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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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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현
영조 20년(1744년)에 제작된《기사경회첩》에 실려 있는, 일흔다섯 살의 이의현의 초상
영조 20년(1744년)에 제작된《기사경회첩》에 실려 있는, 일흔다섯 살의 이의현의 초상

이름
덕재(德哉)
도곡(陶谷)
시호 문간공(文簡公)
신상정보
출생일 현종 10년(1669년) 5월 18일 인시
출생지 북부 진장방 소격동 정유성의 옛 집[1]
사망일 영조 21년(1745년) 4월 8일 해시(향년 77세)[1]
사망지 서울 남부 명례방 남동의 저택
본관 용인(龍仁)
부모 아버지:이세백(李世白)
배우자 함종 어씨(咸從魚氏)
직업 정치인, 문인

이의현(李宜顯, 1669년 ~ 1745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용인. 자는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문집으로 《도곡집》이 있다.

생애

유년기

현종 10년(1669년) 5월 18일 무인시(戊寅時)에 서울 한성(漢城) 북부(北部) 진장방(鎭長坊) 소격동(昭格洞)에 있던 외증조할아버지 정유성(鄭維城)의 옛 집에서 태어났다.[1] 태어나고 넉 달 뒤에 아버지 이세백이 아산현감(牙山縣監)이 되면서 아버지를 따라 아산으로 내려갔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현종 15년(1674년)의 일이었다.[1] 이듬해 정월에 아버지 이세백이 홍천현감(洪川縣監)에 제수되면서 다시금 홍천으로 내려갔다.

홍천으로 내려간 해 겨울에 처음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수학하여 읽었으며,[1] 이듬해(1676년) 2월에 천연두를 앓았으나 살아났다. 가을에 아버지를 따라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혼례를 치를 때까지 한동안 서울에서 생활하였으며, 주로 소격동의 외가에서 거주하였다. 숙종 3년(1677년) 정월부터 아버지에게서 《사략》(史略)과 당시(唐詩)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중간에 대사간 이혜(李嵇)와 진산군수(珍山郡守) 윤이건(尹以健) 형제에게서 수학하였다.[1] 12월에 할머니 안동 김씨가 별세하고, 11개월 뒤에 할아버지 이정악이 별세하여 아버지가 거상하던 시기에는 이모부인 청도군수(淸道郡守) 이수실(李秀實)에게 배워서 《사략》 7권을 모두 마쳤으며, 이후 가을부터 진고개(泥峴)에 있던 윤이건 형제의 거처와 배오개(梨峴)에 있던 아버지의 시묘살이 하는 곳을 오가며 《소학》(小學)을 배웠다.[1] 숙종 6년(1680년)에는 배오개에서 《효경》(孝經), 《논어》(論語), 《시전》(詩傳), 《사기》(史記)를 배우고, 아울러 당시(唐詩)와 한시(韓詩)를 읽고 고풍시(古風詩)를 연습삼아 지었다. 7년(1681년)에는 《맹자》(孟子), 《대학》(大學)과 이백(李白)의 시를 읽었고, 고풍시(古風詩)를 지었으며, 마을 사람인 우홍성(禹弘成)의 집을 왕래하면서 그에게서 배우기도 하였다.

이의현 자신이 쓴 기년록에서는 이때의 일에 대해 "일과에 따라 독서하는 것 이외에도 여가가 나면 서책을 펼쳐보았고 조보(朝報)와 소장(疏章)까지도 대략 훑어볼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문리가 저절로 통하였다. 이 덕분에 관례를 치르기 전에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거의 열람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1] 이의현이 관례를 치른 것은 숙종 9년(1683년) 4월 10일의 일이었다(관례의 빈객은 김창협이 맡았다).[1] 10월 6일에 혼례를 올렸다.[1]

청년기

숙종 10년(1684년) 4월에 황해감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이세백을 따라 해주로 갔다. 이세백은 임기가 다한 뒤에 다시 유임하여 2년이 지나서야 체직되었고, 11월(1685년) 12월에 다시 평안감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부임하였다. 해주에 있는 동안 이의현은 《서전》(書傳)을 읽고 정식시(程式詩)를 지으면서 쉬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여가에 석담(石潭), 광석(廣石), 수양산(首陽山) 등의 여러 승경을 유람하였고 소현서원(紹賢書院)과 문헌서원(文憲書院) 두 곳을 배알하였으며 지나는 길에 화석정(花石亭)과 영수병(映水屛)을 차례로 유람하기도 하였다. 또한 패도(浿都)의 여러 승경을 두루 유람하면서 시를 지은 것이 많았으며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숙종 12년(1686) 겨울에 이의현은 서울로 돌아왔다. 이듬해 9월에 이세백이 다시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나가게 되어 이를 따랐고, 숙종 15년(1689년) 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5월에 기사환국으로 인해 이세백을 비롯한 온 식구가 낙향하게 되었고, 고양(高陽) 원당촌(元堂村)에서 우거하게 되었다. 이듬해(1690년) 2월에 다시 광주(廣州) 저도촌(楮島村)으로 옮겼다. 그 사이에 큰딸이 태어났고, 18년(1692년) 아들이 태어났다(그러나 모두 네 살을 넘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숙종 19년(1693년) 12월 4일에 증조할머니 김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1] 이듬해 3월에는 외할머니 홍씨 부인이 별세하였다.[1]

숙종 20년(1694년) 당시 풍양(豐壤) 성릉사(成陵寺)에 있던 김창협을 찾아가서 그에게 배우기도 하였다.[1]

4월에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기용되면서 이세백도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1]

관직 생활

서울로 돌아온 해인 숙종 20년(1694년) 9월 9일에 이의현은 아버지의 벼슬로 통덕랑(通德郞)에 가자(加資)되었다. 사흘 뒤인 12일에 인현왕후 복위를 기념하는 별시(別試)가 열렸고, 이의현은 이 별시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1] 이때 서독책(書牘策)으로 차상(次上)의 성적을 받아 입격하여 2등 제10인에 들었는데, 주사(主司)가 문장가의 기상이 있다고 몹시 칭찬하였다.[1] 10월 12일에 강(講)을 치르고, 26일에 별시 문과(別試文科) 전시(殿試)에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하였다.[1] 11월 4일에 방방(放榜)하였다.

이의현은 이때 아버지 이세백의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과거에 응하지 않으려는 이의현에게 이세백은 "너의 뜻이 진실로 가상하기는 하지만 이번 과거는 예사의 과거가 아니니 응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후로는 다시 과거를 보지 않고 실제의 학문에 종사하여 네 본래의 뜻대로 행하여도 불가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아들에게 권하여 이의현이 과거에 응시하게 되었다고 한다.[1] 또한 전시까지 합격하였을 때의 소회에 대해 "나는 본래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한번 응시하자마자 곧바로 급제하는 것은 더욱더 처음에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마음속으로 매우 놀라고 당황스러워 기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간혹 나를 두고 확고하게 학문을 한 힘이 있다고 잘못 아는 이들이 있었으니 가당치 않은 명성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라고 술회하고 있다.[1]

11월 17일에 가주서에 차임되었다가 사흘만에 체직되었다. 18일에 서반(무반)인 용양위부사정에 서용되었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검열, 설서, 정언, 사서, 지평, 부수찬, 교리 등 청요직과 대간, 옥당을 거쳐 이조좌랑을 지낸 뒤 겸사서, 부교리, 헌납, 부수찬, 겸문학, 교리 등 청요직, 대간, 옥당을 계속하다가 이후 이조정랑을 거쳐 계속해 부교리, 헌납, 부응교, 응교를 거쳐 이후 승지가 되고, 이조참의와 경상도관찰사를 하다가 숙종의 신임과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신임으로 대사간이 된다.

이후 다시 승지가 되고, 노론 대신들의 측근으로써 맹활약하며, 소론을 맹공격했다. 이후에는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거치며, 소론 대신들을 탄핵한다. 이후 부제학, 대사성, 황해도관찰사, 이조참의를 거쳐 개성유수가 되고 다시 이조참의를 거쳐 마침내 도승지가 된다. 이후 대사성을 거쳐 숙종의 총애와 신임을 한 몸에 받아 예조참판, 대사헌, 부제학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민정을 다스린 뒤 이후 대사간예조참판을 거쳐 동지정사에 이어, 경종이 즉위하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우참찬, 예조판서, 이조판서, 예문관제학을 하지만 신임사화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과 삭출된다. 그리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영조 때 풀려나와 지춘추관사에 이어 다시 선공감제조, 동지경연사에 이어 형조판서예문관제학, 그리고 이조판서와 동지사, 그리고 지사와 수어사, 예문관제학, 동지사를 거쳐 다시 이조판서, 우빈객, 대제학을 하다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판서대제학을 한 뒤, 빈객에 이어 수어사, 상시관, 대제학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판부사로 전직되었다가 이후 영의정이 되었는데, 이후 물러나서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로 있다가 봉조하로 물러난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가계

  • 할아버지: 이정악 - 파주부사
  • 할머니: 안동 김씨 - 김상헌의 손녀
  • 아버지: 이세백 - 좌의정
  • 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 - 관찰사 어진익(魚震翼)의 딸

각주

내용주


출처주

  1. 《도곡집》권32 기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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