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사이온지 긴시게

한울위키,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이온지 킨시게에서 넘어옴)
사이온지 긴시게
西園寺 公重
신상정보
시대 가마쿠라 시대 후기 - 난보쿠초 시대
출생 분포 원년 (1317년)
사망 쇼헤이 22년/조지 6년 9월 3일
(1367년 9월 27일)
별명 지쿠린인 나이다이진(竹林院內大臣),
호쿠잔 다조다이진(北山太政大臣)
계명 헨조코인(遍照光院)
관위 정2위 내대신 (북조)
태정대신 (남조)
주군 고다이고 천황고곤 천황→고다이고 천황→
고묘 천황스코 천황고무라카미 천황
씨족 사이온지가
부모 아버지 : 사이온지 사네히라
어머지 : 집안 하녀
형제자매 킨무네, 킨시게, 킨나리, 이마노오카타(今御方), 오오이노미카도 후유노부의 아내
배우자 종3위 이쿠코(行子)[1]?
자녀 사네나가, , 킨토시?

사이온지 킨시게 (西園寺公重 (さいおんじ きんしげ))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살은 공경이자 가인이다. 내대신 사이온지 사네히라의 차남이다. 곤다이나곤 사이온지 킨무네의 이복동생이다. 관위는 정2위 내대신 (북조), 태정대신 (남조)이다. 치쿠린인(竹林院)호쿠잔(北山)이라고도 칭했다.

약력

쇼추(正中) 2년 (1325년) 12월에 원복(元服)을 치르고, 같은 시기에 종4위상 시종(侍従)에 서임되었다.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신임도 두터웠고[2], 이후 계속 승진하여 가랴쿠 3년 (1328년) 9월, 종3위에 서임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겐코(元弘) 원년/겐토쿠(元徳) 3년 (1331년) 1월에 토사노곤노카미(土佐権守), 2월에 참의좌중장(左中将), 10월에 곤노주나곤(権中納言)에 임명되었고, 겐코 2년/쇼쿄(正慶) 원년 (1332년) 9월에 종2위로 승진했다. 다음달에는 황태자 야스히토 친왕(康仁親王)의 춘궁대부(春宮大夫)를 겸하였으나, 겐코 3년/쇼코(正慶) 2년 (1333년) 5월, 고곤 천황의 양위(사실상 폐위)와 함께 황태자 역시 폐위되고, 긴시게도 춘궁대부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겐무 정권(建武政権)에서는 겐무(建武) 원년(1334년) 2월 곤노주나곤으로 조정에 복귀한다. 이듬해인 겐무 2년(1335년) 6월에 형 긴무네호조 씨(北条氏) 잔당과 결탁해 모반을 획책하였는데 이를 안 긴시게는 미연에 고다이고 천황에게 이를 밀고하여 그 공적으로 사이온지 집안을 잇게 되었다. 겐무 정권이 붕괴된 뒤에도 북조로부터 가문을 안도받았으나 이 무렵에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가 개입하여 긴무네의 유아 ・ 사네토시(実俊)가 성장하면 가문을 사네토시에게 이양한다는 조건이 붙었기에, 일족간에 대립 관계를 남기게 된다. 엔겐(延元) 2년/겐무 4년(1337년) 12월 정2위, 엔겐 3년/랴쿠오(暦応) 원년(1338년) 11월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에 임명되고 고코쿠(興国) 7년/조와(貞和) 2년(1346년) 2월 다이나곤이 되었다. 쇼헤이(正平) 3년/조와 4년(1348년) 우콘노에노타이쇼(右近衛大将), 이어서 사콘노에노타이쇼(左近衛大将)를 겸임하였고, 쇼헤이 4년/조와 5년(1349년) 9월에는 나이다이진(内大臣)에 임명되는데, 이 시기에 가문은 긴시게의 손을 떠나 사네토시가 잇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긴시게는 저택 지쿠린인테이(竹林院第)에 살면서 지쿠린인(竹林院)이라 칭하고 있었다. 쇼헤이 6년/간노(観応) 2년(1351년) 4월에 사직한 배경에도 집안을 둘러싼 북조측 구게나 부케측으로부터의 압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쇼헤이 일통(正平一統) 아래 쇼헤이 7년(1352년) 2월에 다시금 집안을 안도받아 기타야마테이(北山第)로 옮기고, 적류(嫡流)로써 복귀하고, 5월 바쿠후의 명에 의해 옛 지쿠린인테이로 돌아가 살게 된다. 묘당(廟堂)에서 추방되거나 소유 영지 몰수 등의 굴욕을 당하면서도 교토에 머물렀고, 쇼헤이 8년/분나(文和) 2년(1353년) 6월 남조군이 교토를 회복하였을 때 구가 나가미치(久我長通)・도인 긴카타(洞院公賢)와 의논하여 교토의 여러 일들을 처리하도록 고무라카미 천황(後村上天皇)으로부터 명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수도로 들어왔고, 남조(南朝)와의 화평이 깨지고, 모든 계책이 다한 긴시게는 지쿠린인을 매각하고 교토에서 몰락하였다.

그 뒤 쇼헤이 11년/엔분(延文) 원년(1356년)까지 남조에 참여하였고 우다이진(右大臣)으로 임명되었다. 구체적 관직 경력에 대해서는 사료가 빠져 있지만, 쇼헤이 19년/조지(貞治) 3년(1364년) 7월에는 다조다이진(太政大臣)으로써 집안을 '료초'(了長)에게 양도하는 것으로[3] 얼마 안 되어 산이(散位)로 옮기고 출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쇼헤이 22년/조지 6년(1367년) 9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

칙찬(勅撰) 즉 천황의 어명으로 편찬된 와카(和歌) 모음집인 『후가와카슈』(風雅和歌集)에 '다이나곤 긴시게'(大納言公重)로써 7수, 『신슈이와카슈』(新拾遺和歌集)에 '뉴도 전임 나이다이진'(入道前内大臣)으로써 1수, 『신쇼쿠고킨와카슈』(新続古今和歌集)에 '지쿠린인 전임 나이다이진'(竹林院前内大臣)으로써 2수가 실려 있고, 또 남조의 준칙찬(准勅撰) 와카 모음집 『신요와카슈』(新葉和歌集)에 '헨조코인 뉴도 전임 다조다이진'(遍照光院入道前太政大臣)으로써 9수가 실렸다. 주관적인 가풍(歌風)으로 남조 구교(公卿)로써 진심을 담은 읊은 노래도 찾아볼 수 있다.

가계

각주

  1. 신요와카슈』(新葉和歌集)에 킨시게가 이쿠코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상가가 있으므로, 킨시게의 아내 (타니모리 요시오미) 또는 딸 (이노우에 무네오)이었다고 생각된다.
  2. 고다이고 천황이 킨시게를 발탁한 이유는, 사이온지 집안의 적자로 간토모시쓰기(関東申次) 즉 간토(가마쿠라 바쿠후)와의 연락책을 맡고 있던 그의 형 긴무네를 친바쿠후파로 간주하고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 『사이온지 가 기록』(西園寺家記録) 13. 집안을 양도한 '료초'에 대해서는 『대일본사료』(大日本史料)는 아들 사네나가(実長)로 해석하고 있는데, 사네나가는 쇼헤이 10년/분나 4년(1355년)에 요절하였기에 분명히 오류이다. 또는 긴시게의 손자로 사네나가의 아들로 보는 설도 있다(太田亮). 나아가 이 인물을 《신요와카슈》(新葉和歌集)의 작자 '우콘노다이쇼 긴나가'(左近大将公長)로 비정하는 설도 있다(小木喬).
  4. 특정 인명은 아니라 단순히 집에서 일하는 시녀를 말한다.

참고문헌

  • (일본어) 오기 타카시『新葉和歌集―本文と研究』카사마 서원, 1984년, ISBN 9784305101815
  • (일본어) 모리 시게아키「北朝と室町幕府」(『増補改訂 南北朝期公武関係史の研究』시분카쿠출판, 2008년, ISBN 9784784214167)
  • (일본어) 하시모토 요시카즈「建武政権転覆未遂の真相(Ⅲ)―東西同時蜂起計画の信憑性」(『政治経済史学』제503호 일본정치경제사학연구소, 2008년 9월, NCID AN0012728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