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 (무신)
| 파일:이삼 영정.jpg | |
| 별명 | 비선전(飛宣傳) |
|---|---|
| 자 | 원백(遠伯) |
| 호 | 백일헌(白日軒) |
| 시호 | 좌찬성(左贊成) 함은부원군(咸恩府院君) |
| 출생일 | 조선 현종 8년(1667년) |
| 사망일 | 조선 영조 11년(1735년) 1월 10일[1] |
| 관직 | 청주목사, 평안병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포장, 사직, 총융사, 어영대장, 훈련대장, 특진관, 병조판서, 공조판서 |
| 본관 | 함평(咸平) |
| 부모 | 아버지: 이사길(李師吉) 어머니: 남양 전씨(南陽田氏) |
| 배우자 | 첫 번째 부인: 진주 류씨(晉州柳氏) 두 번째 부인: 순천 장씨(順天張氏) |
| 묘소 |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 535(계룡산로297번길 66) |
이삼(李森)은 조선의 무신으로 자는 원백(遠伯), 호는 백일헌(白日軒)이다.
생애
소론의 중심지였던 충청도 노성현(魯城縣,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출신으로, 소론의 태두로 여겨지는 명재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힘과 담력이 뛰어나 병조판서 김구(金搆)의 권고로 무술을 연마하여 숙종 31년(1705년) 무과에 급제했다.[2]
형조참판으로 포도대장을 겸하고 있던 숙종 38년(1712년) 2월에 왕비의 종기가 나은 것을 기념하는 정시(庭試)가 시행되었을 때 당시 시관이었던 이돈 등이 이빈흥 등 자신의 친구와 가까운 친지에게 미리 시제를 가르쳐 주어서 합격시키는 과거 비리 사건이 벌어져(임진과옥) 당시의 시관이었던 김창집(金昌集) 등 수십 명의 연루자가 심문을 받고 파면 또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삼은 직분상 해당 사건이 오래 해결되지 않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안핵진소(因按覈陳疏)라는 상소를 올렸다(《백일헌유집》).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있던 숙종 39년(1713년) 일찍이 기읍(畿邑)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잔박(殘薄)한 정주로 부임하는 것이 싫어서 체직을 도모하였고, 정주목사로 임명이 결정되자 서둘러 사조(辭朝, 사직)하려 하는 등 부임지의 부유하고 가난함만을 좇아 자신의 진퇴를 정하려 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종중추고되었다.[3]
숙종 41년(1715년) 평안도절도사가 되었다. 숙종 43년(1717년) 친기위(親騎衛)의 인원을 500명 정도로 늘리자고 제안하였는데,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바로 그 수를 정할 수는 없으니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맡겨서 헤아려서 아뢰게 하자고 하였다.[4] 당시 "오랑캐를 막을 책략이 이 한 권의 책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5]라며 보는 사람마다 칭송하였던, 이삼의 대표적 저작으로 평가되었던 《관서절요》(關西節要)를 저술한 것도 평안도절도사로써 재직하였던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지만, 그의 후손인 이달헌이 이삼의 시문을 수습했던 시점에서는 이미 전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719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서 봉수가 자주 끊기는 문제점을 들어 봉수제도의 개선을 주장했다. 신임사화가 일어났을 때 포장(捕將) 역할을 담당한 공로로 부사공신(扶社功臣) 1등이 되었으며, 사직·총융사·어영대장 등을 지냈다.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여, 영조 2년(1724년) 김일경의 일파라는 탄핵으로 동왕 3년(1725년) 경상도 곤양에 유배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 후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훈련대장이 되어, 서관(西關)은 타도와 달리 중요한 지역이니 병사를 수시로 방문케 함으로써 각 읍이 군병을 빌려와 대점(代點)하거나 순점(巡點)이 끝나면 군정을 포기하는 폐단을 시정하자고 했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삼은 좌변포도대장 겸 훈련대장을 맡고 있었으며, 성문을 잘 지킨 공로로 분무공신 2등이 되고 함은군(咸恩君)에 봉해졌다.
1729년 특진관으로서 납속(納粟)의 무리들이 호적 안에 '통정'(通政)이나 '절충'(折衝)이라고 쓰고 신역을 면제받으려 하니 앞으로 납속임을 쓰지 않는 자는 무거운 형률로 다스리자고 했다. 그뒤 병조판서와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삼이 비변사당상인 총융사로 있던 1731년 신임 황해수사 남덕하가 부임하여 각 관아를 돌면서 인사하는 예를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변사의 탄핵을 받아 청주(淸州)에 정배(定配)되었다. 남덕하는 유배에서 풀려나고 윤유(尹游, 1674~1737)를 찾아갔는데, 윤유가 남덕하에게 하직하면서 이삼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은 이유를 묻자 남덕하는 이삼이 앞서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된 역적 조세추(曺世樞)가 끌어들인 자이니 만날 수 없다[주 1]고 대답했고,[6] 이삼은 즉각 인혐사직소(引嫌辭職疏)를 올려 자신의 입장을 변무(辨誣)하며 사직을 청하였으나, 영조는 비답(批答)으로 "이미 일이 분명하게 밝혀져 드러나 있는 판에 그런 제멋대로 함부로 내뱉는 말이 경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며 그의 사직을 들어주지 않고 남덕하를 금위영(禁衛營)에서 장 50대를 치게 하였다.[6] 이때에 영조는 "일은 밝은 해처럼 명백하고, 충성은 밝은 해를 꿰뚫을 만하다"(事若白日, 忠貫白日)라는 뜻으로 이삼에게 '백일헌'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7][주 2] 《좌계부담》에는 이삼은 자신이 사면된 날을 이삼 자신의 두 번째 생일로 여겨서 해마다 자신이 사면된 날에는 반드시 생일 잔치를 열었다고 전한다.
어머니 상을 마친 이듬해인 영조 11년(1735년) 1월 10일에[1]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9세.
《승정원일기》 영조 11년 을묘(1735) 2월 13일(갑인)조에는 이삼의 장례 및 추증 문제와 관련하여 충훈부가 올린 계와 그에 대한 영조의 대답이 실려 있다.
묘소
이삼의 묘는 행정구역상 주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 535(계룡산로297번길 66)로 이삼의 영정을 봉안한 백일헌 영당 뒤편에 소재하고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이삼이 세상을 떠나고 한 달 뒤인 영조 10년(1735년) 2월 13일 "훈신의 초상과 장례에 대해 본가(本家)에 만일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혹은 별도로 입계하여 관청에서 조치하여 지급해 주거나 혹은 본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여 편의대로 보살펴 도와주게 하였습니다. (중략) 훈신에게 초상이 있을 때에도 오히려 별도로 입계하여 보살펴 도와주었고 보면 훈신의 초상은 더욱 자별하게 해야 합니다. 함은군 이삼은 장산(葬山)이 충청도 공주(公州)에 있고, 본가의 형편을 보면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10]는 충훈부(忠勳府)의 보고 내용과 함께, 이미 이삼의 무덤 조성에 사용할 석회와 인력으로 동원할 조묘군(造墓軍)에 대한 지급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이삼의 상구(喪柩)를 묘소를 쓸 공주까지 내려 보내는 과정에서 상구가 거치는 각 고을에서 각별히 호송을 맡아, 아침저녁으로 빈소에 올리는 제물(祭物) 수급이나 기타 힘써야 할 일은 편의대로 보살펴 도와 주도록, 규례대로 분부해야 할 문제를 동부승지 정언섭을 통해 영조에게 보고되었고, 영조가 이를 규례대로 하게 하였다고 한다.[10]
또한 《승정원일기》에는 이삼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본부(충훈부)에서 전례를 따라 초기(草記)를 올렸고 그 초기에 따라 상구가 거쳐가는 각 고을마다 호송 책임 및 관리를 맡아서 아침저녁 상구가 마련된 임시 빈소에 올리는 제물(祭物) 및 무덤 조성에 인력으로써 동원할 조묘군(造墓軍)을 지급하게 하였다[10]고 하여, 조선 시대의 훈신(勳臣) 및 그 친족의 장례에 있어서 국가에서 그 장례 절차를 지원해 주었던 전형의 하나를 살펴볼 수 있다.
저서
이삼 사후 그의 7대 손 이달헌(李達憲)의 대에 이르러서야 후손들이 그의 글들을 《백일헌유집》이라는 문집으로 엮어 1949년(대한민국 31년) 간행하였으며, 정인보가 그 서문을 썼다.[11]
1997년에 단국대학교 국문학과 진동혁 교수가 서울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이삼의 문집 《만록》을 입수하여 학계에 공개하였다. 가로 29㎝, 세로 20.5㎝ 크기에 48쪽분량으로 표지는 황지를 사용했으며 저지에 내용을 기록했다. 수록 내용은 《추연남루기》, 《비천정기》 및 이삼 자신이 지은 한시 33수, 반무가, 단가(시조) 등이다.[12] 2023년 한국유교문화진흥원에서 '이삼장군만록'이라는 제목으로 《백일헌유집》과 함께 국역하였다.[13]
가계
- 아버지: 이사길(李士吉)
- 어머니: 남양 전씨(南陽田氏)
이삼의 아버지 이사길(1639~1705)은 세 번 혼인하였는데, 세 번째 부인으로 남양 전씨(南陽田氏) 전일성(田一成)의 딸이 이삼의 친어머니이다.
이삼의 어머니는 이삼이 56세 되던 1732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삼이 어머니의 상을 마치고 돌아와 영조을 알현하였을 때 영조가 위로하는 자리에서 이삼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만 하였다고 한다.[14]
이삼은 생전 두 번 혼인하였으며, 21세 때에 혼인한 첫 번째 부인은 진주 류씨(晉州柳氏)로 류우(柳祐)의 딸, 두 번째 부인은 순천 장씨(順天張氏)로 병사(兵使)를 지낸 장한상(張漢相)의 딸이었다. 장한상은 경종 4년(1724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가 임종한 것은 사위 이삼의 집에서였다.
인물
《좌계부담》에는 이삼에 대해 ”날렵하고 용맹함이 매우 뛰어나고 재주의 슬기로움이 출중“하였고 ”군읍을 다스리고 부임하여 모두 훌륭한 공적을 이루“었으나, ”도량이 얕고 좁아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공적으로 어엉청과 훈련도감에 발탁되었으나, 훈련도감의 무인이나 어영청의 사람들은 특별히 그를 칭찬하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으며, 신임옥사에서 이만성이 처벌될 때 이삼이 연전의 사실로 이만성의 무고함을 변호했으면 이만성이 옥사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방관하였다며 이삼을 비난하고 있다.
일화
1703년 숙종이 몸소 무관들에게 활쏘기를 시험하였는데, 이삼이 이 자리에서 다섯 발을 명중시키고 또 달리다가 말에 올라타는 기량을 보여, '비선전(飛宣傳, 나는 선전관)'이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삼은 "손이 둔하면 능히 활을 쏘지 못하며, 몸이 살이 찌면 능히 날쌔지 못하다"라며 손에는 항상 활깍지를 끼고 다녔고 국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함경도 남병사 시절에는 산골짜기가 험하고 좁으면 말을 타지 않고 내려서 미투리를 신고 걸어다니면서 여러 지역을 두루 순찰하였다고 한다.[15]
채제공이 쓴 우하형(禹夏亨)의 묘갈명에는 우하형이 무관이 되고자 처음 상경해서 이삼을 찾아왔을 때의 일화가 실려 있다(우하형 항목 참조). 이삼은 훈련대장으로 있던 시절에 "경 이후에 경을 대신할 만한 자는 누구인가"라는 영조의 질문에 "한 명 있기는 한데 조정에서 제 직임을 그에게 맡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운을 떼면서 영조에게 우하형을 추천했고, 영조도 "경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라며 동의하였다.[16]
이삼의 만록에는 경상좌병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곽재우의 휘하로 참전했던 이의 손자를 통해 전해 받은 곽재우의 일본도를 소지하게 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처음 이삼이 함양으로 부임(1703년)하는 작은아버지 이만길을 따라 함양으로 갔다가 그곳에 있던 금객(琴客) 이경혁에게서 그의 할아버지가 임진왜란 때 곽재우를 따라 의병으로 참전하였으며 곽재우가 은거한 뒤에 자신이 차고 있던(예전 곽재우 자신이 일본군과 교전하다 노획한) 일본도 두 자루를 선물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칼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이경혁은 집안이 가난해서 한 자루는 구례 태수에게 팔았고 다른 한 자루는 집에 보관해 두었는데 잃어버린 지 몇 년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이후 이경혁은 낡은 집을 다시 지으려고 옛 터를 파다가 우연히 이 칼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흙 속에 파묻혀 있은 것이 오래되어서 칼은 녹이 슬고 습기가 차서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마침 이삼은 경상좌병사로 임명(1711년)되어 울산에 있었고, 이경혁은 이삼이 그 칼을 보고 싶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고 그 칼을 가지고 와서 이삼에게 보여 주었다. 다 낡은 검은 흙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고 쇠도 아닌 것이 두드려 보면 쟁글쟁글한 소리가 났고, 더러워진 부분을 털어내자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조각조각 일어나더니 광채가 새어 나와 사람을 비출 정도였다. 이삼은 장인을 불러다 칼을 손질하게 하였는데, 칼 오른편에 '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이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왼편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각문이 있었다. 역관을 통해 초량왜관에 머무르고 있던 관왜(재조일본인)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그 일본인은 이야기만 들어서는 조선 사람들이 일본도를 흉내내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며 자신이 직접 봐야 되겠다고 했고, 이삼은 칼의 실물을 직접 보내 주는 대신 칼에 있던 명문과 문양을 종이에 탁본을 떠서 초량으로 보내 주었다. 탁본을 일본인은 놀라면서 "이건 진품이다. 이런 각법은 일본이 아니면 천하 어디에서도 이렇게 만들 수가 없다"며 혀를 내둘렀고, 편지를 보내 하치만이라는 이름의 유래(진구 황후 전설)에 대해서 들려 주었다고 한다. 역학 현덕윤을 통해 이를 들은 이삼은 이 칼을 귀하게 여겨 간직하였다. 다만 현존하는 이삼 유물 가운데 일본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윤증 집안과의 관계
이삼은 소론의 본거지인 논산 지역에서 태어났고, 소론의 태두로 꼽히는 학자 윤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는 이삼의 아버지 이사길이 일찍이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문하에서 배웠던 것과 관련이 있으며, 이사길 본인이 자신을 가르친 스승의 아들에게 자연스럽게 자식인 이삼의 교육을 맡기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길뿐 아니라 이사길의 장인으로 이삼의 외할아버지인 전일성(田一成) 역시 윤선거의 문하 제자였다.
윤증도 이삼의 큰아버지 이적길(李迪吉)의 묘지명을 지으면서 자신과 이사길은 한 집안 친족과 같은 사이이며 그의 아들들이 자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음을 밝혔다.[17]
이삼(李森)이라는 이름도 윤증이 지어준 것으로, 원래 이삼의 이름은 송(松)이었다. 어느 날 산사(山寺)에서 윤증이 제자들에게 눈앞의 광경을 보고 시를 짓게 했는데, 이삼은 "거센 바람 하늘에 불자/낙엽이 빈 산에 가득하네/달은 별을 거느리는 장수 같고/별은 달을 호위하는 병사 같네"(大風起天中, 落葉滿空山. 月如將率星, 星如兵衛月)라고 읊었고, 윤증은 그의 시를 보고 "앞부분 두 구절은 숙살(肅殺)의 기운을 관장하는 형상이 있고, 뒷부분 두 구절에는 장상(將相)의 기운을 띄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당의 시인 위응물의 시 구절의 "병사들 호위에 화극이 삼엄하고, 대궐엔 맑은 향기 엉기네."(兵衛森畫戟, 燕寢凝淸香)라는 구절에서 따서 이름을 '삼'으로 짓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삼이 전라좌수사가 되고 숙종 35년(1709년) 겨울에 유봉에 가서 윤증을 뵈었을 때, 윤증은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마침내 붓을 내던지고 무관이 되었으니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제 지방관으로 부임하게 되어 예전에 이름을 지었던 뜻과 딱 들어맞게 되었으니, '삼'으로 개명한 것이 참으로 헛된 일이 아니었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만록 '꿈을 기록하다').
이삼이 훗날 무관이 된 뒤에도 윤증은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이삼에게는 늘 거친 무부(武夫)로 자처하지 말고 유생(儒生)의 법도를 잃지 않도록 당부하고, 《소학》(小學)과 《논어》(論語) 등 유가의 경전을 끊임없이 읽을 것을 강조하였다.[18]
이삼이 사망한 뒤인 1735년에 이삼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은 것도 윤선거의 종손(從孫)인 윤동수였는데, 윤동수는 묘지명에서 이삼이 윤증뿐 아니라 그 동생인 윤추(尹推, 1632~1707)에게도 배웠다고 증언했다.[19]
각주
내용주
- ↑ 남덕하의 할아버지는 이인좌의 난으로 청주가 함락되었을 때 절의를 지켜 순국한 남연년(南延年, 1653~1728)이었다.
- ↑ 다만 《영조실록》의 사관은 남덕하로써는 할아버지가 이인좌의 난으로 청주가 함락될 때에 죽었으니 이인좌의 난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던 이삼을 보기 싫어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고, 아버지가 청주에서 죽은 사람을 굳이 청주로 유배를 보낸 것도 문제가 많으며, 설령 이삼이 이인좌의 난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남덕하가 굳이 원수로 적대할 필요가 없는 사람임에도 원수로 여긴다고 해서 그걸 굳이 죄를 따지고 형벌을 가할 필요가 있었느냐며 비판하였다.[8] 하지만 영조는 이인좌의 난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습 즉 노론과 소론간의 당파 싸움에 있다고 여겼고, 남덕하가 원수로 대했던 이삼도 역시 엄연히 이인좌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우고 영조에 의해 공신으로 책봉된 인물이었으므로, 영조는 "남덕하가 자기 아비의 원수를 따져서 피하겠다고 하면 그 원수라는 게 청주의 적(이인좌)만 있겠는가? 지금 자기 아비의 원수의 근본이 당습에서 연유된 줄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난을 평정하여 책훈(策勳)이 된 장신(將臣, 이삼)과 사이가 나쁜 것은 무슨 마음인가?"[9]라며 남덕하를 처벌하였다.
출처주
- ↑ 가 나 《영조실록》영조 11년(1735년) 1월 10일
- ↑ 을유증광별시문무과방목(乙酉增廣別試文武科榜目)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 《숙종실록》54권, 숙종 39년(1713년) 11월 16일 경신
- ↑ 《숙종실록》59권, 숙종 43년 3월 21일 병자
- ↑ 《백일헌유집》 권4, '입조기적'(立朝紀績)
- ↑ 가 나 《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11년(1735년) 10월 15일 조
- ↑ 《백일헌유집》 권2, <인혐사직소>, ‘答曰: “省疏具悉. 玆事於卿, 已若白日 此等甘心放肆之說, 於卿何有? 卿須勿辭焉.” 又敎曰: “事若白日, 忠貫白日”, 仍賜扁號曰白日.
- ↑ 《영조실록》 영조 7년(1731년) 1월 28일 임진 및 같은 책 11년(1735년) 10월 15일
- ↑ 영조실록29권, 영조 7년(1731년) 1월 28일 임진
- ↑ 가 나 다 《승정원일기》 영조 11년 을묘(1735) 2월 13일(갑인)
- ↑ 국역 《백일헌유집》 - 한국유교문화진흥원
- ↑ “조선 숙종때 무신 이삼 장군 문집 ‘만록’ 발견”. 《한국일보》. 1997.02.24.
- ↑ 국역 《이삼장군만록》 - 한국유교문화진흥원
- ↑ 《귀록집》(歸鹿集) 권17, <병조판서이공시장>(兵曹判書李公諡狀), ‘服闋, 詣闕謝恩, 以特進入侍. 上慰問甚摯, 公哽咽不能言.’
- ↑ 《영조실록》권40, 영조 11년(1735년) 12월 7일
- ↑ 《번암집》 제53권 묘갈명(墓碣銘) '가선대부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 우공 묘갈명'(嘉善大夫咸鏡北道兵馬水軍節度使禹公墓碣銘)
- ↑ 《명재유고》 권37, <풍덕 부사 이공 묘지명>(豐德府使李公墓誌銘)
- ↑ 《명재유고》 권25, <이삼에게 답장하다>(答李森), ‘勿以武夫麤人自處, 操心制行. 勿失儒生之法, 舊讀小學論語, 常常念讀, 體認不忘可也. 此是根本家計, 幸勿泛聽也.’
- ↑ 《백일헌유집》 권4, 부록, <행장>, ‘受業於我祖考農窩府君及伯祖明齋先生, 兩先生皆愛而奇之.’
같이 보기
- 인용 오류 - 날짜
- 잘못된 파일 링크가 포함된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1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5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1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2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4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4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4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6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6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7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4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4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5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7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8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9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0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2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3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3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3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5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9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4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65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65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69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71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78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79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86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86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88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0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0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4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5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6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8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0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0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0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0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1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4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4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5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14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15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15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18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22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24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27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31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32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33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36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36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37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40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55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58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69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70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73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88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89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90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90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96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98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04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16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17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26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34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41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45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48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55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75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298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22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23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34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37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40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43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54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56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56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60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72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78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82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86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92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399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03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05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11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14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18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42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45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53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53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58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61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495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03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22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28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30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32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36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50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587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73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581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621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673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679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680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682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729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7303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731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790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803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818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838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8671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898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07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69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725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998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020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29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608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083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124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1646을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1729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220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2362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2754를 사용하는 문서
- 위키데이터 속성 P13049를 사용하는 문서
- 함평 이씨
- 1667년 출생
- 1735년 사망
- 조선의 무신
- 조선의 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