 [[한성부 판윤]]·지[[의금부]]사를 거쳐 [[영변군|영변]][[부사]]로 부임했다가, [[1890년]] [[봉산군|봉산]][[군수]]로 발령되었다. 1891년 다시 영변부사로 부임하였다. [[1894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포도청]] 좌포도대장을 겸직하고, [[갑오경장]] 이후 [[경무사]]로 근무하다가 1896년 이완용, [[이범진 (1852년)|이범진]](李範晉), 초 주조선[[러시아]] 공사관 웨베르 등과 등과 모의하여 정부 파천을 계획, 모의하고 [[2월 11일]] [[아관파천]]에 가담, 고종과 왕실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시로 옮기는데 성공한다. 이후 [[친러파]] 내각의 [[군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1897년]] [[의정부]]찬정으로 승진했다. ==== 대한제국 시대 ==== [[1898년]] 법규교정소 의정관에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성문 국법이자 [[한국]]의 첫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제]]의 각 규정, 조항을 제정, 수정하고 반포하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이후 [[중추원]]의관이 되고, 군부대신 등을 역임했으며 군제의정관으로 참여하여 군사 제도 제정에 참여했다. 이후 군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의정부]]찬정, [[1900년]](광무 3) [[6월]]에는 [[육군]][[부장]]에 임용되고, 그해 [[7월]] 다시 [[의정부]][[찬정]]에 임명되었다. [[1903년]] [[경상남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905년]] 찬모관(贊謀官)이 되고, 같은 해 [[시종원]]경 임시서리, [[평리원]]재판소 재판장 등을 역임했다. 이완용이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전환하는 동안 그는 지방의 관찰사와 [[평리원]] 재판관 등을 역임하다가 1906년 [[한성은행]] 설립에 참여하고 부은행장이 되었다. [[1907년]](광무 10)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어 [[영친왕]]이 인질로 일본에 유학갈 때 수행원 자격으로 그를 수행했다. [[1907년]] [[7월]] [[이준]] 등을 밀파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본 정부]]에 발각되면서 고종이 양위를 강요당하자,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고종의 양위를 놓고 찬반이 나뉘었고 그는 양위 찬성에 섰다. [[1907년]](융희 1) [[9월 19일]] [[육군]] [[부장]]직에서 면직되었다. 한편 [[1910년]](융희 4) [[5월]] [[한미합자회사]]를 세운다는 말로 고종에게서 자본금을 하사받았지만 [[이완용]]과 같이 이 돈을 착복하였다. === 한일 합방 이후 === [[1910년]] 국권피탈 후 일제로부터 [[조선귀족|남작]]의 칭호를 받았고, 역시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김종한 (조선귀족)|김종한]]이 설립한 [[한성은행]]에서 부은행장([[1906년]]), 은행장([[1909년]]-[[1923년]])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퍽 부유한 생활을 했다.<ref> {{저널 인용 |저자=연성숙 |제목=日帝韓人貴族의 近況|저널 = 진상 |연도 = 1960 |작성월 = 3 }}</ref> [[1923년]] [[한성은행]]장 직에서 물러나고, [[1926년]] 동생 [[이완용]]의 임종을 지켰다. [[1928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고, 수차례 유임되어 [[1938년]] [[9월 8일]] 사망할 때까지 역임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ref>{{뉴스 인용 |저자 = 성강현 |제목 =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url = 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1.html |출판사 = 일요시사 |날짜 = 2004-03-18 |확인날짜 = 2008-04-16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0627191258/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1.html |보존날짜 = 2008-06-27 |url-status = dead }}</ref><ref>{{뉴스 인용 |저자 = 성강현 |제목 =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url = 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2.html |출판사 = 일요시사 |날짜 = 2004-03-18 |확인날짜 = 2008-04-16 |확인날짜 = 2008-03-06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0627191303/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2.html |보존날짜 = 2008-06-27 |url-status = dead }}</ref> [[당뇨병]]을 앓아 병석에 누운 그는 약을 썼지만 효과가 없었다. [[1939년]] [[9월 8일]]에 [[경성부]] [[가회정]] 9번지 자택에서 [[당뇨병]]으로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사후 ===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광석리(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작위는 [[10월 15일]] 그의 장손 [[이병옥 (조선귀족)|이병옥]](李丙玉)에게 세습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그의 작위를 습작한 손자 [[이병옥 (조선귀족)|이병옥]]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 가족 관계 == {{이완용 가계도}} * 아버지: 이호준 ([[이완용]]의 양아버지) * 어머니: 이름 미상 ** 양 동생 : [[이완용]](李完用, [[1857년]] [[7월 17일]] - [[1926년]] [[2월 12일]]) ** 누이: 풍양 조씨 조성하에게 출가 ** 누이: 연안 김씨 김준연에게 출가 ** 누이: 청주 한씨 한관수에게 출가 ** 누이: 양주 조씨 조영희에게 출가 ** 누이: 해평 윤씨 윤성구에게 출가 ** 누이: 안동 김씨 김진규에게 출가 ** 누이: 안동 김씨 김은규에게 출가 * 처 : 전주이씨, [[흥선대원군]]의 서녀 * 처 : 김씨, 김기태(金箕台)의 딸 * 아들: 이명구(李明九) * 손자: 이병태(李丙台) * 손자: [[이병옥 (조선귀족)|이병옥]](李丙玉, [[1913년]] - [[1989년]]) * 장인 : [[흥선대원군]]([[1820년]] - [[1898년]]) ** 처남 : [[이재선 (1841년)|완은군 이재선]](完恩君 李載善, [[1842년]] - [[1881년]]) *** 처조카 : [[이관용 (황족)|이관용]] == 이재선 사건 고변 원인 == 그는 [[이재선 모역 사건]]을 [[고종]]과 [[민비]]에게 고해 바쳤다.<ref name="kong176"/> 이윤용이 보기에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기 위해 이재선을 이용하려고만 했다.<ref name="siksso">[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279118 월산대군이‘빈 배’탄 이유 오직 살기 위해서였다] 중앙매거진 2009.06호 (2009.06.01)</ref> 친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권력을 잡으려는 [[흥선대원군]]의 잔혹함에 [[이윤용]]은 치를 떨었다.<ref name="siksso"/> [[이윤용]]의 생각대로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쿠데타가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 모두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웠다.<ref name="siksso"/> 성공한다면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이 될 계획을 세웠다.<ref name="siksso"/> 반면 실패한다면 모든 책임을 이재선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빠져나올 계획을 세웠다.<ref name="siksso"/> 이윤용은 '이루어지지 못하면 천하고 어리석은 내 자식을 죽게 만드는데 불과하다고 하여 드디어 우물쭈물 모호하게 자식 을 사지로 밀어 넣은 셈이 될수 있으니, 이는 크게 인륜을 저 버리고 도리에 어긋난 행위<ref name="kong176"/>'라고 보았던 것이다. == 기타 == * [[이호준]]은 [[이완용]]을 양자를 들였지만 살아 생전에 자신의 친핏줄인 서자 이윤용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고관대작인 아버지가 그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 조차 그는 개의치 않고 서운한 기색 하나 나타내지 않았다. [[이완용]]은 "나는 다른 사람의 양자다. 나를 양자로 삼은 것은 오로지 조상의 [[제사]]를 끊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양자로 들어온 이후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 없다 하였더라도 어찌 나의<ref name="yun34">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4페이지</ref> 책임을 소홀히 하여 나를 양자로 데려온 본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ref name="yun35">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5페이지</ref>" 라고 말하면서 일년에 열두 번씩 돌아오는 제사와 네 번의 절사, 한달에 두 번씩 치르는 차례상을 지성으로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도 출근하지 않고 사람도 접촉하지 않으면서 하루 종일 의관을 갖추고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ref name="yun35"/> * 이윤용은 관료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에서는 1등8괘장(一等八卦章), 태극장, 대훈(大勳) 이화장(李花章)을 받았고, [[일본]] 정부의 활동 적극적으로 협력한 공로로 일본국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수여받았다. == 참고 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제목=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연도=2007 |발행월=12 |id=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출판위치=서울 |쪽=308~326쪽 |장=이윤용 |장url=http://www.pcic.go.kr:8088/pcic/UserFiles/File/2007JOSA/SUJAKSUBSAK/20-LYT.pdf }}{{깨진 링크|url=http://www.pcic.go.kr:8088/pcic/UserFiles/File/2007JOSA/SUJAKSUBSAK/20-LYT.pdf }} * {{뉴스 인용 |저자=김영균 |출판사=오마이뉴스 |url=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7350 |제목=조부는 나라 팔고, 손자는 작위 받고 - '부자·형제·부부·사돈' 친일가족 여럿.. 이완용 3대 세습 |확인날짜=2007-11-27 |날짜=2005-08-29 }} == 각주 == {{각주}} {{전임후임| |전임자 = [[이채연 (1861년)|이채연]] |후임자 = [[H. R. 밀스]] |직책 = [[한국전력공사|경성전기 대표이사 사장]] |임기 = 1900년 ~ 1904년 }}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1854년 출생]] [[분류:1939년 사망]] [[분류:조선의 문신]] [[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온건개화파]] [[분류:대한제국의 황족]] [[분류:대한제국의 관료]] [[분류:대한제국의 부장]] [[분류:육군 장군]] [[분류:운현궁]] [[분류: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 [[분류:일제강점기의 관료]] [[분류:일제강점기의 은행가]] [[분류:조선남작]] [[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 [[분류:조선사 편수회]] [[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분류:평양시 출신]] [[분류:우봉 이씨]] [[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 [[분류:당뇨병으로 죽은 사람]] [[분류:대한제국의 경상북도관찰사]] [[분류:대한제국의 경상남도관찰사]] [[분류:대한제국의 군부대신]] [[분류:대한제국의 농상공부대신]] [[분류:대한제국의 궁내부대신]] [[분류:대한제국의 전라남도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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