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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다이 타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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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다이 타츠야
仲代 達矢
본명나카다이 모토히사
출생1932년 12월 13일(1932-12-13)
일본 도쿄도
사망2025년 11월 11일(2025-11-11)(92세)
국적일본
직업배우
활동 기간1954년 ~ 2025년
배우자미야자키 야스코 (1957년 결혼, 1996년 사별)
자녀양녀 나카다이 나오

나카다이 타츠야(仲代 達矢 (なかだい たつや), 본명나카다이 모토히사 ; 仲代 元久 (なかだい もとひさ), 1932년 12월 13일 ~ 2025년 11월 11일)는 일본배우, 연출가, 가수, 내레이터, 성우이다.

도쿄도 메구로구 출신으로, 배우좌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연기 학교 무메이쥭(無名塾)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업계에서는 오랜 기간 모야(モヤ)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그는 극단 배우좌 출신으로, 연극·영화·텔레비전 드라마 등 다양한 무대에서 꾸준히 활동해 왔다. 영화전성기부터 쇠퇴기 이후까지 일본 영화계를 지탱해 온 대표적 배우로 평가된다.

생애

생애 초기

그는 1932년 도쿄부 도쿄시 메구로구(現 도쿄도 메구로구)에서 태어났으며, 네 형제 중 맏이였다. 아버지는 이바라키현 이나시키군 나가사오촌(현재의 가와치마치 나가사오)에 있는 부농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이바라키현립 에도사키 농학교를 졸업한 뒤 한동안 치바교통(현: 게이세이 버스)의 버스 운전사로 일했다. 이후 도쿄로 옮겨와 외제차를 구입해 하이어(고급 택시) 사업을 운영했다.

아버지의 직장이 바뀌면서 가족은 치바현 나리시노시 쓰다누마로 이주했지만, 얼마 뒤 다시 도쿄도 세타가야구 세타로 이사했고, 그는 요가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8세 때 아버지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아카사카(현: 도쿄도 미나토구) 아오야마 일대의 변호사 사무실에 숙식하며 일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살던 그는 아오야마 미나미마치의 세이난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전쟁 중에는 어머니를 아오야마에 남겨둔 채 조후시 센가와에 있는 다이지산 에이큐인 쇼오지로 피난을 갔으며, 그 생활에 대해 훗날 자주 불만을 말하곤 했다. 이후 근처 마을인 세타가야구 지토세카라스야마로 옮겨 살았다.

1945년(쇼와 20년), 그는 도쿄도립 기타토시마 공업학교에 입학했으나 잦은 공습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대신 도쿄도립 중기공업학교를 졸업했다. 종전 후에는 학제 개편이 이루어졌고, 그는 경마장의 매표소 직원, 파친코 가게 직원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결국 도쿄도립 지토세고등학교 야간 과정을 졸업했다.

배우를 향한 길

1955년 9월 16일부터 9월 28일까지, 배우좌극장에서 공연된 〈유령〉에서 그는 오스왈드 역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무대 사진에는 왼쪽부터 아키요시 미츠카, 히가시야마 치에코, 그리고 그가 함께 서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우연히 관람한 배우좌 공연에서 센다 고레야의 연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계기로 1952년(쇼와 27년), 배우좌 양성소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하며 제4기생으로 입소하게 된다. 당시 시험 응시료는 경마장 아르바이트 시절 알게 된 한 사람이 대신 내주었다고 한다. 이 인물은 그에게 "배우가 되어보라"고 진심으로 권유한 사람이었다.

동기생으로는 우쓰이 켄, 사토 케이, 사토 마코토, 나카야 이치로 등이 있었으며, 이 중 사토 마코토·그·나카야 이치로 세 사람은 훗날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 작품의 단골로 출연하여, '키하치 패밀리'로 불리게 된다.

동기 중 우쓰이 켄은 신도호 영화사에 입사하면서 자연스레 작업에서 만날 기회는 적었지만, 두 사람은 성격은 달랐어도 오랜 친구로 지냈다. 또한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서는 함께 로닌 역할로 엑스트라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바(bar)에서 일하며 연기 수업을 이어갔지만, 생활은 여전히 궁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가 되고자 하는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영화 데뷔

그는 배우좌 양성소 재학 중이던 1954년 〈7인의 사무라이〉에서 대사 없는 낭인(浪人) 역할로 영화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양성소에서 단기 아르바이트처럼 보내진 몇 초짜리 엑스트라 출연이었지만, 이 경험은 그에게 잊기 힘든 기억으로 남았다. 당시 그는 시대극 특유의 걷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걷는 게 이상하다”고 호된 지적을 받았다. 결국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반나절을 들여 단 한 컷을 찍는 고된 촬영을 겪었고, 마지막에야 겨우 “좋아, OK”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1955년(쇼와 30년), 그는 양성소를 졸업하고(전년도 이미 첫 무대 데뷔), 준극단원 자격으로 배우좌에 입단했다. 같은 해 9월, 배우좌 공연 〈유령〉에서 오스왈드 역으로 발탁되며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공연을 본 배우 츠키오카 유메지가 영화감독 이노우에 우메지에게 그를 추천했고, 그 인연으로 1956년 닛카쓰 영화 〈불사조〉에서 츠키오카의 상대역이라는 큰 배역을 맡게 되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영화계에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에도 그의 출연작은 이어졌다. 타니구치 센키치 감독의 〈맨발의 청춘〉에서는 준주연으로 기용되었고, 치바 야스지 감독의 〈오오반〉, 그리고 1957년의 〈검은 강〉에서는 냉혹한 야쿠자 ‘인베기 조(人斬りジョー)’를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연기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57년(쇼와 32년)에는 배우좌 소속의 배우이자 훗날 연출가·각본가로 전향한 미야자키 쿄코와 결혼했다. 1958년에는 이치카와 곤의 영화 〈염상(炎上)〉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기반을 더욱 다져갔다.

주연 배우로 도약

파일:Kinema-Junpo-1960-January-late-1.jpg
젊은 시절

그는 메이저 영화사 다섯 곳으로부터 전속 계약을 제안받았으나, 무대에 대한 애정과 자유로운 활동을 원해 어느 회사와도 계약하지 않았다. 이 선택 덕분에 당시 영화계를 제한하던 ‘오사 협정’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총 6부작, 전체 상영 시간 9시간 31분에 이르는 대작 〈인간의 조건〉에서 그는 주인공 가지 역을 맡았다. 작품 속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감독 고바야시 마사키를 깊이 감동시켰고, 고바야시는 그를 “천재”라고 극찬했다. 이후 그는 〈할복〉을 비롯한 고바야시 감독의 주요 작품들에 연이어 기용되었고, 결국 고바야시가 연출한 13편의 영화에 참여한 대표 배우가 되었다.

한편 도호에서는 그가 미후네 도시로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배우로 평가받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요진보〉(1961) 출연을 요청했으나, 그는 과거 〈7인의 사무라이〉 촬영 당시 반복된 NG 경험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했다. 〈악한 자 잘 잔다〉 역시 일정 문제를 이유로 출연을 고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구로사와 감독이 직접 불러 설득하면서 그는 결국 출연을 결정했고, 이후 〈츠바키 산주로〉(1962), 〈천국과 지옥〉(1963)에도 이어서 출연했다.

그는 이외에도 〈열쇠〉(1959), 〈할복〉(1962), 〈괴담〉(1964), 〈상의〉(1967) 등에 출연하며 폭넓은 연기 폭을 보여주었다. 1968년에는 이탈리아 영화 〈야수는 새벽에 죽는다〉에서 멕시코 인디언 혈통을 가진 미국인 악역을 연기하며 해외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1960년대 그는 쇠퇴기에 접어든 일본 영화계를 떠받치는 새로운 세대의 중심 배우로 인정받았고, 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배우좌의 간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기, 그는 영화와 연극 양쪽에서 확고한 위치를 가진 '전성기 배우'로 성장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1970년대 그는 야마자키 도요코 원작, 야마모토 사쓰오 감독의 정재계 드라마 영화 〈화려한 일족〉(1974)에서 준주연으로 두 역할을 동시에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같은 원작·감독의 영화 〈불모지대〉(1976)에서는 주연을 맡아 작품의 중심을 이끌었다. 이보다 앞서 제작된 〈하얀 거탑〉(1966)에서도 출연 제안을 받았지만, 당시 맡고 있던 무대 공연 일정과 겹쳐 아쉽게 참여하지 못했다.

영화 배우로서는 줄곧 프리랜서로 활동했음에도 도호 작품에 자주 출연해, 1978년 일본 북 라이브러리가 편찬한 화보집 《전후 일본영화 황금시대》에서는 '도호의 주역'을 대표하는 배우로 소개되었다.

1980년,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에서 큰 전환점을 맞는다. 원래 주연이었던 가쓰 신타로가 감독과의 갈등으로 하차하면서, 그는 갑작스레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이 작품은 그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팔름도르)을 수상하며 그의 커리어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203 고지〉에서도 주연을 맡아 노기 마레스케를 연기했다.

TV 드라마에서도 그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1972년 NHK 대하드라마 〈신 헤이케 이야기〉에서 그는 헤이케의 중심 인물,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연기했으며, 후반부 기요모리가 출가하는 장면을 위해 실제로 삭발하기도 했다. 그 뒤로도 대하드라마 출연은 이어져, 1996년 〈히데요시〉에서 센노 리큐, 2007년 〈풍림화산〉에서는 무사 무가의 핵심 인물 다케다 노부토라를 맡아 존재감을 드러냈다.

현대극에서도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NHK대지의 아이〉에서는 중국에 남겨진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고 살아오던 아버지가, 수십 년 만에 그 아들을 다시 마주하는 복잡한 감정과 고독을 깊이 있게 표현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시대극과 현대극을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말년

2010년, 오랜만에 주연을 맡은 영화 〈봄과의 여행〉이 공개되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일본영화비평가대상 다이아몬드대상·오기 마사히로상, 이탈리아 Reggio Emilia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여전히 뛰어난 연기력을 증명했다. 그해는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으로, 그는 잡지 문예춘추 7월호에서 배우 카가와 교코와 특별 대담을 갖기도 했다.

2015년에는 문화훈장을 받았고, 같은 해 두 편의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연기를 이어가 2017년에는 주연작 〈바닷가의 리아〉가 공개되었다.

2020년 86세의 나이로 다시 주연을 맡은 영화 〈귀향〉이 개봉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어쩌면 이 영화가 내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기며, 긴 배우 인생을 돌아보는 듯한 소회를 밝혔다.

2025년 5월 30일부터 6월 22일까지 이시카와현 나나오시에 있는 노토 연극당에서 열린 노토반도 지진 복구 공연 〈강심장 엄마와 아이들〉에 주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이 그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사망

2025년 11월 8일, 그는 폐렴으로 도쿄 시내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였다. 부고는 11월 11일 공식적으로 전해졌다. 소속사에 따르면 그는 10월 하순 부상을 이유로 입원해 있었고, 이후 폐렴을 겸해 상태가 악화되었다. 마지막 순간은 양녀인 나카다이 나오가 곁에서 지켜보았다고 한다.

주요 출연작

영화

드라마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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