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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재완 (프로게이머)||프로게이머}} {{왕족 정보 |이름 = 이재완 |그림 = Lee Jae-wan Portrait.jpg |작위 = 완순군 |재위 = [[1899년]] ~ [[1910년]] |작위2 = [[후작]] |재위2 = [[1910년]] ~ [[1922년]] |후임자2 = [[이달용]] |자녀 = [[이달용]] |아버지 = [[이정응]] (양부)<br /> 이신응 (생부), 최씨 (생모) |친척 = [[조선 고종]] (종제)<br /> [[이재곤 (조선귀족)|이재곤]] (동생) |출생일 = [[1855년]] 음력 [[12월 5일]]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br>(現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22|8|11|1856|1|12}} |사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거주지 = 경기도 남양주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일본 제국 }} '''이재완'''(李載完, [[1855년]] [[음력 12월 5일]] ~ [[1922년]] [[8월 11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왕족이며 [[대한제국]]의 황족, 관료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초명은 을경(乙經), 자는 순칠(舜七), 호는 석호(石湖)이다.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이며, [[사도세자]]의 현손이다. [[1899년]]에 완순군에 봉작되었고,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으로 봉작되어 [[조선귀족]]이 되었다. [[1884년]] [[12월]] [[서재필]], [[김옥균]], [[이규완]]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 당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97년]]([[광무 (연호)|광무]] 원년)에 [[한성은행]](漢城銀行)의 창립을 주관하였다. == 생애 == === 생애 초반 === [[1855년]](철종 6년)에 [[조선 선조]](宣祖)의 아홉째 서자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의 9대손이자 [[음서 제도|음]]직으로 [[참봉]], [[현령]]을 지내고 [[증직|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신응(李愼應)<ref>경창군의 장남인 창원군(昌原君)의 8대 종손(宗孫)</ref>과 그의 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다섯째 아들로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을경(乙經), 자는 순칠(舜七)이었다. [[1864년]] 고종의 지시로, 자녀가 없던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의 양자를 선발할 때, 양자로 낙점되었다. 본명 을경, 자는 순칠에서 고종의 명으로 흥완군의 양자로 정해지면서 이름을 재완으로 개명하였다. 위로 형 4명이 있으나 요절하여 그가 사실상 장남이 됐으나, 흥완군 정응의 양자로 정해졌다. 그의 동생 [[이재곤]]이 본가의 장남 역할을 하게 됐다. 그 외에 남양홍씨 홍대후(洪大厚)에게 출가한 누이가 1명 있었다. 홍대후는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역임했다. 그의 본생가로는 [[경창군]] 이주의 9대손으로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그의 7대조 서천군 이황(西川君 李榥)에서 끝났다. 본생 6대조 이정욱(李廷煜)의 동생 이정소(李廷熽)의 아들 중 이채(李埰)의 아들 수신이 숙종의 서자 [[연령군]] 훤의 양자로 지명, 이름을 온으로 고치고 낙천군이 되어 연령군의 양자로 입양간 일이 있다. [[낙천군]]도 자녀가 없어서 덕흥대원군가에서 양자 영을 달선군으로 봉하고 양자로 들였으나, 새어머니 서씨와 갈등 끝에 자결하여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두번째 서자 [[은신군]] 진을 양자로 들였다. 은신군이 아들이 없어 다시 인조의 차남 인평대군 요의 8대손 채중을 양자로 삼아 구로 이름을 고치고 남연군으로 봉했다. 양가의 고조부 낙천군 이온은 본생가로는 삼종고조부가 된다. 한편 양아버지 이정응은 인조의 후손으로 봐도 21촌, 양할아버지 남연군 구의 본생가 인평대군 쪽으로 계산해도 21촌이 된다.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교관(敎官)을 지냈다. [[1873년]](고종 10) [[7월 23일]]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1875년]] [[흥완군]]의 환갑을 기념하여 특별히 이재완에게 [[과거 시험]]에 직부(直赴)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 관료 생활 === [[파일:Yi Jae-wan photograph.png|섬네일|군복을 입은 이재완]] [[1875년]](고종 12년) 4월에 [[과거 제도|문과]]에 급제하여<ref>{{웹 인용|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75_013878&isEQ=true&kristalSearchArea=P|제목=과거 및 취재, 이재완(李載完)|저자=한국학중앙연구원|확인날짜=2012-09-0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24095258/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75_013878&isEQ=true&kristalSearchArea=P|보존날짜=2016-03-24|url-status=dead}}</ref>, [[5월 20일]]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고, [[6월 20일]] 다시 가주서에 임명되었다. 12월 8일 분가주서에 임명되고 1876년 1월 한림에 들었다. [[1876년]](고종 13년)에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기주관으로 선발되어 6품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겸설서와 겸춘추를 겸직하였다. [[1877년]](고종 14년)에 정3품으로 승진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았다. [[1878년]] 곡산부사로 나갔다. [[1879년]](고종 16년)에 종2품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10월 승정원도승지가 되고, 12월 의약청 부제조가 되었다. [[1880년]](고종 17년) [[2월]]에 [[이조 (육조)|이조]][[참판]]을 제수받았고,<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1702011_003&grp=&aid=&sid=201274&pos=9|제목=이최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880-02-11}}</ref> 5월 18일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1705009_001&grp=&aid=&sid=201274&pos=10|제목=이재완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880-05-09}}</ref> [[1882년]](고종 19년)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나갔가 그해 [[7월]] 산릉도감 서사관(書寫官)에 차출되었다. 그해 가을 [[영변]]도호부사로 부임했다가<ref>《영변지》, 官師表 pp.148</ref> 곧 [[승정원]][[승지]]에 임명되어 돌아왔다.<ref>《영변지》, 官師表 pp.148</ref> [[1884년]](고종 21년) [[12월]] [[갑신정변]] 당시에 [[개화당]](開化黨) 내각의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2110018_003&grp=&aid=&sid=201274&pos=16|제목=서광범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884-10-18}}</ref>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서재필]], [[김옥균]], [[이규완]] 등은 망명하고 [[홍영식]] 등은 사살되었다. 그러나 이재완은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며, [[개화당]]원이 아니라 하여 처벌받지는 않았다. [[1885년]](고종 22년)에 정2품으로 승진하였으며, 형조판서와<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2204007_003&grp=&aid=&sid=201274&pos=20|제목=이재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885-04-07}}</ref>, 지경연사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받았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2205012_003&grp=&aid=&sid=201274&pos=21|제목=이병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885-05-12}}</ref> [[1886년]](고종 23년)에 예문관 제학, 홍문관 제학과<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2301013_001&grp=&aid=&sid=201274&pos=24|제목=민응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886-01-13}}</ref> 시강원 좌부빈객,<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2302011_001&grp=&aid=&sid=201274&pos=25|제목=이재완을 시강원 좌부빈객에 임명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886-02-11}}</ref> 예문관 제학,<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2303006_003&grp=&aid=&sid=201274&pos=26|제목=이재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886-03-06}}</ref> 한성부 판윤을 제수받었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2304011_003&grp=&aid=&sid=201274&pos=27|제목=이재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886-04-11}}</ref> 1887년 신칙하라는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재원과 함께 경기도 연해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890년]](고종 27년) [[한성부]] 판윤, 다시 형조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거쳐 [[1891년]](고종 28년)에는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2년]](고종 29년)에 종1품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12월 판의금부사 [[1894년]](고종 31년) [[5월 20일]] [[공조판서]], [[5월 29일]] 판의금부사, [[6월 13일]]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역임했다. === 대한제국기 활동 === [[1895년]](고종 32년) [[5월 5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칙임관(勅任官)에 서임되었다. [[1896년]](건양 1년) [[1월 1일]] [[종정원]] 경 겸 [[귀족원]] 경(宗正院卿兼貴族院卿), [[10월]] 빈전 제조(殯殿提調), [[1897년]](건양 2년)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를 역임했다. [[1897년]]([[광무 (연호)|광무]] 원년)에 [[한성은행]](漢城銀行)을 설립할 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898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1899년]](광무 3년)에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에 4대 승습의 예에 따라 완순군(完順君)에 봉작되었으며,<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3609021_002&grp=&aid=&sid=202920&pos=0|제목=장종 대왕을 추숭하는 것과 관련하여 승습한 사람들에게 법전대로 봉작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899-09-21}}</ref>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일본]]과 열강이 [[대한제국]] 국내에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려 하자, 이재완은 이규환(李圭桓), 박기종(朴琪淙), 윤기영, 이준호, 서오순 등과 함께 철도경영만은 우리 손으로 해야 된다며 나섰으며<ref>"財界山脈 近世 100年產業과 人物 <36> 鐵道·海運特許 (3)", 매일경제 1981년 6월 8일자 7면, 경제면</ref>, [[1899년]] [[대한철도회사]]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1903년]](광무 7년)에 [[한성은행]]이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되면서, 이재완은 은행장에 선출되었다. [[1905년]](광무 9년) 1월에 보빙대사(報聘大使)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2월에 귀국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4월 27일에 [[대한제국군]] [[육군]][[부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에 승녕부(承寧府) 총관을 제수받았다. [[1909년]] [[7월 28일]] [[한성은행]] 주주총회에서 이재완은 두취로부터 고문으로 밀려나고 [[이윤용]](李允用)이 두취로 취임할 것을 결의했다.<ref>"財界山脈 近世 100年 産業과 人物 <90> 民族銀行 創業 (8)", 매일경제 1981년 8월 10일자 7면, 경제면</ref> === 생애 후반 === [[1910년]] 10월 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며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이 공포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에 봉작되었고, 은사공채 336,000엔을 하사받았다. [[1912년]]에 한성은행 은행장을 사퇴하였다. [[1912년]] [[9월 9일]] 흥친왕 이재면이 죽자 장례식을 회피, 외면하려던 [[이준용 (1870년)|영선군 이준용]]을 달래서 장례식을 거행했다. [[흥친왕]]의 빈소에서 이준용은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았고, 완순군은 [[이준용 (1870년)|영선군 이준용]]을 질책하였다. 그러나 이는 [[국왕]]의 친형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신원을 요청하지 못하고 자객들의 [[일본]]행도 막지 못한 점, [[일본]] 망명 중에 아버지이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했고 집안을 제대로 경영하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ref name="p342">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42쪽.</ref> [[이준용 (1870년)|영선군]]은 자신의 암살위협과 폭력, [[김학우]] 암살 사건 당시 죽음의 위기, [[일본]]으로 침투한 조선 자객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 원망을 품은 그는 오히려 가족과 친척들이 해준 것이 무엇이냐며 반발했다. 그 뒤 3년상을 거행하였지만 형식적이었고, 소상과 대상 때 고종과 덕수궁(순종) 등이 비용과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지만 그는 형식적으로 응답하였다. [[9월 9일]] 오후 [[대한제국 고종|이태왕]]이 된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이재면의 빈소를 찾았을 때, [[이준용 (1870년)|영선군 이준용]]은 자리를 피하였다. 고종의 문상 정보를 미리 전해들은 그는 자리를 피했고 신경전을 피하였다. 이재완은 이준용을 달래가며 [[흥친왕]]의 장례식을 마쳤다. 그는 [[조선총독부]]에서 [[중추원]] 찬의의 자리를 제안하였지만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922년]] [[8월 11일]] 오전에 사망하였고, [[8월 18일]] [[경성부]] 자운동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후작의 작위를 아들 [[이달용]]이 상속하였다. === 사후 ===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안골(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97-1 안골) [[금대산]](金臺山)의 갓무봉 [[흥완군]]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또한 완순군의 묘 아래에는 그의 아들 [[이달용]]의 묘가 있다. 묘소에 묘비는 없고 상석과 석물만이 세워져 있다. 임종할 무렵 그는 [[한일합방]] 조약에 대한 수치심으로, 유언을 남기길 자신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하여 후손들은 비석을 세우지 않고, 상석 뒷편에 그의 이름만 남겼다 한다. 그의 묘소 전면 양 옆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고, 묘소와 상석 바로앞 정면에는 [[돌]]로 조각된 장명등이 1기 서 있다. 흥녕군과 이재완의 묘소 근처에는 이재완의 아들 [[이달용]]의 저택이 있었다. 이재완 묘소 근처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한때 [[승지]]를 지냈던 [[이달용]]이 항상 그 물을 길어다 마셨다 하여 승지물 이라고 불렸고 그 근처를 승지물마을이라 불렸다 한다. 흥녕군과 이재완 묘소 근처에는 [[이달용]]의 큰 기와 저택이 있었고, 논이 많았다. 완순군 묘 바로 아래에는 이달용의 묘가 있다. == 평가 == [[2002년]]에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다. [[2007년]]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수록되었다. [[2009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가족 관계 == * 양아버지 : [[흥완군]] [[이정응]](李晸應, [[1814년]] ~ [[1848년]]) * 양어머니 : 대구서씨([[1810년]] [[2월 23일]] ~ [[1834년]] [[2월 28일]]), 군수 서탁수(徐鐸修)의 딸, 생전에는 군부인이었고 사후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 양어머니 : 순천박씨([[1818년]] [[2월 3일]] - [[1888년]] [[8월 7일]]), 박해익(朴海翊)의 딸, 생전에 군부인에서 [[정경부인]]의 봉작을 받았다. * 생부 : 이신응(李愼應, [[1824년]] [[9월 4일]] ~ [[1870년]] [[10월 30일]]) * 생전모 : 밀양박씨(密陽朴氏, [[1828년]] [[6월 12일]] ~ [[1849년]] [[2월 2일]]), 아버지 이신응의 본부인 * 생모 : 전주최씨(全州崔氏, [[1820년]] [[3월 11일]] ~ ), 최병익(崔秉益)의 딸 ** 동생 : [[이재곤 (조선귀족)|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崐, [[1859년]] ~ [[1943년]]) * 부인 : 정경부인 서씨(貞敬夫人 徐氏, ? ~ [[1923년]]) ** 아들 : [[이달용]](李達鎔, [[1883년]] ~ [[1948년]]) ** 며느리 : 안동김씨(1883년 3월 4일 ~ ?), 진사 김회근(金會根)의 딸 *** 손녀 : 이씨 *** 손자 : 이해선(李海善, [[1905년]] ~ [[1983년]]), 화가 *** 손자 : 이해명(李海明, [[1911년]] ~ ?) - [[흥친왕]]의 차남 [[이문용 (1882년)|이문용]]의 양자로 출계 *** 손자 : 이해상([[1913년]] ~ [[1985년]]) **** 증손녀 : 이남주 (피아니스트, 전 성심여대 교수) *** 손녀 : 이길영([[1916년]] ~ ?) *** 손녀 : 이우영(李又英, [[1920년]] ~ [[1938년]] [[1월 28일]]) *** 손자 : [[이해영 (학자)|이해영]](李海英, [[1925년]] ~ [[1979년]] [[11월 18일]]), 대학 교수 ** 아들 : [[이규용]](李逵鎔, [[1888년]] [[6월 13일]] ~ ?, 참봉) ** 며느리 : 풍산홍씨, 문과 비서원승 홍순구(洪淳九)의 딸 ** 첩며느리 : [[이경수]](李慶洙, [[1893년]] ~ [[1968년]] [[1월 18일]]), [[1924년]] [[원불교]]에 귀의했으며 법명은 이동진화(李東震華), 법호는 육타원(六陀圓), 아들 이규용의 첩 ** 딸 : 이씨 ** 사위 : [[김병협]](金炳協, 비서원승 역임), 도사 김면근(金冕根)의 아들 == 각주 == {{각주}} == 참고 자료 == * [https://web.archive.org/web/20160310084943/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1855_1_0010479 이재완]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http://db.history.go.kr/url.jsp?ID=im_108_03677 이재완]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1855년 출생]] [[분류:1922년 사망]] [[분류:과거 급제자]] [[분류:조선의 문신]] [[분류:조선의 왕족]] [[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대한제국의 황족]] [[분류:대한제국의 관료]] [[분류:대한제국의 군인]] [[분류:육군 군인]] [[분류:운현궁]] [[분류:대한제국 고종]] [[분류:흥선대원군]] [[분류:조선후작]] [[분류:일본의 은행가]] [[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분류:전주 이씨]] [[분류:일제강점기 사람]] [[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 [[분류:서성대훈장 수훈자]] [[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 [[분류: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 [[분류:남양주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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