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 (신라)
| 심지 (신라) | |
|---|---|
| 법명 | 심지(心地)[주 1] |
| 출생 | 삼국시대(자세한 연도는 미상) 신라(자세한 지역은 미상) |
| 입적 | ?년(??세) |
심지(心地, 생몰년 미상)는 9세기 신라의 승려이다.
생애
《삼국유사》에는 진한(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2] 《팔공산동화사사적》(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에 포함된 '심지왕사행적'(心地王師行蹟, 아래 약칭 《행적》)[주 2]에서는 심지가 신라 헌덕대왕의 제3자라고 하였다.
열다섯 살(《행적》에는 열세 살)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중악(中岳)에 머물렀다.[2] 《행적》에는 명산을 두루 돌다 가야산에 이르러 희랑조사를 참례하였다고 하는데, 희랑은 헌강왕대에 최치원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하고 고려 태조의 복전이 되었던 인물로 연대상 믿기 어렵다.[3]
속리산에서 영심(永深)이 진표(眞表)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받들어 과증법회(果證法會)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하지만, 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승려로서 법회에 참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하였다.
그런데 이레가 지나 큰 눈이 내렸는데, 심지가 서 있는 자리 사방으로 열 자 거리에는 눈이 떨어지지도 쌓이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이하게 여겨 마침내 그가 법당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심지는 병을 핑계로 법당에는 들어가지 않은 채 물러나 다른 방에서 법당을 향해 절을 올렸다.
법회가 끝나고 돌아오던 심지는 간자 두 개가 옷섶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돌아가서 영심에게 알렸고, 분명히 간자를 함 속에 깊이 보관해 두었는데 그럴 리 없다며 영심은 자신이 간자를 넣어둔 상자를 살폈다. 놀랍게도 상자에 붙인 봉인은 그대로인데 안에 든 간자만 없는 것이었다. 영심은 다시 심지로부터 간자를 전해받아 보관했으나,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고, 영심은 "부처의 뜻이 당신에게 있으니 당신이 받들라"며 간자를 심지에게 전해 주었다.
《삼국유사》에는 심지가 간자를 정수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자, 산신이 두 선자(仙子)를 데리고 심지를 맞이하여 산꼭대기에 그를 데려다 바위 위에 앉히고는 엎드려 불문에 귀의하기를 청했다고 한다. 심지는 간자를 봉안할 만한 땅을 찾아 중악의 산신들과 산꼭대기에 올라 서쪽을 향해 던졌고, 간자는 곧 바람에 날려 날아가 중악 깊은 곳의 숲의 샘물 속에 떨어졌다. 심지는 간자가 떨어진 샘이 있던 자리에 절을 지어 간자를 모시게 되었다. 바로 지금의 동화사(桐華寺)였다고 한다.
절을 중창할 당시 계절이 겨울이었는데도 오동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고, 심지는 이에 감탄하여 절의 이름을 유가사에서 동화사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동화사 경내의 조사전 앞에는 '심지조사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오동나무가 서있다. 《행적》에는 이때 중악의 이름도 '팔공산'이라고 고쳤다고 하였으나, 고려 말기까지 '팔공산'이라는 이름은 존재한 적이 없어 이 또한 후대에 견강부회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3]
동화사 창건과 심지
심지조사가 동화사의 창건주라는 전승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삼국유사》 안에서조차 심지가 동화사를 창건하였다, 고 직접적으로 명기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심지의 출생연대 추정에 있어서, 최연식은 헌덕왕 14년(822년) 왕이 김충공(金忠恭)의 딸 정교를 태자비로 맞이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실제로는 헌덕왕의 혼인 기사로 해석할 수 있고, 심지는 헌덕왕과 정교 사이의 소생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였다. 이 경우 동화사 창건 시점이라고 전하는 832년 당시 심지의 나이는 겨우 열 살 미만이므로 하나의 절을 지었다고 보기는 무리라는 것이다.[4] 한지만은 심지가 진표의 법맥을 이은 점이나 진표가 창건한 금산사를 비롯하여 진표계 법상종의 영향을 받은 동화사, 법주사에서 모두 금당과 탑이 직교하는 가람배치가 보이는 점에 주목하여, 동화사의 창건주는 심지였고 금당에는 미륵불이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5]하였으나, 박상현은 금산사는 진표 이전에도 숭제(순제)가 주석[6]하고 있었으므로 진표는 금산사의 창건주가 아닌 중창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 경우 금산사의 가람 배치라는 것도 진표계 법상종만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기에, 그런 점에서 금산사와 동화사가 유사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거나 심지가 진표의 법맥을 이은 점만으로는 심지가 동화사를 창건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삼국유사》에서 심지가 세운 당우를 금당이 아닌 첨당으로 연결시킨 점도 심지가 동화사의 창건주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하였다.[7]
(오른쪽) :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민애왕이 사망한 839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동화사는 창건 초기부터 민애왕가의 원찰로 기능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동화사 창건 당시의 석조물로 이해되는 당간지주, 금당암 영역의 대석단 및 극락전 하부 기단 등이 모두 9세기 중반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8] 심지의 중창 시기로 전승되는 832년 무렵에는 창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9] 또한 창건 시점으로 전해지는 832년이라는 시점을 전후하여 민애왕의 어머니인 선의왕후(宣懿王后)와 아버지인 김충공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863년 민애왕에 대한 추복이 동화사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려하면, 창건주를 명확하게 심지로 특정하기 어렵다 해도, 동화사가 민애왕계의 추선(追善) 등을 위한 원찰로서 창건된 것으로 파악된다.[10]
심지와 동화사 그리고 신라 왕실
《삼국유사》나 《행적》 모두 심지를 신라 헌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이 아들이 없어 왕제(王弟)인 수종(秀宗)이 저이(태자)가 되어 월지궁에 들었다[11]고 하여, 헌덕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처럼 기술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김창겸은 기록의 착오일 수도 있지만 《삼국사기》에서 굳이 국왕이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경우를 (선덕왕이나 헌안왕의 경우처럼) '無子' 또는 '無男子'라고 쓴 경우와 '無嗣子'라고 쓴 것에 주목하였다. 즉 후자의 경우는 전자처럼 '생물학적인 친자'가 없다는 의미라기보다 '왕위를 계승할 만한 마땅한 조건(요컨대 어머니 역시 진골 귀족이어야 한다)과 자격을 가진 아들'이 없다(이 경우 생물학적인 친자는 존재한다)라는 의미이고, 심지가 신분의 변동(내지는 개인적으로 권력을 멀리하는 성향) 등의 요인으로 왕위 계승 자격을 자의 또는 타의로 포기(내지는 박탈)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12]
진표의 점찰법은 주로 승려 지식인 중심으로 서라벌에서 이루어지던 유식학을 공부하고 공덕을 행하면서 도솔천 상생을 기원했던 미륵신앙에 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지방 사회에서 활동하면서 참회와 실천, 그리고 신비사상으로써 지방사회의 민중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13] 현세에 대한 참회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옛 백제, 고구려 유민이나 신분 차별에 시름하던 이들을 통제하기에 효율적이기도 했기에,[14] 지방의 기층민을 대상으로 점찰에 의한 참회 수행을 강조했던 진표의 수행법은 신라 사회에서 미륵신앙과 유식불교 수용의 폭을 한층 넓혀 놓았다.[15] 이러한 진표의 사상과 간자가 영심을 거쳐 심지에게 전수되었고, 심지는 영심으로부터 물려받은 불골간자를 당시 신라의 '경기' 권역이었던 중악으로 옮겨 온다.
이기백은 심지가 진표로부터 전수된 불골간자를 중악으로 가져온 것은 진표의 법상종-미륵신앙이 신라 변방에서 그 세를 불리는 것을 억제하려는 노력의 표시로 이해하였는데[16] 신라 중앙도 아닌 지방, 그것도 옛 백제 출신의 승려가 제창한 새로운 불교 수행의 경향이 신라의 변방에서 세를 불리는 것은 신라 왕실로써는 그렇게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헌덕왕 사후 즉위한 흥덕왕 역시 예전 형왕(兄王)의 찬탈에 동조하였음은 물론, 같은 원성왕계 왕통인 예영계 왕족들로부터 모종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흥덕왕은 헌덕왕의 아들로써 일찌감치 왕권을 등지고 출가하여 승려로 활동하고 있던 심지를 내세워 중악에 동화사를 짓도록 후원하였고, 이 절을 흥덕왕 자신과 황형(皇兄) 헌덕왕이 속한 인겸계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찰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17]
한편 1966년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의 사리장엄구로 확인된 《민애대왕석탑사리호기》 표면에 쓰인 명문을 통해 동화사가 하대 신라 왕실의 원당이었으며, 원문 찬자의 명단에 나오는 '전지대덕 심지'(專知大德心智)을 심지와 동일인물로 보아 석탑이 세워졌던 경문왕 3년(863년)까지 심지가 살아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주 3] 삼층석탑과 사리장엄구의 주인공인 민애왕은 심지나 그 아버지인 헌덕왕, 흥덕왕과 같은 인겸계 왕족이자 인겸계로써 즉위한 마지막 국왕이기도 하였다.
심지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사찰과 암자
각주
내용주
- ↑ 김창겸은 불경 《대승본생심지왕경》에서 따왔을 것으로 보았다.[1]
- ↑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김창겸은 《팔공산동화사사적》(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에 포함된 '심지왕사행적'(心地王師行蹟, 아래 약칭 《행적》)이라는 자료를 2013년 신라문화제 학술발표회 논문집에 실린 〈신라 승려 심지 연구-《삼국유사》 '심지계조'와 관련하여-〉에서 소개하였다. 앞부분은 심지의 생애와 행적, 뒷부분은 아주 간단하게 간자와 관련한 후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에 대해서 김창겸은 《삼국유사》에 언급되지 않은 몇 가지 사실이 더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찬자가 '동사'(東史)라고 표현된,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모종의 역사서를 참고하기도 했지만, 불확실한 내용도 검증하지 않고 기술하였다고 하였다.[3]
- ↑ 《삼국사기》에서는 헌덕왕의 부인을 예영의 딸이라고 하였으나, 《삼국유사》 권1 왕력에서는 헌덕왕의 부인인 귀승부인을 김충공의 딸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를 따를 경우 김충공은 심지조의 친삼촌이자 외삼촌이며, 민애왕은 심지의 사촌 형제이자 외삼촌 관계가 된다.
출처주
- ↑ 김창겸 (2013) 〈신라 승려 심지 연구-《삼국유사》 '심지계조'와 관련하여-〉《신라문화제 학술발표회 논문집》34, 222쪽.
- ↑ 가 나 《삼국유사》권4 의해, '심지계조'
- ↑ 가 나 다 김창겸 (2013) 같은 논문 《신라문화제 학술발표회 논문집》34, 209~210쪽.
- ↑ 최연식, 2021, 〈민애왕의 가계와 추복 과정에 대한 검토〉 《佛敎美術》32, 80~81쪽 및 91쪽
- ↑ 한지만, 2021, 〈진표계 법상종 사원의 가람 구성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30, 62~65쪽
- ↑ 《삼국유사》권4, 의해제5, 진표전간
- ↑ 박상현 (2025년) 〈통일신라~조선후기 동화사 가람의 변화 과정과 의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4~125쪽 주
- ↑ 오세덕, 2017, 〈'八公山 桐華寺의 창건시기와 伽藍의 변화과정 고찰' 〉, 163~165쪽
- ↑ 박상현 (2025년)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210호, 한국사연구회, 125쪽
- ↑ 최연식, 2021, 앞 논문, 86~87쪽
- ↑ 《삼국사기》권제45, 녹진전
- ↑ 김창겸 (2013) 같은 논문 《신라문화제 학술발표회 논문집》34, 212~218쪽.
- ↑ 허흥식 (2013) 《한국의 중세문명과 사상》한국학술정보, 186쪽
- ↑ 김두진 (1983) 《균여화엄사상연구》 일조각
- ↑ 김남윤 (1995) 《신라법상종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34쪽
- ↑ 이기백 (1986) 〈진표의 미륵신앙〉《신라사상사연구》일조각, 275쪽
- ↑ 진정환 (2007) 〈동화사 석탑에 대한 고찰〉《미술사학지》4, 89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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