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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최치원 신도비

함양 최치원 신도비
(咸陽 崔致遠 神道碑)
대한민국 경상남도문화재자료
파일:문창후선생신도비 (3).jpg
함양 문창후 신도비
종목문화재자료 (구)제75호
(1983년 7월 20일 지정)
수량1기
관리함양군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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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54-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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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함양 최치원 신도비(咸陽 崔致遠 神道碑)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에 있는, 신라말의 학자인 최치원 선생을 기리는 신도비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75호 문창후최선생신도비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최치원(857∼?)은 신라 말에 새로 성장하는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문장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12세의 어린나이로 당에 유학가서 7년만인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고병의 종사관이 되어 그를 대신해 '토황소격문'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29세인 헌강왕 11년(885년)에 신라로 돌아왔으며, 진성여왕 3년(894년)에는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시무책 10여조를 여왕에게 올려 아찬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뜻을 펼치지 못하자 외직을 자청하여 지방관을 전전하였다. 문창후는 신라가 멸망한 뒤 고려 조정으로부터 받은 시호이다.

최치원이 천령군 즉 함양의 태수로 부임한 것은 894년경의 일로, 시무 10여조를 올린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천령군태수 외에도 방로대감(防虜大監)의 직책을 띠고 있었다.[2] 1년 남짓을 부임하면서 최치원은 함양을 흐르는 하천인 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인공숲을 조성하였다(함양상림). 신도비는 최치원이 천령군태수로 재직하던 시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신도비는 납작한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용무늬를 새긴 머릿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각주

  1. 경상남도 고시 제2018-485호,《경상남도 지정문화재(문화재자료) 명칭변경 고시》, 경상남도지사, 2018-12-20
  2. '증희랑화상시 5수' 《가야산해인사고적》

같이 보기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