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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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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융
李基隆
본명이기융
로마자 표기Lee Gi-ryung
출생1667년 8월 5일
조선 경상북도 순흥군(현, 봉화군)
사망1751년 9월 5일
성별모듈:Wikidata 622번째 줄에서 Lua 오류: attempt to index field 'wikibase' (a nil value).
국적조선
별칭자(字)는 태래(泰來), 호는 신촌(新材)
경력승문원 사자관, 행 용양위부호군
직업문신, 유학자, 시인

이기융(李基隆, 1667년 8월 5일 ~ 1751년 9월 5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유학자이자 시인이다. 자(字)는 태래(泰來), 호는 신촌(新材),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경사, 예학에 통달했고 승문원 사자관, 통정대부 행용양위부호군, 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봉화군 출신이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순흥향교의 행사에 자주 참석했다. 한때 1732년(영조 8) 8월 27일 승문원의 추천으로 승문원 사자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금성대군 유가 순절한 자리에 세워진 금성단(금성대군 신단) 재건 복원운동에 참여했으며, 순흥부사 이명희(李命熙) 등과 이를 주도했다. 그는 소백산을 유람하며 몇 편의 시를 남겼다.

생애

1667년 8월 5일순흥군 대평면 읍내리 출신으로, 생부는 이약(李爚)인데, 숙부 이효(李熇)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도촌 이수형의 7대손이고, 관상감주부, 사헌부감찰을 역임한 이대근의 6대손이며, 취사 이여빈의 재종증손이다. 6대조 이대근은 순흥부 청달리를 지날 때마다 말이 비껴가는 곳이 있어, 이상하게 여기고 주변을 조사하다가 꿈에 금성대군을 만나고 금성대군 신단 금성단을 쌓고 봉향하였다.뒤늦게

1688년(숙종 14)부터 그는 순흥향교의 춘추 제례에 집사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1688년(숙종 14) 2월 순흥향교 제전에 사생(司牲), 진설(陳設), 찬인(賛引)으로 참여했다.[1] 1690년 8월 9일 봉작(奉爵)[1], 1691년 2월 1일 알자(謁者)로 참여했다.[1] 1719년 8월 5일 존작(奠爵),[2]

1703년 2월 2일 존작(奠爵)[2] , 8월 4일 봉작(奉爵), 11월 16일 존작, 1704년 2월 7일 대축(大祝), 8월 10일 봉작, 진설(陳設)[2], 1706년 8월 2일 존작, 1707년 2월 4일 사존(司尊), 진설[2], 1717년 2월 2일 사존(司尊), 8월 5일 고유제(告由祭)의 봉작(奉爵)으로 참여했다.[2]

그는 일찍이 경사(經史)에 통달(通達)하고 예학(禮學), 천문(天文), 역학(曆學)에 두루 능통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또한 시를 몇 수 남겼다. 그는 안동 지역 유림 대표로 순흥부사 이명희와 함께 조정에 금성대군이 처형된 곳에 금성단 재건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윤허를 받았다. 그리고 그 유허지에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을 모신 단을 세워 단종에 대한 충절을 기념하였다.

1719년(숙종 45) 8월 16일 제월교(霽月橋)를 지나게 되었는데 다리 옆 황폐한 밭 들풀 틈에 허물어진 담장을 보고 둘러본 결과 금성대군이 안치되었던 곳임을 확인했다. 그는 금성대군이 안치되었던 곳이 백 년 동안 잡초 속에 묻힌 것을 보고 순흥부사 이명희에게 보고하여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3] 여지도서 순흥부편, 묘단 조에 의하면 순흥부청 북쪽 3리 영구봉 서쪽에 소재하며(在府北三里靈龜峯西)[4], 제단은 3개를 쌓았는데, 상단은 금성대군단, 좌단은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 우측 단은 동시에 순절한 의사들의 단이며, 매년 제사를 시행한다(府使李命煕與邑人李基隆就其栫棘遺墟築三壇, 上壇祭大君, 左祭李甫欽, 右祭同時殉義士, 歲以爲式)고 한다.[4]

1719년 6월 15일 순흥향교 제례의 봉작, 척기(滌器), 진설[5], 1717년? 8월 6일 행제(行祭)의 봉작[5], 1721년 석존제집사(釋奠祭執事) 봉로(奉爐)로 참여했다.[5]

1732년(영조 8) 8월 27일 승문원의 추천으로 승문원 사자관에 임명되었다.[6] 1747년(영조 23) 노인직으로 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에 올랐으며, 순흥 재향지에 의하면 그의 최종 직책은 호군이다.

그는 소백산을 유람하며 소백산을 유람하다(遊小白山), 석륜대에서 기우제를 올릴 때 신재 주세붕 선생의 시에 차운(石崙臺祈雨時次周愼齋先生韻), 성혈사에서 재중 황재의 시에 차운하다(聖穴寺次黃宰仲榟韻), 성혈사에서 여러 벗의 유산시에 차운(聖穴寺次諸友遊山韻), 초암사를 유람하다(遊草庵寺), 초암사를 유람하고 감회를 읊다(遊草菴寺感吟), 성혈사에서 연수 스님의 시에 차운하다(聖穴寺贈延壽上人), 또 연수 스님의 시에 차운하다(又次上人韻) 등의 시를 지었다. 이는 2013년 영주문화유산보존회 편, 《소백산 02 : 국립공원 소백산 유산록 및 시문 조사 발굴 사업》에 수록되었다.

85세로 장수하여 재향지 순흥지 장수(壽耈) 편에도 수록됐다.[7] 1751년 9월 5일에 사망했다.

사후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九邱里) 배나무실 부락(이목고자동(梨木高子洞) 부락) 유좌(酉坐)에 있다. 후대에 정산 김동진(貞山 金東鎭)이 행장을 찬했다.

그의 묘소 근처에는 그의 11대조모이며 퇴은 이의(李嶷 또는 李薿)의 부인 순흥안씨 묘소가 있다.

저작

가족 관계

  • 생부 : 이약(李爚, 1638년 ~ 1693년 3월 14일)
  • 전모 : 전주류씨(全州柳氏), 진사(進士) 류형립(柳亨立)의 딸
  • 생모 : 한양조씨(漢陽趙氏, ? ~ ?년 12월 9일) 조상(趙相)의 딸
  • 양부이자 삼촌 : 이효(李熇, 1644년 ~ 1713년 5월 1일)
  • 양모이자 숙모 : 영천이씨(永川李氏, ? ~ ?년 3월 3일), 이장국(李章國)의 딸, 조부 호군 호 수락당(號壽樂堂) 영원(榮遠), 증조 찰방 호 행옹(號杏翁) 래(莢),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후
  • 부인 : 전주류씨(全州柳氏), 충의위(忠義衛) 이암(李淹)의 딸
    • 아들 : 이광석(李光錫)
    • 사위 : 이태수(李台壽), 완산인(完山人)
    • 아들 : 이석종(李錫宗), 당숙 이중광(李重光)의 양자로 출계

같이 보기

관련 서적

  • 영주문화유산보존회 편, 《소백산 02 : 국립공원 소백산 유산록 및 시문 조사 발굴 사업》 (영주문화유산보존회 편, 강구율 김덕환 정상홍 외 번역, 2013)

참고 문헌

  • 《재향지 (梓鄕誌)》 순흥지
  • 《여지도서》순흥부 편

외부 링크

각주

  1. 1685년부터 1691년까지 순흥향교(順興鄕校) 집사안(執事案)
  2. 1702년부터 1717년까지 순흥향교(順興鄕校) 집사안(執事案)
  3. 금성단(錦城壇), 《순흥지》 사묘(祠廟)편
  4. 壇廟, 《여지도서(輿地圖書)》慶尙道 / 順興府
  5. 1717년부터 1724년까지 순흥향교(順興鄕校) 집사안(執事案)
  6. 국역 승정원일기 영조 8년 임자(1732) 8월 27일(신사) 맑음 08-08-27[36], "사자관의 후임으로 안국민 등을 실직으로 올려 군직에 붙일 것 등을 청하는 승문원 도제조의 계"
  7. 《순흥지》 장수(壽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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