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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민주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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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민주의거
파일:20250816 3·8 민주의거 기념비.jpg
대전광역시 둔산동에 세워진 3·8 민주의거 기념비.
날짜1960년 3월 8일, 3월 10일
지역대한민국 충청남도 대전시 (현 대전광역시)
3·8 민주의거 기념비
목적이승만 정부의 독재정치에 대한 항의
종류항의, 시위
결과학생들에 대한 정부 당국의 탄압
시위 당사자
충청남도경찰청과 대전경찰서 소속 경찰
참여 인원
1,000여명 (3월8일)
600여명 (3월10일)
사상자
체포자수?명

3·8 민주의거(三八民主義擧)는 1960년 3월 8일 대한민국 충청남도 대전시에서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주화운동과 3월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기획했으나 발각된 계획을 합쳐서 부르는 민주화운동으로, 학도호국단을 통한 학생 탄압과 이승만 정부가 학생을 정치도구로 삼은 것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대전고등학교를 비롯한 대전 지역의 주요 학교들이 3월 7일 연합시위를 기획했으나 사전에 이것이 발각되어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들만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은 3월 8일 시위에서 학생의 정치화를 금지하고, 정부의 관보로 전락한 서울신문의 강제 구독을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경찰 당국의 강제 탄압으로 시위는 하루 만에 해산되었지만, 이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 반향을 일으켜 중앙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한 대한민국 주요 언론에서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3월 8일 시위가 끝난 이후 3월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제2차 시위를 기획해 다시 가두 시위를 벌였지만 이번에도 대전의 경찰청은 해당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3.8 민주의거는 2000년대 이후 그 특징과 의미가 주목받기 시작하여, 2009년 대전시의회에서 해당 운동을 기념하는 조례를 통과시켰고 2018년에는 비공식 국가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3.8 민주의거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충청권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민주화 운동이자, 2·28 대구 학생의거, 3·15 마산 의거와 함께 4·19 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배경

1960년 3월 8일, 당시 대전의 여러 고등학생들은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 유세에 참여하려 했으나, 이를 경찰이 막아서자 강하게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집권 여당이던 자유당3월 15일로 예정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야당의 유세를 방해하고 온갖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있었다. 반면, 자신들의 정치 집회와 선거 유세에는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정치 세력이 학원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며, 스스로 부정선거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이 일으킨 2·28 의거은 전국 학생들에게 강한 울림을 주었고, 대전의 학생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3·1절 기념행사 이후 대전의 여러 학교 분위기는 눈에 띄지 않게 술렁이고 있었다. 그러던 3월 7일, 대전의 여섯 개 고등학교(대전고등학교, 대전상업고등학교, 대전공업고등학교, 대전여자고등학교, 보문고등학교 등) 대표 학생들이 모여 다음 날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대전공설운동장 유세에 맞춰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대구의 움직임에 이어 대전에서도 더 큰 저항을 보여주자는 의지였다.[1]

그날 유세 현장에는 장면 후보뿐 아니라 민주당 대표 박순천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를 의식한 대전교육청은 여러 차례 공문을 내려 각 학교에 학생들의 참석을 철저히 막으라고 지시했고, 실제로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2]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일부 학교 간부와 학생 대표들이 경찰에 연행되고, 교사들의 제지와 준비 부족으로 인해 무산되었으며, 결국 대전고등학교만이 계획대로 시위를 실행했다.

"3월 8일 날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학도호국단 간부 각 반장들 전부 다 일단 교무실로 다 불려갔어요. 교장님 관사로 ... 교장선생님이 회유한 거죠. ... 이대로 있으면 안 되니까 담 넘어서래두 튀어야 되겠다.., 선생님들은 뭐 허둥지둥 학교에선 난리가 났죠. 그래서 대문으로는 미처 못나가고 울타리 그냥 뛰어 넘어가고 그냥 뭐 밑으로 나오고, 나오고, 넘어서 어~ 지금으로 말하면 대흥네거리, 그 당시에는 로타리였습니다. 대흥로타리. 그래서 우회전하면 공설운동장 쪽으로 나오거든요. 그쪽으로 쭉 내려갔었습니다."

— 최우영

전개

1960년 3월 7일 오전, 대전고등학교 교장은 학생 간부들을 관사로 불러 다음 날 예정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강연회에 참석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미 시위 계획이 알려진 상황에서, 3월 8일 아침 등교한 학생 간부들은 교무실로 불려갔고, 이어 교장은 1, 2학년 대표 학생 19명을 관사에 가둔 채 시위를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5교시 무렵,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은 결의문을 낭독하며 행동에 나섰다. 곧 전교생 1천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공설운동장에 마련된 장면 후보의 강연장을 향했다. 충청남도경찰청과 대전경찰서 소속 경찰들은 시위대를 막기 위해 시위 행렬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소방호스를 뿌려 해산을 시도한 뒤, 기마대를 투입해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폭행하며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머리와 팔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으며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장면 부통령 후보가 유세하기로 되어있는 공설 운동장으로 쭉 막~ 밀치고 갔습니다. 근데 거기서 이제 흐트러지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공설운동장 주변은 전부 다 논이었습니다... 논에 빠지고 ... 총개머리로 막 휘두르는데... 그때도 기마 경관이 말 타고 와서 총을 겨누고 발사를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공포탄. 그게 이제 실탄인줄 알고 '야, 이거 큰일났다.' 그 다음에 우리가 아주 생생한 것은 염산 있죠, 염산. 염산을 뿌리는걸 제가 봤습니다. 염산을 뿌리니까, 옷에 염산이 맞으니까 이게 다 뚫어지더라고."

— 권오덕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다시 100명, 200명 규모의 소부대로 나뉘어 인동, 원동, 대전역, 목척교, 선화동 등을 거쳐 도청 앞에 재집결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이승만 독재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는 대전고 - 대흥네거리 - 한밭운동장(구 공설운동장) - 대전역 - 홍명상가(목척교) - 도청 순서로 행진했으며 결국 이날 시위로 약 80명이 경찰에 끌려갔고, 주동자로 지목된 5명은 다음 날 새벽 석방되었다.

대전상업고등학교는 고등학생 연합 시위가 무산되자 자체적으로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학교 측 학생 간부들은 3월 10일 시위를 목표로 준비에 들어갔으나, 계획이 경찰에 사전 포착되어 일부 간부가 연행되었다. 그럼에도 남은 간부들이 주도해 약 600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대구에서도 하니까 우리도 좀 해야겄다, 하는 몇 몇 학생들이 계속 얘기가 되어 있었어요. 대전 시내가 같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얘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사복 경찰이라든가 학교 선생님들이 참 그 와해시키기 위해서 굉장한 많은 노력들을 했죠. 대전고등학교 같은 경우는 3월 그냥 8일에 했는데 다른 학교는 같이 동참을 못했죠. 그러다가 대전상고 같은 경우는 '안 되겄다 우리는 우리대로라도 해야겄다'라는 얘기를 몇 사람이 해가지고 3월 9일 날 간부들이 모였었어요. 모여서 이제 3월 10일 날 오전 수업 끝나고 오후에 하자라는, 시위를 하자라는 결정을 했는데... 아침에 나와 보니까 다 잡혀간 거야. 그래서 '야, 큰일 났다, 안 되겄다' 해서 그냥 아침에 갑자기 잡혀가지 않은 애들 모여가지고 '오늘 조회 끝나고 하자. 시위 하자' 그래서 조회를 끝나고서 바로 시작을 했습니다."

— 전희남

3월 10일 아침 조회가 끝나자 학생들은 곧바로 대열을 갖추고 교문을 나섰다.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구속된 친구를 석방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전경찰서를 향해 행진했고, 시민들의 응원을 받으며 시청 부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경찰의 제지에 부딪혔고, 진압경찰뿐 아니라 정체불명의 단체까지 동원되어 충돌이 발생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대전상고 - 신안동파출소 - 대전역 - 홍명상가(목척교) - 도청 순서 행진하며 시위하였고[3] 결국 학생 50여 명이 연행되며 시위는 강제로 마무리되었다.[2]

의의

3·8 민주의거는 1960년 3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저항해 대전 지역 고등학생들이 주도한 충청권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된다. 이 의거를 기리기 위해 대전시의회는 2009년 「3·8민주의거 기념조례」를 제정하였고, 2018년 11월 2일에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점을 인정받아 대통령령 29271호를 통해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다.[2][3]

같이 보기

각주

  1. “구술기록으로 보는 3·8민주의거”. 2025년 8월 30일에 확인함. 
  2. 김, 수자(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3·8민주의거 (三八民主義擧)”. Academy of Korean Studies. 
  3.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2025년 8월 30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