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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고려-거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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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보 |분쟁 = 제3차 고려-거란 전쟁 |전체 = [[고려-거란 전쟁]] |그림 = |그림크기 = |설명 = |날짜 = 1018년 ~ 1019년 |장소 = [[한반도]] 북부 |결과 = 고려의 승리 |교전국1 = [[고려]] |교전국2 = [[요나라]] |지휘관1 = [[고려 현종]]<br />[[강감찬]]<br />[[강민첨]]<br />[[김종현 (고려)|김종현]]<br />[[조원]]<br />[[박종검]]<br />[[유참]] |지휘관2 =[[소배압]]<br />[[소굴렬]]<br />[[소한령]]<br />[[소요지]]<br />[[해리]] [[작전 중 사망|†]]<br >[[아과달]] [[작전 중 사망|†]]<br />[[작고]] [[작전 중 사망|†]] |병력1 = 208,000 명 |병력2 = 100,000 명 |사상자1 = 불명 |사상자2 = 90,000 명 이상 |지도 = |지도설명 = |기타 = }} {{전역상자 여요전쟁}}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고려 현종|현종]]은 [[거란]]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ref>현재의 [[평안남도]] [[순천시 (평안남도)|순천시]]</ref>(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ref>지금의 [[황해북도]] [[신계군]]</ref>(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강감찬은 자주와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ref>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ref>(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 같이 보기 == * [[고려-거란 전쟁]] == 각주 == {{각주}} {{요나라}}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토막글|한국사}} [[분류:고려-거란 전쟁]] [[분류:1018년 분쟁]] [[분류:1019년 분쟁]] [[분류:1018년 한국]] [[분류:1019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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