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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죽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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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angled mass of metal with a wing and landing gear wheel barely recognizable, on a snowy field
사고 이후 아침 당국에서 발견한 N3794N의 잔해
음악이 죽은 날

파일:The Day the Music Died.jpg
눈 덮인 들판에 날개와 착륙장치 바퀴가 희미하게 보이는 뒤엉킨 금속 잔해

개요
발생일시 1959년
발생유형 사고
발생원인 야간 악천후 속에서 통제력을 상실한 후 추락
발생원인 야간 악천후 속에서 통제력을 상실한 후 추락
총 사망자 4
총 생존자 0
첫번째 항공기
두번째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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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원 {{{두번째 항공기_승무원}}}
세번째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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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피해

음악이 죽은 날(The Day the Music Died)은 소형비행기가 아이오와주 클리어레이크 근교에 추락하여 버디 홀리, 리치 밸런스, J.P. "빅 바퍼" 리처드슨 3명의 음악인들과 파일럿 로저 피터슨 총 4명이 전원 사망한 사고가 일어난 1959년 2월 3일을 가리키는 통칭이다.[1][2]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두에 걸쳐 로큰롤의 스타들이 스캔들이나 징역이나 징병으로 잇따라 무대석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미국의 대중음악은 기세가 꺾여 영국의 음악인들이 미국에 상륙해오기(브리티시 인베이전) 전까지 스타 부재의 어두운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비행기 사고는 로큰롤 시대의 종말을 고한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음악이 죽은 날'이라는 통칭 자체는 돈 맥클린이 이 비극을 제재로 삼은 노래 〈American Pie〉에서 이 사건을 "음악이 죽은 날(The Day the Music Died)"라고 노래한 것에서부터 정착되었다.[3][4][5]

사고의 경위

당시 '윈터 댄스 파티'라고 이름지어진 3주간에 걸친 미국 중서부 24개 도시를 순회하는 투어의 계획이 세워졌다. 사정상 이 투어는 연속적으로 이동하는 일정이 되었다. 개최지간의 거리는 공연의 스케줄을 짠 이후로 그다지 문제로서 삼지 않아버렸다. 그러한 혼란에 더하여 그들이 이동에 사용한 버스도 현지의 기후에 대응하는 것이 못 되었고 투어가 시작하기 무섭게 버스의 에어컨(히터)이 망가져버렸다. 투어에 사용된 버스가 턱없이 부족하여 고장이 나고 자주 교체되었지만, 뮤지션들 전체가 한 버스를 타고 함께 이동했다. 그릭스는 투어의 첫 11일동안 다섯 대의 버스가 사용되었다고 추정하며 이 버스는 "학교 학생들에게 충분하지 않은 스쿨버스였다"라고 밝혔다. 뮤지션들은 각 정류장에서 장비를 싣고 내리는 일을 담당했으며, 이를 돕는 승무원들은 따로 없었다. 버스는 여러 지역에 허리 깊이의 눈이 내리고 온도가 -7°C에서 -38°C까지 변하는 온도에 견디지 못하고 고장나버렸다. 크리케츠의 드러머 칼 번치는 발에 심한 동상을 입어 그 지방의 병원에서 신세를 져야 했다.[6] 그가 요양중에 있을 때 버디 홀리와 리치 밸런스가 교대하여 드럼을 쳤다.

아이오와주 클리어레이크의 '서프 볼룸'은 투어의 개최지로서 입후보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정을 벌충하고자 한 프로모터가 서프 볼룸의 지배인 캐롤 앤더슨에 말을 걸어 제안을 해왔다. 지배인은 이 제안에 승낙하여 버디 홀리 일행은 출연일을 2월 2일 월요일로 설정했다.

필요한 이동량은 곧 심각한 문제를 불러왔다. 공연이 예정되어 있는 장소간의 거리가 고려되지 않았고, 투어는 여러 장소를 통해 중서부 지역을 체계적으로 순환하는 대신, 일부 투어 정류장 간의 거리가 400마일(640km)을 초과하는 등 불규칙하게 지역을 오갔다. 쉬는 날이 없었기 때문에 밴드들은 한겨울 영하의 온도에서 하루 대부분을 10시간에서 12시간을 이동해야 했고, 대부분의 주간고속도로 시스템은 아직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투어 정류장 간의 경로는 현대 고속도로보다 훨씬 좁은 2차선 시골 고속도로보다 좁은 2차선 시골 고속도로에서 더 많은 주행 시간을 요구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건 마치 지도에 다트를 던져 만든 것 같은 일정이었다. 이 투어는 정말이지 지옥이었다.

— 빌 그릭스, 음악 역사가이자, 버디 홀리 기념 협회의 창립자[7]

버디 홀리가 볼룸에 도착한 오후 무렵, 그는 투어용 버스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밴드 멤버에 이 쇼가 끝나면 비행기를 전세내어 다음 공연지 미네소타주 무어헤드에 가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8] 추가로 투어는 1959년 1월 23일 밀 워키에서 시작되었으며, 2월 2일 아이오와주 클리어 레이크에서 열린 공연은 24개의 행사 중 열한 번째 행사였다. 《비하인드 더 뮤직》에 따르면, 이때의 홀리는 청결한 셔츠, 양말, 속옷을 더 이상 입지 못하게 된 데에도 안달복달했다고 한다. 다음 공연이 있기 전에 어딘가에서 세탁을 하고자 했으나, 클리어레이크의 세탁소는 그 날 마침 영업을 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클리어 레이크는 원래 일정에 없었다. 투어 프로모터들은 오픈 날짜를 채우기를 원하여 지역 서프 볼룸의 매니저인 캐롤 앤더슨에게 전화를 걸어 공연을 제안했다. 앤더슨은 이를 수락하고 그날 밤 공연을 준비했다. 그날 저녁 홀리는 공연장에 도착했 을 때, 버스 문제로 좌절감을 느꼈다. 발렌스는 볼룸에서 공연장을 폐쇄한 후 매니저 밥 킨에게 전화를 걸어 투어의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 후 리치가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것이라는데 동의했다.“Narration of Ritchie Valens' Story as Told by Bob Keane, Producer and Manager of Ritchie Valens”. 《YouTube》. 2014년 11월 8.  클리어 레이크의 다음 예정된 목적지는 미네소타주 무어헤드로, 590km를 북서쪽으로 운전하며, 투어 계획의 저조한 품질을 반영하여 지난주에 이미 공연한 두 마을을 직접 돌아갔을 예정이었다. 그 다음날 아이오와에서 미네소타로 이동한 후, 아이오와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며 특히 남쪽으로 520km를 이동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서 홀리는 비행기를 전세내어 자신과 밴드를 데리고 노스다코타주의 무어헤드 근처에 있는 파고로 향했다. 나머지 일행은 무어헤드에서 탑승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이동할 시간을 절약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무어헤드에서 열린 그들의 공연은 디스크 자키와 함께 KFGO에서 라디오 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비행기의 정비를 맡은 사람은 21세 파일럿 로저 피터슨(Roger Peterson)이었다. 그는 아이오와주 메이슨시티의 드와이어 프라잉 서비스에 근무하고 있던 현지의 주민이었다. 로저는 1인당 36달러의 요금을 받고 음악인들을 소형단발기 보난자(1947년제, 모델 35)에 탑승시켰다. 보난자는 파일럿의 자리를 제외하면 3인분의 자리밖에 없었다.

리처드슨은 투어 와중에 감기가 악화되어 있었으므로 홀리의 밴드 멤버였던 웨일런 제닝스에 자리를 양보해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여 제닝스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5] 그가 비행기에 타지 않게 되었음을 알게 된 홀리는 "그럼, 나는 자네의 털털이 버스가 꽁꽁 얼어붙어버기를 기도하겠네!"라고 농담을 던졌다. 제닝스 역시 농담으로 "그럼, 나는 자네의 털털이 비행기가 추락해버리기를 기도하겠네!"라고 맞받아쳤다. 그 후 이 농담삼아 한 말이 제닝스를 평생 괴롭게 하게 되었다.[9][10] 그때까지 소형비행기에 탑승한 적이 없었던 리치 밸런스도 또 한 명의 밴드 멤버였던 토미 올섭에 자리를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토미는 "마지막 좌석은 동전에 달렸어."라고 맞받아쳤다. 전기영화의 한 씬에서와는 다르게, 이륙직전의 공항에서 코인 토스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버디 홀리가 토스를 한 것도 아니었다. DJ 밥 헤일이 공항을 떠나기 직전 음악인들의 앞에서 코인을 던졌다. 결과는 밸런스의 승리였다.[9]

투어에 참가한 디온 & 더 벨몬즈의 디온 디무치도 비행기에 오를 것을 제안받았다고 하는데, 언제 제안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36달러라는 비행료는 디온이 부모로부터 아파트 요금으로 달달이 받아오던 금액과 같았던지라 그런 달콤한 말에 순순히 따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1]

항공편 준비

앤더슨은 메이슨 시티의 드와이어 플라잉 서비스에서 비행기를 전세내어 무어헤드 (미네소타주)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인 파고의 헥터 국제 공항으로 비행했다. 조종사는 비행에 아주 능숙한 21세 기혼 남성 로저 피터슨이었다.

드와이어 플라잉 서비스는 1947년 단기관 V-테일 비치크래프트 보난자(등록번호 N3794N)의 비행에 대해 승객 1인당 36달러(2024년 기준 390달러 상당)의 요금을 부과했다. 이 항공기는 승객 3명과 조종사 1명을 태웠다. 돈 맥린의 추락에 관한 노래에서 비롯된 대중적인 오해 중 하나는 비행기의 이름이 American Pie (음반)(American Pie)였다는 것이다. N3794N에 이름이 부여된 적 없다는 기록이 존재한다.[12]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의 진실은 리처드슨이 투어 중 독감에 걸려 제닝스에게 비행기 좌석을 요청했다는 것이다.[13] 비행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발렌스는 올섭에게 비행기 안쪽 좌석을 요청했고, 두 사람은 동전 던지기로 좌석을 정하였다. 이후 메이슨 시티의 KRIB-AM에서 디스크자키로 활동하던 밥 헤일은 그날 밤 콘서트를 주최하던 중 뮤지션들이 공항으로 떠나기 직전 콘서트장 옆 대기실에서 동전을 던졌다. 발렌스는 동전던지기에서 승리했고 발렌스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올섭과 제닝스의 증언과는 달리, 디온은 이후 홀리가 홀리의 밴드 동료가 아닌 발렌스와 리처드슨과 함께 비행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다고 말했다. 2009년 인터뷰에서 디온은 홀리는 자신과 발렌스, 리처드슨을 사르도의 공연 중 빈 탈의실로 불러들이며 "비행기를 전세냈지만. 돈을 벌고 있는 건 바로 우리야. 그리고 유일한 문제는 좌석이 두 개 뿐이야."라고 말했던 것을 전했다. 디온에 따르면 병에 걸린 사람은 리처드슨이 아니라 발렌스였기 때문에 발렌스와 디온은 동전을 던져 자리를 차지했다. 인터뷰에서 제닝스나 올섭이 비행기에 초대된 것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디온은 자신이 던졌다고 말했지만, 결국 36달러의 요금이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지출하던 아파트 월세와 같았기 때문에 그 방종을 정당화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14]

추락

중부표준시로 오전 0시 55분경 비행기는 이륙하였다. 정확히 오전 1시를 지나 커머셜 파일럿이자 해당 비행기의 주인이던 휴버트 드와이어(Hubert Dwyer)는 관제탑의 덱에서 "꼬리날개가 차츰 내려가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진 비행기"를 목격했다.

피터슨은 출발하고 나서 항공관제센터와 무선으로 플라이트 플랜을 계속하겠노라 드와이어에 말했다. 그러나 피터슨은 관제관을 호출하지 않았고 드와이어는 관제관에 무선으로 교신을 계속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몇 번을 해도 헛수고였다.[15]

오전 3시 30분이 되어도 노스다코타주 파고헥터 국제공항에는 피터슨으로부터의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으며, 드와이어는 당국에 비행기의 행방불명을 보고했다.

오전 9시 15분경 드와이어는 다른 소형비행기를 사용하여 피터슨이 예정한 항로로 날아올라 공항에서 북서로 8km 지점에 해당하는 곳에 있던 옥수수밭에서 산산조각이 난 잔해를 발견했다.

보난자는 겨우겨우 우측으로 기울어 있었으며 그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약 270km/h로 지면과 충돌한 것이었다. 추락한 기체는 얼어붙은 지면을 170m나 미끄러져갔다. 그리고 농장주 소유의 팬스에 격돌하여 첩첩이 포개져 하나의 쇳덩이가 되어버렸다.

조사

홀리와 밸런스의 시신은 그 근처에 있었으며, 리처드슨의 시신은 팬스를 넘어 이웃한 옥수수밭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피터슨은 기체에 엉겨붙어 있었다.[15] 당일 앤더슨은 일행을 공항까지 전송하고 이륙하는 모습도 보고 있었다. 시신이 본인임을 확인한 것도 그였다.

군의 검시관 랄프 스마일리는 4명의 뇌에 대한 강한 쇼크로 인하여 즉사했다고 진술했다. 홀리의 사체에서는 분명히 추락의 충격으로 인하여 죽었음을 나타내는 몇 가지의 부상이 확인되었다.

찰스 H. 홀리의 시신은 모조가죽 황색 재킷을 감싸고 있었으나, 잔등에 있는 4개의 솔기는 거의 완전히 찢어져 있었다. 두개골은 이마의 중앙 부근에서 찢어져 정수리까지 도달하여 뇌조직의 절반이 결손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두 귀에서 출혈이 있으며, 안면에는 복수의 열상이 있다. 추락에 의해 골격에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흉부는 경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 두 발은 복잡골절을 입었다.[16]

조사관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이 추락은 악천후와 파일럿의 실수가 겹쳐 발생한 것이었다. 피터슨은 제도적으로는 아직 계기류의 훈련을 받고 있던 도중이었으며, 악천후를 뚫고 날아갈 역량이 의문시되던 단계였다. 즉 베테랑에 의지하지 않고 게다가 육안이 아닌 계기를 확인하면서 비행하는 것이 요구되던 상황에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민간항공위원회의 최종보고에서는 "피터슨은 비행기에 비치하는 수평자세지시기의 훈련 와중이었으며, 보난자에 탑재된 스페리 자이로콤퍼스는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며, 이것은 비행기의 피치 자세를 표시하는 계기는 두 개가 있었으며, 각각 정반대의 표시방법을 채용하고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으며, 위원회는 피터슨이 실제로는 기체가 하강하고 있었음에도 상승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했다.

공식 조사에 따르면, 조종사 로저 피터슨은 드와이어 플라잉 서비스 소속으로 약 4년간의 비행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총 711시간의 비행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비치크래프트 보난자 기종에서의 비행 시간은 128시간이었다. 피터슨은 계기비행(IFR)에 관한 훈련을 일부 이수하고 필기 시험에는 합격했으나, 실기 시험은 통과하지 못해 계기비행 자격을 공식적으로 취득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피터슨과 드와이어 플라잉 서비스는 모두 시계비행규정(VFR) 하에서만 운항이 허가되어 있었으며, 이는 조종사가 육안으로 지평선과 지형을 확인할 수 있는 기상 조건에서만 비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고 당시에는 야간에 저층 구름이 형성되어 있었고, 지상 조명이 거의 없는 지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시계비행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사고기에 탑재된 스페리 F3 자세자이로는 일반적인 인공수평계와는 달리 항공기의 피치 자세를 반대 방향으로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피터슨은 기존 훈련에서 일반적인 표시 방식을 사용하는 계기를 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이륙 직후 해당 계기의 표시를 오인하여 실제로는 하강 중이었음에도 상승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조사 보고서는 이와 함께, 피터슨이 출발 전 제공받은 야간 기상 브리핑이 예정 항로 상의 악천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점도 사고의 한 요인으로 지적했다. 민간항공위원회는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조종사가 자신의 자격과 기상 조건을 고려할 때 무리한 판단을 내렸다고 결론지었다.

피터슨은 루트상의 악천후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만일 그가 자신의 역량을 자각하고 있었다면 비행을 연기했을 것이다.[15]

재조사

2007년 리처드슨의 아들이 아버지의 검사결과에 대하여 재조사를 행하였다. 이것은 추락에서 2개월 후에 옥수수밭에서 홀리의 22구경 권총이 발견되었다는 유명한 일화에도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재조사는 우연히 총이 폭발한 탓에 추락이 일어난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리처드슨의 시신이 현장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잔해로부터 걸어서 빠져나왔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윌리엄 M. 버스는 절차를 밟아 스마일리의 보고서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리처드슨의 시신은 보존상태가 무척 양호했으나 "심한 골절"로 인하여 추락의 충격으로 절명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17][18]

추모 및 유산

1950년대를 사랑하는 위스콘신주의 남성 켄 패킷은 1988년 철로 된 기타를 본뜬 스테인리스 모뉴먼트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음악인 3인의 이름을 새겨넣은 각자의 레코드도 모티브로 삼고 있다.[19] 이 모뉴먼트는 클리어레이크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한 농원에 배치되어 있다. 추락현장의 입구에는 뿔테안경을 쓴 포스트사인이 존재한다. 또한 패킷은 음악인 3인에 바치는 스테인리스 모뉴먼트를 위스콘신주 그린베이의 리버사이드 볼룸에도 만들어놓았다. 그곳은 버디 홀리, 리치 밸런스, 빅 바퍼 3인이 1959년 2월 1일 밤 연주를 베푼 장소이다. 2003년 6월 17일에는 두 번째 기념비의 제막식이 있었다.[20] 2009년 2월에는 패킷에 의해 피터슨을 추도하는 새로운 모뉴먼트가 추락현장에 설치되었다.[21]

정책

마리아 엘레나 홀리는 남편 버디 홀리의 사망 소식을 텔레비전 뉴스 보도를 통해 처음 접했으며, 이로 인한 심리적 충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을 겪었다. 이 사건 이후 수개월에 걸쳐, 미국 당국과 언론계에서는 사망자의 가족에게 통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사망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점차 확립되었다.[22]

추모

로저 피터슨을 위한 추도 예배는 1959년 2월 5일 아이오와주 벤투라에 위치한 리디머 루터교회에서 열렸다. 장례식은 다음 날 그의 고향인 아이오와주 알타의 세인트 폴 루터교회에서 거행되었으며, 피터슨은 인근 스톰레이크에 위치한 부에나 비스타 메모리얼 묘지에 안장되었다.[23]

영화

이 사고는 전기 영화 《버디 홀리 스토리》(1978)의 결말을 장식한다. 영화는 클리어 레이크 공연이 끝나는 장면에서 마무리되며, 정지 화면과 함께 “그날 밤, 그들은 사망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로큰롤의 역사다(…and the rest is Rock ’N’ Roll)”라는 자막이 삽입된다.

사고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 여파는 리치 발렌스의 전기 영화 《라 밤바》(1987)에서도 묘사된다. 이 영화에서는 사고 장면 자체는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발렌스의 가족과 가까운 인물들이 겪는 충격과 슬픔이 중심적으로 다루어진다.

추모 콘서트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J. P. 리처드슨을 기리는 연례 추모 콘서트는 1979년부터 아이오와주 클리어 레이크의 서프 볼룸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24]

2009년 2월 2일에는 사고 5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추모 콘서트가 열렸으며, 델버트 맥클린턴, 조 일리, 완다 잭슨, 로스 로보스, 크리스 몬테즈, 바비 비, 그레이엄 내시, 피터 앤 고든, 토미 올섭 등이 참여했다. 하우스 밴드에는 척 리벨, 제임스 “허치” 허친슨, 바비 키스, 케니 애러노프가 함께했다. 빅 보퍼의 아들인 제이 페리 리처드슨 역시 출연했으며, 사회는 1959년 공연 당시와 마찬가지로 밥 헤일이 맡았다.[25]버디 홀리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Buddy: The Buddy Holly Story》에서 홀리 역을 맡았던 존 뮬러는, “윈터 댄스 파티 투어”라는 이름의 헌정 공연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 공연은 당시 투어를 재현한 라이브 공연으로,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J. P. 리처드슨의 유족들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26]

버디 홀리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Buddy: The Buddy Holly Story》에서 홀리 역을 맡았던 존 뮬러는, “윈터 댄스 파티 투어”라는 이름의 헌정 공연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 공연은 당시 투어를 재현한 라이브 공연으로,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J. P. 리처드슨의 유족들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27]


각주

  1. “Celebrity Crashes”. check-six.com. 2011년 7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0월 24일에 확인함. 
  2. 같은 날 뉴욕에서 아메리칸 항공 320편 추락 사고가 발생했으며, 캐나다 뉴펀들랜드 인근에서는 팬암 항공 115편이 추락 직전까지 가는 사고를 겪었다. 이로 인해 당시 일부 신문에서는 클리어레이크 사고가 1면에서 밀려났다.
  3. “1959: Buddy Holly killed in air crash”. 《On This Day》 (London: BBC). February 3, 1959. 2008年11月2日에 확인함. 
  4. Thimou, Theodore (2006년 12월 28일). “Preview: The Twice-Famous Don McLean Plays Rams Head”. 《Bay Weekly》. 2008년 6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9월 11일에 확인함. 
  5. “回想:“The Day The Music Died(音楽が死んだ日)””. 《BARKS》. 2002.2.4. 2022년 2월 4일에 확인함. 
  6. “Most Frequently Asked Questions...”. BuddyHollyOnline.com. 2010年10月21日에 확인함. 
  7. Huey, Pamela (2009년 2월 3일). “Buddy Holly: The tour from hell”. 《Star Tribune》. 2020년 8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8. Miller, Rob (2021년 2월 3일). “バディ・ホリーが亡くなった日:“音楽が死んだ日”と呼ばれた飛行機事故の悲劇”. 《uDiscoverMusic | 洋楽についての音楽サイト》. 2022년 2월 4일에 확인함. 
  9. VH1's Behind the Music "The Day the Music Died" interview with Waylon Jennings
  10. “Waylon’s Buddy: Jennings Never Forgot His Mentor”. CMT. 2010年10月21日에 확인함. 
  11. DiMucci, Dion: "The Wanderer", page 89. Beech Tree Books, 1988
  12. "American Pie". Snopes.com. March 13, 2000.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March 22, 2021. Retrieved April 16, 2015.”. 
  13. “Beyond the Dash. January 25, 2021.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February 10, 2024. Retrieved March 15, 2021.”. 
  14. DiMucci, Dion (1988). 《The Wanderer》. Beech Tree Books. 89쪽. 
  15. Civil Aeronautics Board (1959년 9월 23일). “Aircraft Accident Report” (PDF). NTSB. 2009년 2월 4일에 확인함. 
  16. Ralph E. Smiley, M.D. “Death Certificate language”. Fiftiesweb. 2009년 1월 30일에 확인함. 
  17. Bill Griggs. “Big Bopper Exhumation”. 2009년 1월 30일에 확인함. 
  18. “Autopsy of 'Big Bopper' to Address Rumors About 1959 Plane Crash”. Washington Post. 2007년 1월 18일. 
  19. Scott Michaels. “The Death of Buddy Holly”. Findadeath. 2009년 1월 30일에 확인함.  (画像有)
  20. Jennifer Jordan (2007년 4월 11일). “The Day the Music Died”. Articles Tree. 2009년 1월 30일에 확인함. 
  21. Jordan, Jennifer (2009년 2월 2일). “Memorial to Buddy Holly pilot dedicated at crash site”. 《Des Moines Register》. 2009년 4월 14일에 확인함. 
  22. Suddath, Claire (2009년 2월 3일). “The Day the Music Died”. 《Time》. 2009년 2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4월 29일에 확인함. 
  23. Suddath, Claire (2009년 2월 3일). “The Day the Music Died”. 《Time》. 2009년 2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4월 29일에 확인함. 
  24. Suddath, Claire (2009년 2월 3일). “The Day the Music Died”. 《Time》. 2009년 2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4월 29일에 확인함. 
  25. DiMucci, Dion (1988). 《The Wanderer》. Beech Tree Books. 89쪽. 
  26. Suddath, Claire (2009년 2월 3일). “The Day the Music Died”. 《Time》. 2009년 2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4월 29일에 확인함. 
  27. Suddath, Claire (2009년 2월 3일). “The Day the Music Died”. 《Time》. 2009년 2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4월 29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