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주 메뉴
주 메뉴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요즘 화제
임의의 문서로
sitesupport
사용자 모임
사랑방
사용자 모임
관리 요청
편집 안내
소개
도움말
정책과 지침
질문방
한울위키
검색
검색
보이기
로그인
개인 도구
로그인
지눌 문서 원본 보기
문서
토론
한국어
읽기
원본 보기
역사 보기
도구
도구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동작
읽기
원본 보기
역사 보기
일반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문서 정보
보이기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
지눌
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일반 사용자
.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승려 정보 | 법명 = 지눌(知訥) | 그림 = Jinul.jpg | 그림설명 =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지눌 진영 | 출생일 = 1158년 | 출생지 = [[고려]] [[황해도]] 서흥군 동주(洞州: 서흥) | 입적일 = 1210년 (53세) | 종파 = [[조계종]] | 저작 =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br/>《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br/>《진심직설(眞心直說)》<br/>《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외 | 제자 = {{개행 금지 시작}}천진(天眞){{.w}}확연(廓然){{.w}}수우(守愚){{.w}}인민(仁敏){{.w}}가혜(可慧){{.w}}[[혜심]](慧諶) 등{{개행 금지 끝}} }} {{한국의 불교}} '''지눌'''(知訥, [[1158년]]~[[1210년]] [[4월 22일]]([[음력 3월 27일]]))은 [[고려]] 중기 ~ 후기의 승려이다. 속성이 정(鄭)이고, 자호가 목우자(牧牛子)이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며, 탑호는 감로(甘露)이다. 동주(洞州: [[서흥군|서흥]]) 출생이다.<ref name="글로벌-지눌">[[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무인시대의 문화#지눌|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귀족사회와 무인정권 > 무인시대의 문화 > 지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도의 (승려)|도의]](道義: fl. [[821년|821]])국사를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여기며,<ref name="조계종-도의">[http://www.buddhism.or.kr/bbs/board.php?bo_table=DN_Content_001&wr_id=1&DNUX=info_01_010101 "종단 소개 > 종조 > 종조 도의국사"] {{웹아카이브|url=https://web.archive.org/web/20180620101716/http://www.buddhism.or.kr/bbs/board.php?bo_table=DN_Content_001&wr_id=1&DNUX=info_01_010101}}, 대한불교조계종. 2018년 6월 20일에 확인.</ref> 보조국사 '''지눌'''을 조계종의 중천조(中闡祖: 분명하게 밝힌 조사)로 여기며,<ref name="조계종-지눌">[http://www.buddhism.or.kr/bbs/board.php?bo_table=DN_Content_001&wr_id=8&DNUX=info_01_0103 "종단 소개 > 종조 > 중천조 보조지눌국사"] {{웹아카이브|url=https://web.archive.org/web/20180620101445/http://www.buddhism.or.kr/bbs/board.php?bo_table=DN_Content_001&wr_id=8&DNUX=info_01_0103}}, 대한불교조계종. 2018년 6월 20일에 확인.</ref> [[태고국사 보우]](普愚: [[1301년|1301]]~[[1382년|1382]])를 중흥조(中興祖: 중흥시킨 조사)로 여긴다.<ref name="조계종-보우">[http://www.buddhism.or.kr/bbs/board.php?bo_table=DN_Content_001&wr_id=7&DNUX=info_01_0102 "종단 소개 > 종조 > 중흥조 태고보우국사"] {{웹아카이브|url=https://web.archive.org/web/20180620124734/http://www.buddhism.or.kr/bbs/board.php?bo_table=DN_Content_001&wr_id=7&DNUX=info_01_0102}}, 대한불교조계종. 2018년 6월 20일에 확인.</ref> == 생애 == [[1158년]] [[국자감 (고려)|국자감]]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와 부인 조(趙)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에 [[사굴산파]]의 종휘(宗暉)를 은사로 하여<ref name="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1583&cid=46648&categoryId=46648 지눌]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f> 승려가 되어 구계(具戒)를 받고 일정한 스승 없이 도를 구하였다.<ref name="글로벌-지눌"/> [[1182년]]([[고려 명종|명종]] 12년)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승려로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많은 선배를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ref name="글로벌-지눌"/> [[개경]]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해 10여 명의 동료들과 뒷날 결사(結社)를 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창평군|창평]](지금의 [[담양]]<ref name="두산백과"/>) [[청원사]](淸願寺)에서 《[[육조단경]]》을 읽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은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지눌은 이를 계기로 [[혜능]]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ref name="고운기-지눌">고운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492&cid=59015&categoryId=59015 인물한국사 - 지눌]</ref> [[1185년]] 속세를 피하고 도를 구하기 위하여 하가산(下柯山, 지금의 [[예천]] [[학가산]]<ref name="두산백과"/>)의 [[보문사 (예천군)|보문사]](普門寺)에 들어갔다.<ref name="글로벌-지눌"/> 그곳에서 《[[대장경]]》을 열독하며 불도에 전력하던 중,<ref name="글로벌-지눌"/>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의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다”라는 구절과 이통현(李通玄)이 쓴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의 “몸은 지혜의 그림자”라는 구절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전해진다.<ref name="고운기-지눌"/> 이로써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고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ref name="한국민족문화대백과"/> [[1188년]] [[득재]](得才)·[[몽선]](夢船) 등과 [[팔공산]] 거조사(居組寺)로 거처를 옮겨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했다. [[1190년]]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선포하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았다.<ref name="두산백과"/> [[1197년]]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도하던 중, 시비를 일으키는 무리를 교화하지 못하자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가, 홀로 선정(禪定)을 닦았다. 그때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현실참여적인 보살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ref name="한국민족문화대백과"/> [[1200년]] [[조계산|송광산]](松廣山) [[송광사|길상사]](吉祥寺)에서 11년 동안 제자들에게 설법을 전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금강경]]》, 《[[육조단경]]》, 《[[화엄론]]》, 《[[대혜록]]》 등으로 가르치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cw}}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cw}}경절문(經截門)의 3종으로 수행을 이끌었는데, 믿음에 들어가는 자가 많았다.<ref name="글로벌-지눌"/> [[억보산]]의 [[백운정사]]{{.cw}}[[적취암]]과 [[서석산]]의 [[주봉란야]]{{.cw}}[[조월암]] 등은 다 지눌이 창건하고 왕래하며 수선(修禪)하였다.<ref name="글로벌-지눌"/> [[1204년]] [[고려 희종|희종]]이 즉위하여 송광산을 [[조계산]](曹溪山)으로 [[송광사|길상사]]를 수선사(修禪社)로 개명하고, 친히 제방(題榜)을 써서 보낸다.<ref name="글로벌-지눌"/> 또한 희종은 지눌에게 만수가사(滿繡袈裟)를 하사하고, 120일 동안 낙성법회를 열게 하였다.<ref name="두산백과"/> [[1210년]] [[4월 22일]] 승도를 소집하여 법복을 입고 당(堂)에 올라가 설법하다가 주장(柱杖)을 잡은 채 입적하였다. 희종은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와 감로(甘露)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ref name="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4074&cid=40942&categoryId=33382 지눌] 두산백과</ref> 저서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c}}《[[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c}}《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c}}《[[진심직설]](眞心直說)》{{.c}}《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c}}《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c}}《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c}}《[[염불요문]](念佛要門)》{{.c}}《[[수심결]](修心訣)》{{.c}}《육조혜능대사법보단경발(六祖慧能大師法寶壇經跋)》 등이 있으며, 《[[상당록]](上堂錄)》{{.c}}《법어가송(法語歌頌)》{{.c}}《선각명(禪覺銘)》 등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ref name="두산백과"/> 왕이 문신 [[김군수]](金君綬)에게 비문을 찬수케 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병화에 없어지고 귀부(龜趺)만 남은 것을 [[1678년]]([[조선 숙종]] 4년)에 [[백암]](栢菴){{.cw}}[[성총]](惺聰) 등이 중건하였다.<ref name="글로벌-지눌"/> == 사상 == [[파일:Portrait of Jinul.jpg|섬네일|오른쪽|190px|대구 [[동화사]] 소장 지눌의 다른 초상화]] 지눌은 1182년 [[선과]](禪科)에 합격하고 [[청원사]](淸願寺)에 이르러 [[혜능]](慧能)의 《[[6조단경]](六祖壇經)》에서 홀연히 [[깨침|깨치고]], [[이통현]](李通玄) 거사의 《[[화엄론]](華嚴論)》에서 선{{.cw}}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대혜]](大慧) 선사의 《[[대혜어록]](大慧語錄)》에서 최후의 의혹을 씻었다 한다.<ref name="글로벌-지눌2">[[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고려시대의 사상/고려시대의 불교사상#지눌|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고려시대의 사상 >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 지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이러한 [[깨침]]의 과정은 그의 독창적인 [[선사상]]의 토대가 되었다.<ref name="글로벌-지눌2"/> 지눌은 사람을 대할 때 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②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③ 경절문(經截門)의 3문으로 하였는데, 이 3문은 각각 자신의 [[깨침]]의 계기가 된 《[[6조단경]]》{{.c}}《[[화엄론]]》{{.c}}《[[대혜어록]]》에서 나온 것이다.<ref name="글로벌-지눌2"/> 지눌은 [[선 (불교)|선]]{{.cw}}[[교종|교]]의 배타성이 교리적으로 있을 수 없음을 논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강조하였는데, 돈오는 [[중생]]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여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문득 깨치는 것이고, 점수는 그렇게 깨쳤다 하더라도 [[번뇌]]는 쉽게 없어지지 않으므로 "[[정]]"과 "[[혜]]"를 꾸준히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ref name="글로벌-지눌2"/> 지눌이 주장한 성적등지문{{.cw}}원돈신해문{{.cw}}경절문의 3문 중에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은 [[돈오점수]]의 돈오(頓悟)와 그 내용이 같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은 점수(漸修)와 그 내용이 같다.<ref name="글로벌-지눌2"/> 그러나 이러한 [[돈오점수]]는 학문적인 해석("지해{{.cw}}知解")의 자취를 아직 가시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선 (불교)|선]]의 [[화두]]를 공부하<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제목=YouTube|언어=ko-KR|확인날짜=2021-11-24}}</ref>라는 것이 경절문(經截門)이다.<ref name="글로벌-지눌2"/> 지눌은 교(敎)의 입장에서 선(禪)을 포용하려 했던 [[의천]](義天)과는 달리, 선(禪)의 입장에서 교(敎)를 융합하려 했다. 그는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라는 선종의 교의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바로 불성(佛性)의 드러남이라는 화엄(華嚴) 사상의 성기설(性起說)이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보았다. 그는 “부처의 말씀은 교(敎)가 되고, 조사(祖師)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선(禪)이 되었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그 근원을 궁구(窮究)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만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켜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가”라며 선(禪)과 교(敎)가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였다.<ref name="두산백과"/> 수행에 있어서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여 선(禪)과 교(敎) 어느 하나에만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였다. 교(敎)만을 강조하는 것을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라고 비판하였고, 선(禪)만을 강조하는 것을 ‘헛되게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라고 비판하였다. 교학(敎學)은 이것저것 가리는 분별지(分別智)에 사로잡혀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깨달음을 알지 못해 굴하기 쉽고, 선학(禪學)은 밀의상전(密義相傳)이라 해서 자칫하면 헛되이 앉아 졸기만 하거나 약간의 깨달음을 얻더라도 그 깊고 얕음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교(敎)와 선(禪)을 따로 나누어 보지 말고, 부처와 조사의 말씀과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여 참선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가 필요하며, 계율의 실천 또한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ref name="두산백과"/> 지눌의 이러한 [[선사상]]의 체계는 조계(曹溪) [[혜능]]의 선 속에 [[화엄]]을 흡수한 것이었다.<ref name="글로벌-지눌2"/> 지눌의 [[조계선]](曹溪禪)이 이와 같이 독창적이었던 반면, 지눌 이전의 한국 선은 단지 중국 선의 연장에 불과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ref name="글로벌-지눌2"/> 오랫동안 지지되어 왔던 지눌의 종합적 접근 방식을 이단이라 비판한 이가 [[성철]]이다. 성철은 지눌의 돈오점수가 아닌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선종 수행의 관행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고운기-지눌"/> == 관련 문화재 == *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 지눌 진영]] - 보물 제1639호 *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 *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 같이 보기 == * [[의천]] * [[초발심자경문|계초심학인문]] == 각주 == <references /> == 참고 문헌 ==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분류=불교|제목=무인시대의 문화}} == 외부 링크 == {{위키인용집}}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0492&cid=59015&categoryId=59015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지눌] {{한국의 승려}} {{불교 둘러보기}} {{2001년-이 달의 문화 인물}} {{전거 통제}} {{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분류:지눌| ]] [[분류:1158년 출생]] [[분류:1210년 사망]] [[분류:12세기 한국 사람]] [[분류:13세기 한국 사람]] [[분류:고려의 선승]] [[분류:고려의 불학자]] [[분류:불교 종파의 개조]] [[분류:과거 급제자]] [[분류:서흥군 출신]]
지눌
문서로 돌아갑니다.
검색
검색
지눌 문서 원본 보기
새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