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는 13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5세기 초부터 16세기 후반까지 번성한 시기의 회화로, 당시 많은 정치적 국가로 나뉘어 있던 이탈리아반도에서 일어났다. 이 국가 중 일부는 독립적이었으나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는 국가도 있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종종 특정 궁정에 소속되어 특정 도시에 충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외교적 지위를 얻기도 하며 예술적, 철학적 사상을 전파했다.[1]
토스카나주의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로, 특히 르네상스 회화의 발상지로 명성이 높지만, 후기에는 로마와 베네치아가 점점 더 중요해졌다. 상세한 배경은 관련 문서인 르네상스 미술과 르네상스 건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는 주로, 원시 르네상스(1300–1425), 초기 르네상스(1425–1495), 전성기 르네상스(1495–1520), 그리고 매너리즘(1520–1600) 등 네 시기로 구분한다. 이 시기들의 날짜는 이탈리아 회화의 전반적인 경향을 나타내는 것일 뿐, 개별 예술가들의 삶과 개인적인 스타일은 이 시기에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원시 르네상스는 화가 조토 디 본도네로 시작하며 타데오 가디, 오르카냐, 알티키에로를 포함한다. 초기 르네상스 스타일은 마사초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후 프라 안젤리코, 파올로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산드로 보티첼리, 베로키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조반니 벨리니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전성기 르네상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안드레아 델 사르토, 코레조, 조르조네, 조반니 벨리니의 후기 작품, 그리고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활동하는 시기였다. 별도의 문서에서 다루는 매너리즘 시기에는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뿐만 아니라 자코포 다 폰토르모, 파르미자니노, 브론치노, 틴토레토도 포함된다.
영향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 발전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사회의 건축, 공학, 철학, 언어, 문학, 자연 과학, 정치, 윤리, 신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음은 르네상스 전반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요약한 것이다(위에 언급된 주요 문서에서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철학
수세기 동안 서유럽 학자들에게 잊혀졌던 여러 고전 텍스트들이 다시 이용 가능해졌다. 여기에는 철학, 시, 드라마, 과학, 예술에 대한 논문, 초기 기독교 신학 관련 문서가 포함된다. 그 결과로 인본주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면서, 인간과 인류, 우주, 그리고 신과의 관계가 더 이상 교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고전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와 조각가 도나텔로에 의한 고대 로마 유적에 대한 최초의 고고학 연구가 이루어졌다. 고전적 선례에 기반한 건축 양식의 부활은 회화에서도 상응하는 고전주의를 불러왔는데, 1420년대 마사초와 파올로 우첼로의 그림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학과 기술
고전 문헌에 접근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유럽은 비잔틴과 이슬람 학자들의 작품에서 유래한 고급 수학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 이동식 인쇄 기술의 등장으로 아이디어가 쉽게 전파되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며, 광범위한 대중을 위한 책들이 점점 더 많이 저술되었다. 북유럽에서 개발된 유성 페인트가 이탈리아로 전파되면서, 회화 예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회
메디치 은행이 설립되고, 이를 기반하여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이탈리아 피렌체에 전례 없는 부를 가져왔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교회나 군주정과 관련 없는 새로운 예술 후원 기준을 세웠다. 피렌체 지역에 있었던 조토 디 본도네,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및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같은 예술적 천재들의 우연한 존재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뛰어난 품질의 작품을 달성하도록 지원하고 장려하는 풍토를 형성했다.[2]
베네치아에서도 재능 있는 벨리니 가문, 그들의 영향력 있는 인척 만테냐, 조르조네, 티치아노 베첼리오, 틴토레토를 통해 유사한 예술적 업적이 만들어졌다.[2][3][4]
주제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그림은 가톨릭 교회의 의뢰를 받아 제작되었다. 이 작품들은 종종 대규모였고, 그리스도의 생애, 성모의 생애 또는 성인, 특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다루는 연작으로, 주로 프레스코로 그려졌다. 또한 구원과 이를 달성하는 데 있어 교회의 역할에 대한 알레고리적 그림도 많이 있었다. 교회는 또한 제단화를 의뢰했는데, 제단화는 주로 템페라로 패널에, 나중에는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다. 대형 제단화 외에도, 교회와 개인 모두를 위해 크기가 작고 헌신을 내용으로 하는 그림들이 대량으로 제작되었으며, 이러한 작품의 가장 흔한 주제는 성모자와 아기 예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공공 기관의 의뢰 또한 중요했다. 지방 정부 건물은 암브로조 로렌제티의 선한 정부와 악한 정부의 알레고리와 같은 세속적인 작품과, 시에나의 푸블리코궁에 있는 시모네 마르티니의 마에스타 프레스코와 같은 종교적인 작품들로 장식되었다.
초상화는 14세기와 15세기 초에는 흔치 않았으며, 주로 시에나의 시모네 마르티니가 1327년에 그린 귀도리치오 다 포글리아노의 기마 초상화나, 15세기 초 피렌체 대성당에 있는 우첼로의 존 호크우드 초상화와 그와 짝을 이루는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니콜로 다 톨렌티노 초상화와 같은 기념화로 제한되었다.
15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초상화는 점점 흔해져, 처음에는 종종 공식화된 측면 초상화만 그려졌지만, 점차 4분의 3 자세의 상반신 초상화가 많아졌다. 제단화와 프레스코 연작과 같은 미술 작품에 종종 후원자들이 그려지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사세티 예배당에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연작에 사세티 가문과 메디치 가문이 포함된 예를 들 수 있다. 초상화는 라파엘로 산치오와 티치아노 베첼리오와 같은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주요 주제가 되었고, 브론치노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매너리즘 시기까지 이어졌다.
인문주의의 성장과 함께 예술가들은 고전적 주제로 눈을 돌렸는데, 특히 부유한 후원자들의 저택 장식 의뢰에 많이 적용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보티첼리가 메디치 가문을 위해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다. 점차 고전적 주제는 시민 의뢰를 위한 적절한 알레고리적 소재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인문주의는 또한 종교적 주제를 묘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경당 천장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상과 같이 종교적, 고전적 주제가 대세를 차지했으나, 때로는 알레고리적 의미나, 때로는 순수하게 장식적인 목적으로 동시대 생활에서 가져온 모티프도 사용되었다. 만토바의 곤차가가 가문을 위해 만테냐가 그린 카메라 델리 스포지와 같이 특정 가족에게 중요한 사건들을 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회화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점차 정물화와 일상생활의 장식적인 장면을 그린 작품도 등장했는데, 약 1490년 로렌초 코스타의 <콘서트>와 같은 작품이 주요한 예이다.
우첼로의 산로마노 전투와 같은 중요한 사건들은 종종 그림으로 기록되거나 기념되었으며, 중요한 지역 종교 축제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와 역사적 인물들은 종종 현재의 사건으로 묘사하거나, 현재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초상화의 경우에도 동시대 인물을 종종 역사나 문학 속 인물의 모습으로 그리기도 했다. 단테, 보라기네의 황금 전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중요한 주제의 원천이었다.
이 모든 주제에서, 그리고 점점 더 많은 화가들의 작품에서, 자연 관찰, 해부학 연구, 빛, 그리고 원근법 연구 등, 기본적인 회화 기법이 발전하고 있었다.[2][3][5]
원시 르네상스 회화

13세기 토스카나 회화의 전통
13세기 후반 토스카나주 지역의 예술은 이탈리아-비잔틴 양식의 두 거장, 피렌체의 치마부에와 시에나의 두초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들의 의뢰 작품은 대부분 종교화였으며, 그중 상당수는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매우 큰 제단화였다. 이 두 화가와 그들의 동시대인 시에나의 구이도, 코포 디 마르코발도, 그리고 그들의 선배로 추정되는 신비로운 화가, 소위 성 베르나르디노의 대가(Master of St Bernardino)는 모두 이콘 회화의 고대 전통에 의존하여 매우 형식화된 방식으로 작업했다.[6] 이들의 템페라 그림들은 많은 세부 사항이 주제에 의해 엄격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성모와 아기 예수의 손의 위치는 그림이 보는 이에 대한 축복의 성격에 따라 결정되었다. 성모의 머리와 어깨의 각도, 그녀의 베일 주름, 그리고 그녀의 특징을 정의하는 선들은 모두 수많은 그림에서 반복되었다. 하지만 치마부에와 두초는 더 큰 자연주의를 향해 나아갔고, 로마의 동시대인 피에트로 카발리니도 마찬가지였다.[2]
조토
조토 디 본도네 (1266–1337)는 피렌체 북부 언덕의 양치기 소년이었으나, 치마부에의 제자가 되어 당대 가장 뛰어난 화가로 부상했다.[7] 조토는 피에트로 카발리니와 다른 로마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가 그린 인물들은 어떤 회화적 전통에 기반하기보다는 삶의 관찰에 기반했다. 동시대인들의 비잔틴 양식 작품과는 달리, 조토의 인물들은 견고하고 삼차원적이다. 그들은 땅 위에 굳건히 서 있고, 해부학적 구조가 드러나며, 무게와 구조가 있는 의복을 입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토의 인물들을 동시대인들과 구별시키는 것은 그들의 감정이다. 조토의 인물들의 얼굴에는 기쁨, 분노, 절망, 수치심, 악의, 사랑이 담겨 있다. 그가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경당에 그린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모의 생애 프레스코 연작은 서사 그림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는 조토의 오니산티 마돈나와 치마부에의 <산타 트리니타 마돈나>, 두초의 <루첼라이 마돈나>가 같은 방에 걸려 있어 세 작품 간의 양식적 비교를 쉽게 할 수 있다.[8] 조토의 작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는 자연주의적 원근법의 관찰이다. 그는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여겨진다.[9]
조토의 동시대인들
조토에게는 그에게 훈련받고 영향을 받았거나, 자연 관찰을 통해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간 동시대인들이 여러 명 있었다. 조토의 제자 중 몇몇은 그의 작품 방향을 흡수했지만, 그 누구도 그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타데오 가디는 피렌체 산타 크로체 교회의 바론첼리 예배당에 있는 <목동들에게 알림> 장면에서 처음으로 야경을 대규모로 그렸다.[2]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상부 교회에 있는 그림들은 이 시기 자연주의 회화의 예시로, 종종 조토 자신에게 귀속되지만, 피에트로 카발리니 주변의 예술가들의 작품일 가능성이 더 높다.[9] 아시시 하부 교회에 있는 치마부에의 후기 그림인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은 그의 이전 패널 그림들과 상부 교회에 남아있는 초기 프레스코화보다 분명히 자연주의 양식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죽음과 구원
중세 교회 장식에서 가장 일반적인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었는데, 북유럽 교회에서는 서쪽 문 위의 조각 공간에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토의 스크로베니 경당과 같은 이탈리아 교회에서는 내부 서쪽 벽에 그려졌다. 1348년 흑사병이 퍼지자, 생존자들은 참회와 사죄의 상태로 죽음을 맞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여러 프레스코에서 죽음의 불가피성, 참회자에게 주어지는 보상, 죄에 대한 형벌이 강조되었는데, 고통의 암울한 묘사와 지옥의 고문에 대한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작품으로는 현재 산타 크로체 박물관에 파편 상태로 남아있는 조토의 제자 오르카냐의 <죽음의 승리>와, 미상의 화가(아마도 구원 주제의 다른 세 연작에 작업했던 프란체스코 트라이니 또는 부오나미코 부팔마코)가 그린 피사의 캄포산토 모누멘탈레에 있는 <죽음의 승리>가 있다. 이 프레스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1348년 이후로 추정된다.[2]
14세기 후반 파도바에서는 두 명의 중요한 프레스코 화가, 알티키에로와 주스토 데 메나부오이가 활동했다. 주스토의 걸작인 파도바 세례당 장식은 인류의 창조, 타락, 구원이라는 주제를 따르며, 작은 제단실에는 희귀한 묵시 연작도 남겼다. 이 모든 작품은 작품의 크기, 품질, 상태 등이 당시 작품들과 예외적으로 뛰어나지만, 알티키에로의 파도바에 있는 산탄토니오 대성당의 <십자가형>과 비교할 때 인간 감정을 보수적(비잔틴적)으로 다루고 있다. 주스토의 작품에 나타나는 몸짓은 형식화되어 있음에 반해, 알티키에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을 위대한 인간 드라마와 강렬함으로 표현한다.[10]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스페인 예배당에서는 안드레아 디 보나이우토 다 피렌체에게 구원 과정에서 교회의 역할, 특히 도미니코회의 역할을 강조하도록 의뢰되었다. 그의 프레스코화 <활발하고 승리하는 교회의 알레고리>는 다음 세기에 지어지게 될 돔을 포함하여 피렌체 대성당을 완벽히 묘사한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2]
국제 고딕
14세기 후반, 국제 고딕은 토스카나 회화를 지배하는 양식이었다. 이는 피에트로 로렌체티와 "암브로조 로렌체티"의 작품에서 어느 정도 볼 수 있는데, 형식화된 부드러움과 우아함, 그리고 후기 고딕 양식의 우아한 옷주름이 특징이다. 이 양식은 시모네 마르티니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작품에서 완전히 발전되었으며, 우아함과 세부의 풍요로움과 이상화된 품질을 가지고 있어, 조토의 그림에서 보이는 엄격한 자연주의적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2]
15세기 초, 국제 고딕과 르네상스 사이의 간극을 메운 것은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들이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 특히 템페라로 그려진 제단화들은 금박, 그리고 찬란한 색채 등 고딕 양식의 정교함이 특징이다. 반면, 산 마르코 수도원의 숙소에 있는 프레스코화에서는 프라 안젤리코가 조토의 예술적 계승자임을 볼 수 있다. 수사들이 거주하는 독방과 복도를 장식하는 이 헌신적인 그림들은 예수의 생애에서 발췌한 에피소드들을 묘사하는데, 그 중 많은 장면들이 예수의 십자가형 장면이다. 이들은 극히 단순하고 색채는 절제되어 있으며, 예술가가 영적 계시를 시각적 현실로 만들고자 노력했기에 분위기는 강렬하다.[2][11]
초기 르네상스 회화
피렌체
피렌체에서 최초의 진정한 르네상스 예술 작품은 1401년에 제작되었지만, 그림은 아니었다. 그 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피렌체 세례당에 한 쌍의 청동 문을 제작할 예술가를 선정하기 위해, 7명의 젊은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공모전이 열렸다. 참가자들은 각각 이삭의 희생을 나타내는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청동 패널을 디자인해야 했다.
공모전에서 살아남은 두 개의 패널은 로렌초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의 패널이었다. 각 패널은 당시 예술과 철학이 나아가던 방향을 보여주는 강력한 고전주의적 모티프를 담고 있다. 기베르티는 벌거벗은 이삭을 사용하여 고전 양식의 작은 조각을 만들었다. 이 인물은 고대 로마 예술을 참조하는 아칸서스 덩굴로 장식된 무덤에 무릎을 꿇고 있다. 브루넬레스키의 패널에는 이 장면에 포추가 인물이 하나 더 있는데, 발에서 가시를 뽑는 소년으로 잘 알려진 로마 청동 인물을 연상시킨다. 브루넬레스키의 창작물은 그 역동적인 강렬함에서 도전적이다. 기베르티의 작품보다 덜 우아하지만, 인간 드라마와 임박한 비극에 더 가깝다.[12]
기베르티는 공모전에서 우승했다. 그의 첫 번째 세례당 문 세트는 완성하는 데 27년이 걸렸고, 그 후 그는 또 다른 문을 제작하도록 의뢰받았다. 기베르티가 문에 작업한 총 50년 동안, 이 문은 피렌체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훈련장이 되었다. 서사적 주제를 가지고 인물 구성을 배열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급성장하는 선형 원근법 기술을 사용한 이 문은 피렌체 회화 예술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브란카치 예배당
최초의 초기 르네상스 프레스코화는 1425년에 두 명의 예술가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피렌체 카르멜회 교회의 브란카치 가문 예배당에서 성 베드로의 생애 프레스코 연작을 그리도록 의뢰받았다. 그들은 모두 토마소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마사초와 마솔리노, 즉 게으른 톰과 작은 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 마사초는 조토의 작품에 담긴 함의를 인식했다. 그는 자연에서 그리는 관행을 계승했다. 그의 프레스코화를 살펴보면 그가 해부학, 단축법, 선형 원근법, 빛, 그리고 옷 주름 등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브란카치 예배당에 있는 그의 성전세 프레스코화는 하나의 소실점을 가지며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사용하여 작품에 삼차원적 특성을 전달한다. 또한 예배당 아치 측면에 그려진 에덴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의 인물들은 인간의 형태와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반대편에 마솔리노가 그린 <금단의 열매를 받는 아담과 하와>의 부드럽고 예쁜 인물들과 대조를 이룬다. 브란카치 예배당의 그림은 마사초가 1428년 26세에 사망하면서 미완성으로 남았다. 성전세는 마솔리노가 완성했으며, 예배당의 나머지 작업은 1480년대에 필리피노 리피가 마쳤다. 마사초의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포함한 많은 후기 화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13]
선형 원근법의 발전
15세기 전반기 동안 선형 원근법을 사용하여 그림에 사실적인 공간 효과를 구현하는 것은, 많은 화가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뿐만 아니라 이 주제를 이론화했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 밖 광장과 팔각형 세례당에서 여러 정밀한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사초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그린 유명한 <성 삼위일체>를 그리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13]
바사리에 따르면, 파올로 우첼로는 원근법에 너무 집착하여 거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많은 그림에서 실험을 거듭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지면에 부서진 무기와 멀리 떨어진 언덕의 들판을 사용하여 원근감의 인상을 주는 세 점의 산로마노 전투 그림(1450년대)이다.
1450년대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그리스도의 채찍질과 같은 그림에서 그가 선형 원근법과 빛의 과학에 숙달 했음을 보여주었다. 미상의 화가(아마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또 다른 작품인 도시 풍경화도 브루넬레스키가 시도했던 실험이 드러난다. 이때부터 선형 원근법의 이해가 저변화되고 정기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시스티나 경당에서 피에트로 페루지노가 그린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 (1481-82)와 같은 작품에 적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12]

빛에 대한 이해
조토 디 본도네는 색조를 사용하여 형태를 만들었다. 타데오 가디는 바론첼리 예배당의 야경 장면에서 빛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100년 후, 파올로 우첼로는 거의 단색의 프레스코화 몇 점에서 빛의 극적인 효과를 실험했다. 그는 테라 베르데("녹색 흙")로 여러 작품을 제작했는데, 주홍색 터치로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피렌체 대성당 벽에 있는 존 호크우드의 기마 초상화이다. 이곳과 대성당 내부 주변에 그린 네 명의 예언자의 머리 그림에 강하게 대비되는 색조를 사용하여, 각 인물이 마치 대성당의 실제 창문에서 나오는 자연광에 의해 비춰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14]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빛에 대한 연구를 더욱 발전시켰다. 채찍질 그림에서 그는 빛이 그 원점으로부터 비례적으로 어떻게 분산되는지에 대한 지식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는 두 개의 광원이 있는데, 하나는 건물 내부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이다. 내부 광원은 빛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 위치는 수학적 확실성으로 계산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피에로의 빛에 대한 작업을 이어받을 것이었다.[15]
성모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서 숭배되는 성모 마리아는 특히 피렌체에서 자주 작품화 되었다. 피렌체에는 곡물 시장의 기둥에 기적의 성모상이 있었고, "꽃의 성모" 대성당과 도미니코회 대형 교회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모두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이름이 붙여졌다.
곡물 시장의 기적의 성모상은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330년대에 베르나르도 다디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로 대체되었는데, 오르카냐에 의해 정교하게 디자인되고 화려하게 제작된 캐노피에 안치되었다. 또한 건물의 개방형 하층을 에워싼 후, 오르산미켈레 성당으로 봉헌되었다.
성모와 아기 예수의 묘사는 피렌체에서 매우 인기 있는 예술 형식이었다. 대량 생산되는 작은 테라코타 명판부터 치마부에, 조토 디 본도네, 마사초의 작품과 같은 웅장한 제단화에 이르기까지, 성모자상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15세기와 16세기 전반기 동안, 다른 어떤 공방보다 마돈나 제작을 지배한 곳이 있었다. 바로 델라 로비아 가문으로서, 그들은 화가가 아니라 진흙 조각가들이었다. 성당의 칸토리아 갤러리로 유명한 루카 델라 로비아는 대형 조각에 유약 테라코타를 사용한 최초의 조각가였다. 이 가문이 제작한 작품들은 내구성이 강해 많은 작품들이 살아남았다. 델라 로비아 가문, 특히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의 기술은 그들이 조각한 아기 예수들에 큰 자연주의를 부여하고, 성모는 경건함과 부드러움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피렌체의 다른 예술가들이 모방할 기준을 세웠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헌신적인 마돈나를 그린 화가들 중에는 프라 안젤리코, 프라 필리포 리피, 베로키오, 다비데 기를란다요가 있다. 이러한 관습은 보티첼리에 의해 이어졌는데, 그는 20년 동안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련의 마돈나들을 제작했다. 피에트로 페루지노는 그의 마돈나와 성인들을 부드럽게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베누아 마돈나와 같은 작고 마돈나 작품들이 여러 점 남아있다. 주로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조차 도니 톤도를 그렸고, 라파엘로 산치오는 성모자상을 가장 많이 남긴 작가였다.
이탈리아 다른 지역의 초기 르네상스 회화
파도바와 만토바의 안드레아 만테냐
파도바의 안드레아 만테냐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 중 한 명으로, 그는 운 좋게도 위대한 피렌체 조각가 도나텔로가 그곳에서 작업하던 시절에 십대를 보냈다. 도나텔로는 로마 제국 이래 처음으로 콘도티에로 가타멜라타의 거대한 기마 청동상을 제작했는데, 이 기마상은 현재도 산탄토니오 대성당 밖 광장의 받침대 위에 서있다. 그는 또한 이 성당의 중앙 제단도 작업했으며, 일련의 청동 패널을 제작했는데, 이 작품에서 원근법을 구현한 건축 배경에, 인체 형태를 둥글게 매우 얕은 부조로 모두 구현하여 놀라운 깊이의 환영을 달성하였다.
만테냐는 고작 17세의 나이에 첫 의뢰를 맡았다.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경당 근처 에레미타니 교회 익랑에 있는 오베타리 예배당을 위한 성 야고보와 성 크리스토퍼의 생애 프레스코 연작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건물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사진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미 매우 정교한 원근감과 15세기 초부터 파도바 대학교가 잘 알려져 있던 고대 지식을 보여준다.[16] 만테냐의 파도바에서의 마지막 작품은 1457년부터 1459년까지 베로나의 산 제노 대성당 주교를 위해 제작된 기념비적인 산 제노 제단화이다.[17] 프레델라 패널의 풍경 요소의 처리로 유명한 이 다면화는 북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17][18]
만테냐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약 1470년으로 추정되는 만토바 두칼레 궁전의 카메라 델리 스포지 실내 장식이다. 벽에는 곤차가가 가문의 삶의 장면들이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는데, 대화하는 모습, 로마에서 돌아온 어린 아들과 그의 가정교사를 맞이하는 모습, 사냥을 준비하는 모습 등으로, 명백히 역사적, 문학적, 철학적, 종교적 문제와 관련이 없는 장면들이다. 이 작품들은 단순히 가족의 삶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일한 예외는 날개 달린 푸토들이 즐겁게 흩어져 있는 모습으로, 이들은 명판과 화환을 들고 방 천장을 장식하는 하늘의 트롱프뢰유 풍경을 둘러싼 환영적인 난간을 기어오른다.[12] 만테냐의 주요 유산은 프레스코화와 신성한 대화 그림 모두에서 원근법의 숙달을 통해 구현된 공간적 환영주의를 도입한 것으로 본다. 그의 천장 장식 전통은 이후 거의 3세기 동안 이어졌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

1442년 알리폰소 5세는 나폴리의 통치자가 되면서 플랑드르 회화 컬렉션을 가져와 인문주의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얀 판 에이크의 작품들이 포함되었을 왕의 컬렉션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9] 최근 증거에 따르면 안토넬로는 1456년 초 밀라노에서 반 에이크의 가장 뛰어난 추종자인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크리스투스로부터 직접 유화 기법, 특히 거의 현미경적인 세부 묘사와 미세한 빛의 농도 변화를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20] 또한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의 차분한 표정과 전반적인 구성의 차분함 또한 네덜란드적 영향으로 보인다.[21] 안토넬로는 1475년에 베네치아로 가서 1476년 가을까지 머물렀으므로, 그 방문 기간 동안 안토넬로가 유화 사용 기법,[22] 빛의 농도 변화 묘사, 그리고 차분함의 원리를 북부 이탈리아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특히 전성기 르네상스 시기 북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인 조반니 벨리니에게 전수했을 가능성이 높다.[23][2][16]
안토넬로는 주로 빛나는 색상으로 작고 세밀한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는 그의 선형 원근법과 빛을 다루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이 그림의 바깥쪽은 후기 고딕 양식의 아치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를 통해 한쪽은 가정적이고 다른 한쪽은 교회적인 실내 공간이 보인다. 그 중심에는 성인이 자신의 소유물에 둘러싸인 채 나무 의자에 앉아 있고, 그를 상징하는 사자는 우측 그림자 속을 배회한다. 모든 문과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며, 건축물과 모든 사물에 자연광과 반사광을 드리우는 방식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감탄시켰을 것이다.[2][16]
전성기 르네상스를 향한 발전
후원과 인본주의
15세기 후반 피렌체에서는 교회 장식용으로 제작된 작품들조차도 대부분 개인 후원자들의 비용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비용 중 상당 부분은 메디치 가문, 혹은 그들과 밀접하게 연관되거나 친족 관계인 사세티, 루첼라이, 토르나부오니 가문에서 나왔다.
1460년대에 코시모 데 메디치는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그의 상주 인문주의 철학자로 임명하고, 그의 플라톤 번역과 플라톤 철학 강의를 지원했다. 플라톤주의에서는 인간이 신의 사랑을 모방하거나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방법으로서, 인간을 자연 우주의 중심으로, 각 개인의 신과의 개인적 관계를, 그리고 형제적 또는 "플라토닉 러브"를 강조하였다.[24]
중세 시대에는 고전 시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이교도와 연관된 것으로 인식하였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차 계몽과 연관시켰다. 고전 신화의 인물들은 기독교 예술에서 새로운 상징적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여신 비너스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일종의 기적에 의해 완전한 형태로 태어난 그녀는 새로운 하와, 순수한 사랑의 상징, 또는 더 나아가 성모 마리아의 상징이 되었다. 보티첼리가 1480년대에 코시모의 조카인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를 위해 그린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에서 이 두 가지 역할의 비너스를 볼 수 있다.[25]
한편, 세심하고 정확한 화가이자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중 한 명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피렌체의 두 대형 교회인 산타 트리니타의 사세티 예배당과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토르나부오니 예배당에, 메디치 가문 관계자들을 위한 프레스코화 연작을 제작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성모 마리아의 생애, 세례자 요한의 생애를 다룬 이 연작에는, 후원자들의 초상화를 위한 공간이 있었다. 이 작품은 사세티가 후원하였으므로, 사세티 자신의 초상화와 그의 고용주인 위대한 로렌초, 그리고 로렌초의 세 아들과 그들의 가정교사이자 인문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초상화가 있다. 토르나부오니 예배당에는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포함한 플라톤 아카데미의 다른 영향력 있는 구성원들이 함께 있는 폴리치아노의 또 다른 초상화가 있다.[24]
플랑드르의 영향
대략 1450년경부터 플랑드르 화가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이 이탈리아에 도착하면서,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 예술가들은 유성 페인트라는 매체를 접하게 되었다. 템페라와 프레스코 모두 패턴 묘사에는 적합했지만, 자연스러운 질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불투명하게도 투명하게도 만들 수 있고, 칠한 후 며칠 내로 다시 수정 및 추가가 가능한 매우 유연한 유화 물감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었다.
1483년 휘호 판 데르 후스가 그린 거대한 목동들의 경배가 피렌체에 도착했다. 포르티나리 가문의 요청으로 1475년경에 그려진 이 작품은, 브뤼허에서 배로 운송되어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의 산트 에지디오 예배당에 설치되었다. 이 제단화는 강렬한 붉은색과 녹색으로 빛나며, 포르티나리 후원자들의 윤기 나는 검은색 벨벳 의상과 대조를 이룬다. 전경에는 유약 도기 그릇과 유리 그릇이라는 대조적인 용기에 담긴 꽃 정물화가 있다. 유리 화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 삼면화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거친 턱수염, 굳은 손, 그리고 경외심에서 경이로움, 불이해에 이르는 다양한 표정을 가진 세 목동의 극도로 자연스럽고 생생한 모습이었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즉시 자신만의 버전을 그렸는데, 길고 갸름한 플랑드르 마돈나 대신 아름다운 이탈리아 마돈나를, 그리고 화가 자신은 극적으로 몸짓을 취하는 목동 중 한 명으로 등장시켰다.[12]
교황의 의뢰

1477년 교황 식스토 4세는 교황의 많은 예배가 거행되던 사도궁의 황폐한 옛 예배당을 교체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시스티나 경당이라고 명명된 새 예배당의 내부는 처음부터 중앙층의 필라스터 사이에 16개의 대형 프레스코 연작을, 그 위에는 교황들의 초상화 연작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1480년에 보티첼리, 피에트로 페루지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셀리 등의 피렌체의 예술가 그룹이 이 작업을 위뢰받았다. 이 프레스코 연작은 예배당 한쪽에는 모세의 생애 이야기를, 다른 한쪽에는 그리스도의 생애 이야기를 묘사하여 주제적으로 서로 보완하도록 되어 있었다. 제단 뒤쪽 벽에 <예수의 탄생>과 <모세의 발견>이 나란히 있었고, 그 사이에 <성모 승천> 제단화가 있었다. 이 그림들은 모두 페루지노의 작품이었으나 나중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 위해 파괴되었다.
남아 있는 12점의 그림들은 평소에는 매우 다른 스타일과 기술을 사용하던 개인들 간의 명백한 협력을 보여준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는데, 남자, 여자, 어린이 등 수많은 인물들이 포함되었고, 인도하는 천사에서부터 분노한 파라오와 악마 자신에 이르는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각 그림에는 경관이 필요했다. 예술가들은 인물들의 규모를 합의하였고, 각 그림의 상반부는 풍경과 하늘로 채웠다. 때로는 풍경 내에 추가적으로 작은 이야기들이 진행되기도 하는데, 보티첼리의 그리스도의 유혹이 바로 이러한 그림이다.
페루지노의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는 구성의 명료함과 단순함, 구경꾼들 중 자화상을 포함하는 인물의 아름다움으로 주목할 만하다. 특히 두 개의 개선문의 존재로 베드로의 로마 사역을 보여주며, 중앙에는 기독교 세례당 (또는 로마 마우솔레움)으로 보이는 팔각형 건물이 포함된 도시 풍경은 원근법의 모범이다.[26]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
회화의 전성기 르네상스는 다양한 표현 수단[27]과 선형 원근법과 같은 회화 기술의 다양한 발전,[28] 물리적[29] 및 심리적 특징의 사실적인 묘사,[30] 색조 대비, 스푸마토, 키아로스쿠로를 포함한 빛과 어둠의 조작[31]등이 하나의 통일된 스타일로[32] 총체적인 구성적 질서, 균형, 조화를 표현한 정점이었다.[33] 마르시아 홀에 따르면, 키아로스쿠로와 스푸마토에 칸지안테, 우니오네를 더한 네 가지가 전성기 르네상스의 회화 스타일을 이룬다고 말한다.[34] 현재 이들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정규 회화 양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35]
특히, 그림의 개별 부분들은 복잡하면서도, 역동적인 전체와 균형 잡히고 잘 짜여진 관계를 가진다.[36] 전성기 르네상스의 회화는 서양 회화의 절대적인 정점으로 간주되며,[37] 현실 대 이상, 움직임 대 정지, 자유 대 규칙, 공간 대 평면, 선 대 색상과 같이 모순되고 상호 배타적으로 보이는 예술적 측면을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었다고 본다.[38]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은 전성기 르네상스가 1495년 또는 1500년경에 시작되어[39] 1520년 라파엘로 산치오의 사망과 함께 끝났다고 말한다.[40]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1525년경[41] 또는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한 1527년,[42] 또는 1530년경에[43] 끝났다고 말한다. 많은 이들은 1495년에 시작하여 1498년에 완성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전성기 르네상스의 첫 작품으로 꼽는다.[44] 프레데릭 하트(Frederick Hartt)는 그의 저서 『미술사: 회화, 조각, 건축』에서 1520년부터 1530년까지를 전성기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사이의 과도기라고 주장한다. 전성기 르네상스는 세 명의 화가, 즉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지배했으며, 조반니 벨리니, 조르조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선두 주자였고, 코레조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는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의 다른 중요한 화가들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1452–1519)는 베로키오의 피렌체 공방에서 훈련받으며 성장기를 보냈고, 1482년부터 1499년까지 밀라노에서 활동하다가 1500년부터 1506년까지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고,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덕분에,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당대에는 무엇보다도 화가로서 존경받았고, 다른 관심사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그림에 활용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적인 관찰자였다. 그는 사물을 보고 배웠다. 들판의 꽃, 강의 소용돌이, 바위와 산의 형태, 나뭇잎에서 빛이 반사되고 보석에서 빛이 반짝이는 방식을 연구하고 그렸다. 특히 그는 인간의 형태 연구에 몰두했는데, 근육과 힘줄을 이해하기 위해 병원에서 서른 개 이상의 미확인 시체를 해부했다.
레오나르도는 (조토가 예고했지만 마사초의 아담과 하와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사실적인 인간 감정 표현에 성공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1495년부터 1498년까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의 수도원 식당에 그려졌는데, 이후 500년간 서사적 종교화의 기준점이 되었다. 많은 다른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다양한 버전의 최후의 만찬을 그렸지만, 레오나르도의 작품만이 목판, 석고, 석판화, 태피스트리, 크로셰, 식탁보 등으로 수없이 복제되었다.
그는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 회화의 "분위기" 연구를 발전시켰다. 모나리자 (1503년–1517)와 암굴의 성모 (1483–1486) 와 같은 그림에서 빛과 그림자를 너무나 미묘하게 사용하였는데, 이 기법은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연기"라는 뜻) 불리게 되었다. 이 기법은 실제 선 대신 색상을 변화시켜 인물/대상/배경을 전환하는, 색상 사용 기법의 혁명이었다.[45] 그의 작품은 변화하는 그림자, 혼돈스러운 산, 소용돌이치는 급류의 신비로운 세계로 관람객을 초대했다. 레오나르도의 또 다른 중요한 작품은 성 안나와 성모자 ( 1503c.–1519)다. 그룹의 3차원적 특성을 기념비적으로 묘사하고, 구성에서 역동성과 긴장감의 효과를 극대화시킴으로써,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고전주의자와 매너리즘 화가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다.[46] 작품 자체의 직접적인 영향 외에도, 레오나르도의 빛, 해부학, 풍경, 인간 표현 연구는 그의 많은 제자들에게 부분적으로 전파되었다.[47]
미켈란젤로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피렌체 조각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75–1564)를 설득하여 시스티나 경당의 장식 계획을 이어 받도록 했다. 시스티나 경당은 12개의 경사진 펜던티브가 둥근 천장을 지지하고 있어, 십이사도를 그리기 위한 이상적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곧 디자인과 도상학 면에서 훨씬 더 복잡한 완전히 다른 계획을 세웠다. 약간의 보조를 제외하고는 혼자서 작업한 이 작품은, 너무나 거다한 규모로 완성하는 데 거의 5년이 걸렸다.
교황의 계획은 벽에 그려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이야기, 그리고 초상화 갤러리의 교황들 사이에 연결 고리를 형성하는 것이었다.[26] 이 연결 고리가 십이사도와 로마의 첫 주교인 사도 베드로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계획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의 주제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웅장한 계획이 아니다. 인류의 불명예에 관한 내용을 주제로 잡았다. 즉, 인류와 신앙이 왜 예수를 필요로 했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48]
표면적으로는 천장화는 인본주의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물들은 초인적인 크기이며, 아담의 경우, 전기 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미켈란젤로가 아닌 하느님 자신이 디자인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개별 인물들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상태를 미화하지 않았으며, 플라토닉 러브의 인본주의적 이상을 분명히 제시하지도 않았다. 사실, 벽의 위쪽 부분을 둘러 그려진 그리스도의 조상들은 가족 관계의 가장 나쁜 측면들을 보여준다.[48]
바사리는 미켈란젤로가 인물들의 자세를 거의 무한하게 창조해 내는 능력을 칭찬했다. 미켈란젤로가 붓을 놓고 화가 나서 볼로냐로 떠난 후, 브라만테에 이끌려 이 작품을 미리 불 수 있었던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선지자 그림을 모방하여 적어도 두 인물을 그렸다. 하나는 산 아고스티노 교회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바티칸 사도궁에 있다. 또한 아테네 학당에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초상화도 그려 넣었다.[26][49][50]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인 시스티나 경당의 제단 벽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1534-1541년)은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에서 벗어나 전반적으로 길쭉한 인체를 특징으로 하는 매너리즘 양식을 보여준다.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함께 라파엘로 산치오 (1483–1520)의 이름은 전성기 르네상스와 동의어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미켈란젤로보다 18살, 레오나르도보다 거의 30살이나 어렸지만, 레오나르도 사망 1년 후에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두 명의 유명한 동시대인들만큼 회화의 수준을 크게 발전시켰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모든 발전을 통합한 정점이었다.
라파엘로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므로, 소귀족의 아들이었던 미켈란젤로와 달리 그의 경로는 처음부터 결정되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지 몇 년 후, 그는 뛰어난 화가이자 훌륭한 기술자였던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움브리아주 공방에서 일했다. 21세에 그의 첫 서명 및 날짜가 있는 첫번째 그림인 <성모의 결혼>을 그렸다. 이 그림은 페루지노의 그리스도가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장면의 구도를 거의 그대로 참조하였다.[16]
1504년 피렌체로, 1508년 로마로 이주한 라파엘로는 유명 화가들의 기술을 부끄러움 없이 활용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여러 화가들의 개별적 특성들이 통합되어 나타난다. 페루지노의 둥근 형태와 빛나는 색채, 기를란다요의 생생한 초상화, 레오나르도의 사실주의와 빛,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강력한 드로잉 기술이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통합되었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여러 대형 제단화, 바다의 님프를 그린 고전 프레스코화 갈라테이아, 교황 두 명과 유명 작가를 포함한 여러 초상화들을 제작했으며,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를 그리는 동안 근처 사도궁의 라파엘로의 방에 일련의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다. 그 중 스탠차 델라 세냐투라의 아테네 학당 (1509–1511)은 매우 독특하다. 이 프레스코화는 학식 높은 고대 아테네인들이 플라톤을 중앙 인물로 하여 웅장한 고전적 배경에 모여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라파엘로는 플라톤의 모델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삼았음이 유명하다. 정면 아래쪽 큰 돌 블록에 기대어 앉아 있는 침울한 표정의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초상화이며, 시스티나 경당에 있는 그의 예레미야 예언자 그림을 참조한 것이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그의 스승인 페루지노와 자신의 자화상이 있다.[51]
그러나 라파엘로의 인기의 주요 원천은 그의 대작들이 아니라,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작은 피렌체 그림들이었다. 그는 살짝 다른 자세로 통통하고 차분한 얼굴의 금발 여성과 그녀의 통통한 아기들을 계속해서 그렸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의 성모"(La Belle Jardinière)일 것이다. 그의 대작인 시스티나 마돈나는 수많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디자인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그림 아래에 있는 두 작은 푸토의 이미지는, 현재에도 종이 식탁용 냅킨부터 우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에 복제되어 사용되고 있다.[52][53]
조반니 벨리니
베네치아 회화의 선두 주자인 조반니 벨리니 (1430–1516)는 형 젠틸레, 처남 만테냐, 그리고 안토넬로 다 메시나와의 나이 차이가 일년도 나지 않았지만, 처음 두 명보다 10년, 메시나보다 거의 30년 더 오래 살았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들은 여러 영향을 받았다. 초기 작품들은 날카로운 선과 명확하게 구분된 색상이 특징으로 만테냐의 영향이 보이며,[54]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베네치아에 머물렀던 1475년에서 1476년 이후에는 플랑드르 양식의 사실주의와 빛나는 색상이 돋보이는 작품을 그렸는데, 이는 그가 메시나에게 배운 유화 기법을 성공적으로 채택했음을 보여준다.[55] 그는 처음에는 조르조네[56]와 티치아노의[57] 스승이었지만, 나중에는 조르조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물감을 겹겹이 쌓아 부드럽고 확산된 효과를 내는 색조주의를 채택하여, 인물과 풍경이 분위기 속에서 더욱 통일되게 만들었다.[58][59]
벨리니는 레오나르도 로레단 도제의 초상화 (1501)과 같은 작품으로 초기 르네상스에서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넘어선 유일한 15세기 위대한 화가가 되었는데,[60] 이 작품에서 도제는 벨리니가 메시나에게 배웠을 법한 차분함을 보여준다.[20] 벨리니는 라파엘로처럼 풍부하고 빛나는 색상으로 수많은 작은 마돈나들을 제작했는데, 일반적으로 그의 피렌체 동시대인들보다 더 강렬한 색조를 사용하였다.
전통적으로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제단화에서, 왕좌에 앉은 성모상은 성인들과 함께 그려지는데, 이 성인들은 다면화의 형태로 물리적으로 분리되거나, 그려진 건축적 경계로 분리된 공간에 서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왕좌에 앉은 마돈나(성인들이 왕좌 주위에 서있음)의 배경으로 고전적 벽감을 사용했으며, 마사초의 경우엔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성삼위일체에서 배경으로 벽감을 사용했다.
벨리니도 여러 후기 제단화에서 (성스러운 대화로 알려진) 이와 동일한 구성을 사용했는데, 베네치아의 산 자카리아 제단화(1505)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색조주의를 사용하여 건물의 실제 건축을 그림의 환영적 건축으로 확장하여, 벽감을 풍경과 햇빛에 열린 일종의 로지아로 만들고, 성모자와 아기 예수, 두 여성 성인, 그리고 비올라를 연주하는 작은 천사의 인물들을 빛나게 그렸고, 전경의 성 베드로와 성 히에로니무스에는 어둡게 칠했다.[61]
조르조네
짧은 경력(약 35세에 1510년 사망)[62]과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작품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4~5점에 불과),[63] 조르조네는 종종 베네치아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로 평가 받는다.[64] 그러나 학자마다 이를 주장하는 이유가 다르다.
한 가지 이유는 인물과 풍경의 형태를 정의할 때 색조주의를 통해 스푸마토를 포함한 색상과 빛의 그라데이션을 사용함으로써,[58] 그림의 모든 구성 요소가 통일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는 것이다.[65] 일부는 그가 1501년에 베네치아를 방문했다고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부터 이를 배웠다고 믿는다.[66] 1505년 그려진 카스텔프랑코 마돈나에서는 선과 색상 변조가 균등하게 균형을 이루지만, 1510년경의 폭풍에서는 색상 변조가 선을 거의 완전히 대체하여 인간과 자연이 결합된 예술적 비전을 창조한다.[67] 어떤 이들은 <폭풍>을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가장 중요한 그림 중 하나로 평가하는데, 구성 요소들이 색상으로 연결되어 있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57] 조르조네는 자연에 주요한 역할을 부여한 최초의 화가로서,[68] 그의 그림에 풍경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은 그림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69]
<카스텔프랑코 마돈나>와 조반니 벨리니의 산 자카리아 제단화와 비교해 보면, 조르조네의 또 다른 혁신을 볼 수 있다. 즉, 왼쪽의 성 리베랄레가 들고 있는 창과 성모의 옷 주름을 평행하게 배치하는 등, 인물들의 방향과 위치를 조정하여 주제들을 더욱 통일시킨다.[70] 마지막으로, 조르조네의 그림들은 항상 그 의미가 모호하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71] 폭풍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벌거벗은 여인과 옷을 입은 남자, 그리고 번개는 아마도 에덴 이후의 아담과 하와를 나타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72] 그에게 귀속된 또 다른 그림인 세 철학자는 동방 박사가 아기 그리스도를 찾아 여행을 계획하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73] 조르조네의 어떤 그림도 확실히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은 없다.[56]
최근 몇 년 전까지, 조르조네가 1510년 작품 잠자는 비너스에서 아름다움 그 자체로 묘사되고 감탄의 대상이 되는 최초의 여성 누드화를 그렸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조르조네 사망 후 티치아노가 풍경을 완성했다는 것이 오랫동안 정설이었지만, 이제 많은 미술 학자들이 조르조네가 여성의 전신을 그렸는지에 대해 점점 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74]
티치아노
티치아노 (1490년 경–1576 년)는 조르조네와 함께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에서 훈련받은 후 조르조네를 도왔다.[75] 조르조네 사망 후 그는 60년 이상 베네치아 화파의 독재자가 되었다.[76] 그의 초기 작품은 벨리니와 조르조네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지만,[77] 곧 그 두 화가가 제시한 형태와 색채의 원칙들을 취하여,[78] 선이 아닌 색채를 회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확립함으로써,[79] 베네치아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완성했다.[57] 그는 물감 페이스트를 덩어리처럼 느슨하고 넓은 붓놀림으로 나란히 바르는 방법을 사용하여 이를 달성했다.[80] 이는 빛과 색채를 동시에 동등하게 드러냈다.[81] 그는 당대 빛과 색채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다.[82]
티치아노의 또 다른 강점은 그림의 구성이었다.[83] 1519–1526년작 페사로 마돈나에서 그는 마돈나를 중앙에서 벗어나 대각선의 상단 꼭짓점에 배치하여 마돈나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84] 이 작품은 인물들을 원형의 상승 구조로 배치한 최초의 작품이었다.[85]
1516–1518년작 성모 승천 또한 (성모 주변의 케루빔에 의해 형성되는) 대각선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그림의 승리적인 메시지를 베네치아 프라리 교회의 제단에 서 있는 교회의 상층부로 전달한다.[86] 이 작품은 움직임이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최초의 작품이었다.[87] 티치아노의 모든 작품은 다른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정적인 요소들에 비해 인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특징이다.[88] 성모 승천 또한 그의 다른 그림처럼 물감을 여러 층으로, 때로는 다른 색으로 겹겹이 바른 덕분에, 빛나는 깊고 풍부한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89]
티치아노는 또한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였으며 초상화를 서사적인 회화와 같은 존경받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90]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은 보라색의 교향곡으로 그려진 1548년작 카를 5세의 기마 초상과 베네치아의 통치자 안드레아 그리티 도제의 초상화로, 아마도 티치아노의 가장 뛰어난 초상화일 것이다.
티치아노는 나이가 들면서도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대체로 유지하였고, 말년에는 인물이 색채의 움직임 속에 거의 완전히 용해되었는데,[91] 이에 따라 1530년경 매너리즘으로 거의 완전히 전환된 이탈리아 회화의 주류에서 점점 더 고립되었다.[92] 여러 면에서 티치아노는 현대 회화의 창시자로 간주될 수 있다.[92]
코레조
로마를 방문한 적은 없지만 라파엘로 산치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작품을 보았을 것이 틀림없는 안토니오 다 코레조 (1489–1534)는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에서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작업했다.[93] 그는 파르마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의 밧모섬의 성 요한 환상(1520–1524)과 파르마 대성당의 성모 승천(1526–1530)을 제작하였다. 이는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특징이 된, 떠다니는 인물들이 교회 돔을 가득 채우는 열린 하늘을 창안했다.[94] 한 미술 학자는 코레조가 "눈부신 환상: 돔의 건축물이 녹아서 형태가 건물을 뚫고 폭발하는 듯하며, 보는 이들을 성모를 따라 하늘로 솟아오르는 성인들과 천사들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올린다"고 말한다.[95]
이 돔들과 다른 작품들에서, 코레조가 어두운 색을 밝은 색과 대조시킨 상태에서 과감하게 원근법을 적용하여 깊이의 환상을 강화하는 방식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96] 그의 주요 관심사는 빛을 그리는 것이었고, 다음 세기 초 카라바조가 달성할 테네브리즘 효과를 예고한다.[97] 단축법 (대상이 관람자에게 기울어져 있어 더 짧게 보이는 효과)을 사용하여 원근법을 창조하는 그의 능력은 아마도 회화 역사 전체에서 가장 최고일 것이라고 묘사된다.[98]
주피터와 이오(1531–1532)에서 코레조는 이오의 빛나는 인물과 하늘을 채우는 부드럽고 어두운 구름 사이에 강렬한 대조를 그렸는데,[99] 구름은 이오의 빛나는 몸을 감싸는 듯하다.[100] 코레조는 구름, 안개, 또는 연무의 확산 효과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101] 색상 변조와 함께 사용하여 인물들에게 독특한 무중력감을 부여한다.[102] 그는 육체를 섬세하고 관능적인 방식으로 그렸는데,[103] 로코코 시대에야 재발견될 새로운 여성미 개념을 제시하였다.[104] 코레조는 바로크 회화의 많은 요소들을 예고했다.[105]
기타 중요한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들
피렌체 출신의 안드레아 델 사르토 (1486–1530)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1517년작 하피의 마돈나에서 볼 수 있듯이 얼굴 표정과 몸짓 묘사에 있어서는 그들을 훨씬 뛰어넘었다.[106] 그의 인물들은 이전 전성기 르네상스 작품들보다 더 큰 개성을 보여주면서도 고귀함을 잃지 않는다.[106] 1520년대에도 그의 작품은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에 충실했으며,[107] 그의 인물들의 얼굴은 대체로 차분하면서도 아름다웠으며, 그의 제자들까지 매너리즘에 빠져들었음에는 그는 육체를 고통에 빠뜨리지 않았다.[108][109]
베네치아에서 가장 중요한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 중 한 명인 로렌초 로토 (1480–1556)는 베네치아 화파와는 달리 사실주의적 세부 묘사와 색채보다는 선에 더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그리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110] 그는 다양한 주제를 그렸지만, 피사체들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그림에서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난 훌륭한 초상화가였다.[111] 그는 보통 피사체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초상화의 배경이나 전경에 여러가지 물건들을 포함시켰다.[112]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영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16세기 후반까지 생존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타일과 레오나르도, 만테냐, 조반니 벨리니, 안토넬로 다 메시나, 라파엘로 산치오의 스타일이 후대 화가들에 의해 변형되어 매너리즘이라는 이질적인 양식을 형성하고, 상상력과 회화적 기교가 폭발하는 바로크 시대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티치아노의 대형 구상화 경향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예술가는 틴토레토와 파올로 베로네세였지만, 많은 이들은 틴토레토를 매너리즘 화가로 생각한다. 렘브란트의 초상화에서는 티치아노와 라파엘로 두 사람의 작품에 대한 지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가 그들의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은 푸생과 18, 19세기 고전주의 화가 학파를 포함한 여러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작품은 알브레히트 뒤러와 마르틴 숀가우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숀가우어의 판화를 통해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숀가우어를 통한 영향은 독일, 네덜란드, 영국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에서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16]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와 이후 최후의 심판은 처음에는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을 자극했으며, 이후 인간의 형태를 새롭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묘사하려 했던 거의 모든 16세기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구상 구성 스타일은 안드레아 델 사르토, 폰토르모, 브론치노, 파르미자니노, 베로네세를 거쳐 엘 그레코, 카라치, 카라바조, 루벤스, 푸생, 티에폴로에 이르러 19세기의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 화가인 자크루이 다비드와 들라크루아에게 나타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영향으로 왕립 예술원과 같은 많은 근대 예술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으며, 특히 내셔널 갤러리와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부 미술 컬렉션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을 수집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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