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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임복_(1521년)}} '''임복'''(林福, ? ~ ?)은 [[조선]] 전기의 사[[노비]]였다. [[노비 추쇄|도망노비]]와 달리 [[1485년]](성종 16년) 여름 흉년, 기근 때 재난복구를 돕고 [[성종]]의 특명으로 [[면천]], [[평민]]의 신분이 되었다. [[1485년]] 당시 흉년이 들자 [[1485년]](성종 16) [[7월 24일]] 2000석의 [[곡식]]을 [[조선]] [[정부]]에 바쳤고, 그는 왕에게 [[속량]]을 청원하였다. 성종이 그를 칭찬하여 면천 속량시키려 하자 [[한명회]](韓明澮), [[이극배]](李克培), [[윤호]](尹壕) 등은 찬성하였으나, [[심회]](沈澮) 등은 [[노비]]가 주인을 배반할 것을 염려하여 반대하였다. 그는 [[쌀]] 1000석을 더 바칠테니 자신의 네 아들의 속량을 청원하였고, 성종이 이를 받아들여 평민의 신분이 되었다. [[충청도]] [[진천]] 출신. == 생애 == [[조선 성종|성종]] 때 [[충청도]] [[진천]]의 [[외거노비]]로, 성씨가 있는 그가 어떤 이유로 [[노비]]가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의 가계에 대한 기록 역시 세조~성종 연간의 호적이 사라져 알 수 없고, 그가 어떤 이유로 주인의 신임을 얻어 [[외거노비]]가 될수 있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멀리 떨어진 주인의 월경지 땅을 [[경작]]하고, [[세금]]으로 [[신공]]을 바쳤다. 그러나 신공을 바치고도 재산을 축적하였다. [[7월 24일]] 그는 2000석의 쌀을 나라에 바쳤다. 이에 [[한명회]](韓明澮), [[이극배]](李克培), [[윤호]](尹壕) 등이 상주하기를 "임복이 곡식 2천 석을 바쳤으니, 1백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에 족합니다. 자원(自願)에 따라 그 아들을 양민(良民)으로 만들어 주고, 그 인원(人員)에 상당(相當)한 노비(奴婢)를 그 주인에게 보충하여 주소서."라 하였고, [[심회]](沈澮), [[홍응]](洪應) 등은 "만약 곡식을 바쳐 종량(從良)하는 길을 열어 준다면 주인을 배반하는 자가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니, 진실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라며 반대하였다.<ref>성종실록 181권, 1485년(성종 16년, 명 성화 21년) 7월 24일 임신 1번째기사, 진천의 사노 임복이 곡식 2천 석을 바치니 그 상을 논의하다</ref> [[1476년]](성종 7년) [[7월 28일]] [[성종]]은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임복을 불러서 그 원하는 바를 묻자, 네 아들을 면천(免賤)하여 양민(良民)이 되게 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성종]]은 특명을 내려 임복의 네 아들을 모두 종량(從良)시키고, 공천(公賤)으로 그 원주인들에게 보상케 하였다.<ref>성종실록 181권, 1485년(성종 16년, 명 성화 21년) 7월 28일 병자 2번째기사, 임복이 곡식 2천 석을 바치니 임복의 네 아들을 모두 양인이 되게 하다</ref> 그러나 네 아들이 아닌 임복만이 면천 되었다. 1485년 7월 29일부터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경동(李瓊仝)이 임복의 면천이 잘못되었다는 상소를 계속 올렸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1476년]] [[8월 17일]] 임복은 다시 쌀 1천 석을 더 바치고, 4명의 아들도 모두 [[종량]]되어 평민이 되었다.<ref>성종실록 182권, 1485년(성종 16년, 명 성화 21년) 8월 17일 을미 2번째기사, 임복이 또 곡식 1천 석을 바칠 것을 청하니, 아들 4인도 모두 양인이 되게 하다</ref> 속량된 이후 임복 일가는 [[진천군|진천]]을 떠나 타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평민으로 면천된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 사후 == 그가 언제 사망하였는지, 사망일자와 묘지는 기록이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그가 면천된 일이 알려지면서 [[1485년]](성종 16) [[8월 20일]] [[전라도]] [[남평]](南平)에 사는 사노(私奴) 가동(家同)이 2천 석을 [[납속]](納粟)하고 양민이 되기를 청하여 [[호조]]가 이를 보고하였으나, 성종은 비슷한 사례가 계속 나타날까봐 그의 곡식을 받지 않고 종량을 거절하였다 임복 이전에도 [[세종]] 때 윤덕생(尹德生)이 주인이 특별히 풀어주어 면천, 평민이 되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재산을 바쳐서 평민으로 납속된 사례는, [[2000년대]]까지 [[한국]]에 현전하는 기록에 등장하는 것으로는 임복이 처음이었다. 이후 [[중종반정]], [[을사사화]] 등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된 일부 노비, 천민들이 노비, 천민에서 면천되거나 양반이 된 사례가 소수 있었으며, [[노비]]의 신분 상승 시도는 [[1599년]](선조 32년) [[임진왜란]] 종전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 각주 == {{각주}} == 같이 보기 == * [[수봉]] * [[서일 (노비)|서일]] * [[노비]] * [[외거노비]] * [[노비 추쇄]] * [[추노]] == 외부 링크 == * [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380538 곡식 3천석을 조건없이 기부하다, 진천노비 임복] 충북일보 2015.01.20. *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art_id=200805012002076&sec_id=561201 노비, 왕에게 딜(deal)을 걸다⑥] 경향신문 2008.05.01.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토막글|조선|한국 사람}} [[분류:생년 미상]] [[분류:몰년 미상]] [[분류:조선 사람]] [[분류:노비]] [[분류:진천군 출신]] [[분류:조선 성종]] [[분류:한국의 노예]] [[분류:진천 임씨]] [[분류:해방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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