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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두 (18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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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두(李秉斗, 1814년 2월 8일 ~ 1896년 11월 21일)은 조선 후기의 학자, 문인이다. 본관은 우계(羽溪), 초명은 갑현(甲顯), 자(字)는 원중(元仲), 호는 둔사(遯沙). 경북 순흥(順興) 출신.

1846년(헌종 12년) 2월 8일 식년시 생원시에 3등 41위로 입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1868년 승문원의 천거로 이문학관, 병비의 천거로 부사맹을 역임했다. 1874년(고종 11년) 별은전으로 부호군에 임명됐다. 1892년 12월 9일 이비의 천거로 동지돈녕부사, 12월 10일 호군을 역임했다.

생애

고조부는 종사랑을 지내고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추증된 기태(基泰)이고, 증조부는 증 통훈대부 사복시정 석조(錫祚)이고, 할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한성(漢成)이며 아버지는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된 달식(達植)이고, 어머니는 그의 셋째 부인 안동권씨로 예의판서(禮儀判書) 권인(權靷)의 후손 권동택(權東宅)의 딸이다. 도촌 이수형(李秀亨)의 11대손이고, 취사 이여빈(李汝香+賓)의 재종7대손이다.

아버지 달식은 순흥안씨(順興安氏) 안명극(安明極)의 딸과 혼인했으나 자녀가 없고, 뒤에 양성이씨(陽城李氏) 이광춘(光春)의 딸과 재혼했으나 자녀 없이 일찍 죽고 셋째 부인 안동권씨에게서 형 광현(曠顯), 욱현(郁顯), 취현(就顯), 극현(極顯)과 예안선성김씨 김영곤(金永昆), 연안김씨 김극수(金極秀)에게 출가한 누이가 태어났다.

경상북도 순흥(順興, 후일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출신으로 처음 이름은 갑현(甲顯)인데, 뒤에 병두로 개명했다. 1846년(헌종 12년) 무렵에는 병두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1846년(헌종 12년) 2월 8일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생원시에 3등(三等) 41위로 합격하였다.[1] 그해의 식년시 합격자 발표일은 2월 27일이었다.

합격자 발표일이 늦어진 것에는 입격자들의 인격사항의 오기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2월 18일 한정교가 예조의 말을 가지고 보고하기를, "이번 감시(監試)·복시(覆試)를 거쳐 내려온 방목(榜目, 합격자 명단)을 자세히 살펴보니, 생원시 1등 제5인 이협찬(李協贊)은 본관과 거주지가 모두 기재되지 않았고, 2등 제10인 이섭하(李燮夏)의 ‘燮’ 자가 잘못 쓰여 ‘變’ 자로 되었으며, 제24인 박제갑(朴齊甲)의 부친 화수(華壽)의 ‘華’ 자가 잘못 쓰여 ‘養’ 자로 되었고, 3등 제2인 임재화(林在華)의 ‘華’ 자도 잘못 쓰여 ‘養’ 자로 되었으며, 제41인 이병두(李秉斗)의 부친 ‘학생(學生)’의 ‘生’ 자와, 제56인 박정환(朴珽煥)의 부친 ‘통덕랑(通德郞)’의 ‘郞’ 자가 모두 빠져 누락되었다[2]" 하였다. 이를 모두 고쳐서 표에 다시 붙여 넣게 하였는데, 시험관과 응판관(應辦官, 시험 업무 담당자)들이 함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모두 추고(推考, 문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韓正敎, 以禮曹言啓曰, 今此監試覆試啓下榜目, 詳細考閱, 則生員試一等第五人李協贊, 本貫居住, 俱爲不書, 二等第十人李爕夏之爕字, 誤書以變字, 第二十四人朴齊甲父華壽之華字, 誤書以養字, 三等第二人林在華之華字, 誤書以養字, 第四十一人李秉斗父學生之生字, 及第五十六人朴珽煥父通德郞之郞字, 竝漏落矣。 一竝改付標以入, 而試官及應辦官, 俱有不察之失, 竝推考)?” 하여 고종이 이를 재가하였다.[2]

2월 28일 오후 신시(申時, 오후 3~5시) 중희당(重熙堂)에 생원·진사 합격자들이 고종에게 합격인사를 할 때 다른 합격자들과 함꼐 참여하였다.[3] 이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868년 12월 18일 승문원(承文院)의 천거로 이문학관 이의본(李義本)·정선교(丁善敎)이 늙고 병든 사유로 김정균(金定均)과 함께 이문학관에 임명됐으며, 군직(軍職)을 겸하였다.[4][5] 12월 19일 탈이 있다는 이유로 승문원이 계를 올려 이문학관직에서 면직되고, 이수일(李秀一)과 김호현(金浩鉉)과 교체되었다.[6][7]

12월 20일 병비의 천거로 부사맹(副司猛)에 임명되었다.[8][9] 1874년(고종 11) 별은전(別恩典)으로 부호군에 임명되고, 뒤에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

1892년 12월 9일 이비의 천거로 동돈녕(同敦寧)에 임명되었다.[10][11][12] 12월 10일 호군(護軍)이 되었다.[13][14] 1895년 명성황후가 낭인에게 암살되자 화병을 얻어 이듬해 사망했다. 묘갈명(墓碣銘)은 부제학 이병관(李炳觀)이 지었다.

묘소는 방현(方峴) 계좌(癸坐)에 있으며 묘갈문이 있다.

저서

  • 《둔사유고 (遯沙遺稿)》2권 1책

각주

  1. 《숭정기원후4병오식사마방목 (崇禎紀元後四丙午式司馬榜目)》 (국립중앙도서관 [일산古6024-90])
  2. 승정원일기 2447책 (탈초본 120책) 헌종 12년 2월 18일 갑진 12/19 기사, 1846년 道光(淸/宣宗) 26년
  3. 승정원일기 2447책 (탈초본 120책) 헌종 12년 2월 28일 갑인 30/30 기사 1846년 道光(淸/宣宗) 26년
  4. 승정원일기 2734책 (탈초본 129책) 고종 5년 12월 18일 신유 19/22 기사 1868년 同治(淸/穆宗) 7년
  5. 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5년 무진(1868) 12월 18일(신유) 맑음 19번째 기사, 탈이 있는 이문학관 이의본 등을 개차하고 후임에 유학 이병두 등을 차하할 것을 청하는 승문원의 계
  6. 승정원일기 2734책 (탈초본 129책) 고종 5년 12월 19일 임술 9/14 기사 1868년 同治(淸/穆宗) 7년
  7. 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5년 무진(1868) 12월 19일(임술) 맑음 09번째기사, "탈이 있는 이문학관 이병두 등을 개차하고 후임에 이수일 등을 차하할 것을 청하는 승문원의 계"
  8. 승정원일기 2734책 (탈초본 129책) 고종 5년 12월 20일 계해 33/40 기사 1868년 同治(淸/穆宗) 7년
  9. 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5년 무진(1868) 12월 20일(계해) 맑음 33번째기사, "병비가 이보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0. 승정원일기 3029책 (탈초본 138책) 고종 29년 12월 9일 계해 18/24 기사 1892년 光緖(淸/德宗) 18년
  11. 국역 승정원일기
  12. 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29년 임진(1892) 12월 9일(계해) 맑음 20번째기사, "이비가 이규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3. 승정원일기 3029책 (탈초본 138책) 고종 29년 12월 10일 갑자 17/26 기사 1892년 光緖(淸/德宗) 18년
  14. 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29년 임진(1892) 12월 9일(계해) 맑음 20번째기사, "이비가 이규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참고 자료

  • 승정원일기
  • 재향지 (梓鄕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