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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폭격 (1944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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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폭격 (1944년~1945년)
태평양 전쟁마터호른 작전의 일부
파일:Admiralty IX Floating Dry Dock March 1941.jpg
1945년 미국 육군 항공대의 공습 당시 두 차례 목표가 되었던 해군성 부양식 도크
날짜1944년 11월 5일~1945년 5월 24일
장소
결과 연합군 승리
교전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군대
제7방면군
피해 규모
폭격기 9대 손실 선박 4척 파괴 및 11척 피해, 해군 기지 및 조선소 피해

싱가포르 폭격 (1944년~1945년)은 미국 제20폭격기사령부영국 공군 제222비행단마터호른 작전의 일환으로 수행한 폭격 작전이다. 미국 육군 항공대가 1944년 11월 5일부터 1945년 3월까지 일본군이 점령한 싱가포르의 해군기지와 조선소를 목표로 폭격을 수행했고, 싱가포르섬을 둘러싼 해상 일대에 기뢰를 부설했다. 미국 공군의 폭격이 끝난 후 영국 공군이 미국 공군의 업무를 이어받아 싱가포르 해상에 기뢰를 부설했고, 이 작업은 1945년 5월 24일까지 이어졌다.

연합군의 싱가포르 공격의 결과는 목표에 따라 달랐다. 싱가포르 해군기지와 조선소에 미친 피해는 매우 컸지만 일부 공습에서는 조선소와 해군기지에 타격을 입히는데 실패했다. 싱가포르 정유 시설들에 대한 폭격은 비효율적이었다. 기뢰 부설 작업은 싱가포르 내 일본 해군의 해상활동을 방해했고, 기뢰로 일본 해군은 선박 3척을 잃고 10척이 피해를 입었지만 결정적인 타격은 아니었다. 폭격은 싱가포르 주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싱가포르 주민들은 폭격을 통해 연합군이 싱가포르를 해방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믿게 되었다.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군 시설 폭격 중 민간인 노동자들이 사망했고 한 차례의 공습에서는 수백 명의 민간인이 집을 잃은 적도 있었다.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영국은 일본의 지역 확장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계획인 싱가포르 전략의 일환으로 싱가포르 북부 해안의 셈바왕싱가포르 해군 기지를 확장했다.[1] 그 결과 이 시설은 대영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 때 확충된 시설에는 킹 조지 6세 건선거와 해군성 제9호 부유식 건조 도크도 있었다.[2][3] 그러나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몇 달 만에 말라야와 싱가포르에 주둔한 영연방 군대는 예상보다 빨리 패배했고,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는 일본에 항복했다.[4] 말라야 전투와 그 이후의 싱가포르 전투에서 일본 제국군은 싱가포르를 여러 차례 폭격했고, 이 공습으로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5]

파일:Queen Mary in Singapore Gaving Dock Aug 1940.jpg
1940년 8월 킹 조지 6세 건선거에 정박한 해양 정기선 RMS 퀸 메리.

싱가포르 해군 기지는 1941년과 1942년의 전투에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일본 본토 외부에 있는 일본 제국 해군의 가장 중요한 시설이 되었다.[6] 영국 통치하에 있던 것처럼 많은 현지 민간인이 기지에서 일했지만, 일본 해군은 사소한 실수에 대한 신체적 폭행뿐만 아니라 절도 및 정보 누설에 대한 투옥 또는 처형을 포함하는 가혹한 징계를 가했다.[7] 일본 제2함대제3함대는 연료유 공급원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1944년 2월에서 4월 사이에 중앙 태평양에서 싱가포르와 인근 링가 제도로 이동했다. 이 두 함대는 일본 제국 해군의 주력 함대였으며, 일본 제국 해군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전함항공모함을 운용했다.[8]

싱가포르 방어에 할당된 군 부대의 전력은 강하지 않았다. 1945년 초, 섬의 일본 대공 방어에 포함된 부대는 자동 기관포로 무장한 두 개의 육군 중대, 일부 일본 제국 해군 대공포 부대, 소수의 전투기만 포함했다. 일부 대공포는 말레이 보조병이 운용했다.[9][10] 대공 방어 전력의 효율성은 육군과 해군 간의 협력 부족, 포의 사격 통제 장비 부족, 사격 통제 레이더 또는 조색기구의 부재로 인해 더욱 효율이 떨어졌다.[10] 야간 전투기가 싱가포르 근처에 배치되지 않았고 대공포와 탐조등 부대 간의 협력이 미흡했기 때문에 야간 공습에 대한 방어는 특히 취약했다.[11]

1944년 6월,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의 제20폭격기사령부는 인도 북동부의 카라그푸르 근처 비행장에서 B-29 슈퍼포트리스 중폭격기를 이용한 전투 작전을 시작했다.[12] 비록 사령부의 주요 임무는 일본 본토의 산업 목표물을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절반의 임무는 태평양에서 다른 연합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수행되었다.[13] 제20폭격기 사령부는 미국 육군 항공대 제20공군에 보고했는데, 이 공군은 인도-중국 전구 사령관이 아닌 미국 육군 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 장군이 워싱턴 D.C.에서 직접 지휘했다.[14] 커티스 르메이 소장은 아놀드가 초대 사령관을 해임한 후 8월 29일에 XX 폭격기 사령부의 지휘를 맡았다.[15]

1944년 10월 말 레이테만 전투에서 일본이 패배한 후, 일본 제국 해군은 두 개의 전투단으로 재편되었다. 한 전투단은 세토 내해의 기지로 돌아갔고, 다른 그룹은 링가 제도에 주둔했다.[16] 10월 27일, 아놀드는 르메이에게 레이테만 전투로 싱가포르 해군 시설의 중요성이 증가했을 수 있다고 제안하며 제20폭격기사령부가 섬의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는지 물었다. 싱가포르에 대한 최신 정보는 거의 없었고, 10월 30일 정찰 B-29가 처음으로 싱가포르 상공을 비행하며 싱가포르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을 찍었다. 르메이의 참모진은 사진 촬영이 성공했지만 싱가포르에 대한 주간 공격은 성공할 수 없다고 믿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놀드는 제20폭격기사령부에 싱가포르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6]

공격

초기 공격

싱가포르에 대한 첫 공격은 1944년 11월 5일에 이루어졌다. 제20폭격비행단은 카라그푸르 주변 기지에서 B-29 76대를 출격시켰다. 목표까지 비행 거리가 상당했기 때문에 각 항공기는 1,000파운드 폭탄 두 발만 탑재했다. 조종사들은 또한 평소 폭격 고도보다 낮은 20,000 피트에서 폭격하고 느슨한 편대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격의 주요 목표는 킹 조지 6세 건선거였으며, 수마트라섬 북부의 팡칼란브란단 정유소가 보조 목표로 지정되었다.[6]

첫 B-29는 오전 06시 44분에 싱가포르 해군기지 상공에 도착했다. 폭격은 매우 정확하여 선두 항공기가 건선거의 케이슨 문 가까이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세 번째 B-29의 폭탄도 건선거 근처에 떨어졌고 다른 항공기들도 건선거에 직격탄을 날려 해당 시설을 3개월 동안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킹 조지 6세 건선거 안팎에 떨어진 폭탄은 당시 수리 중이던 465 ft 길이의 수상기모함 노토로도 손상시켰다. 선거 안팎의 많은 민간인 노동자들은 탈출할 수 없어 사망했다. 공격자들은 또한 해군기지의 다른 시설에도 피해를 입혔다. 전체적으로 53대의 슈퍼포트리스가 싱가포르 해군기지를 폭격했고, 7대가 팡칼란브란단 정유소를 공격했다. 일본 대공포나 항공기는 거의 공격자들을 사격하지 않았지만, 두 대의 B-29가 사고로 손실되었다.[6][17] 이 공격은 당시까지 수행된 가장 긴 주간 폭격 작전이었다.[18] 공격 후, 일본 병사들은 부상당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살해했다.[17] 킹 조지 6세 건선거의 손상으로 인해 레이테만 전투에서 손상된 일본 전함들을 수리하는 데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19]

지속되는 폭격

두 번째 싱가포르 공습은 1945년 1월에 일어났다. 일본 제국 해군이 필리핀 전역 당시 손상된 일본 전함을 싱가포르에서 수리하고 있다는 보고에 따라 인도에서 47대의 슈퍼포트리스로 구성된 부대가 파견되어 해군성 제10호 부유식 도크와 싱가포르섬 남해안의 킹스 도크를 공격했다. 슈퍼포트리스는 1월 10일 자정 무렵 이륙하여 1월 11일 08시 20분에 싱가포르 상공에 도착했다. 공격기 중 27대만이 도크를 강타했고, 조호르 해협에 있는 일본 전함의 강력한 대공포 사격으로 인해 폭격기는 전함에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나머지 항공기는 말라야의 페낭주, 버마의 뭇따마 및 여러 목표물을 폭격했지만 대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전 중 B-29 2대가 손실되었다.[11][20][21]

1945년 1월, 제20폭격기사령부은 마리아나 제도로 재배치될 준비를 시작했다. 사령부는 중국 기지를 이용해 목표물로 향하는 B-29에 연료를 보급하는 일본과 동아시아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대신 카라그푸르에서 도달할 수 있는 동남아시아 목표물에 집중했다. 카라그푸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산업 목표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양곤, 방콕, 싱가포르와 같은 주요 항구와 소규모 항구의 선박 공격에 최우선 순위가 주어졌다. 공격은 재래식 폭격과 기뢰 부설을 통해 이루어졌다. 전환의 일환으로 커티스 르메이는 1월 18일 마리아나 제도로 떠났고 로저 M. 램지 준장이 그 뒤를 이었다.[22]

제20폭격기사령부는 2월 1일 싱가포르 해군기지에 대한 대규모 재래식 폭격 작전을 수행했다. 이날 B-29 112대가 출격했으며, 각 비행기는 1,000 1,000 lb (450 kg) 폭탄 4발을 탑재했다. 공격의 주요 목표물인 애드미럴티 IX 부유식 도크는 싱가포르에 도달한 88대 중 67대의 항공기에 의해 폭격되었다. 이 공격으로 건선거는 침몰하고 내부에 정박해 있던 460 ft (140 m) 선박이 파괴되었다. 싱가포르를 공격한 나머지 21대의 항공기는 해군기지 서쪽 벽 지역을 폭격하여 많은 건물과 일부 중장비를 파괴했다. 이 지역은 기지의 주요 사무실이 있던 곳이었다. 나머지 항공기 중 20대는 방향을 틀어 페낭과 뭇따마에 있는 목표물을 공격했다. 일본 전투기가 B-29 1대를 격추했고, 다른 슈퍼포트리스 1대는 공중 공격으로 손상을 입은 후 착륙 중 파괴되었다.[23][24]

싱가포르섬, 인근 섬 및 말레이시아 조호르 남해안을 보여주는 흑백 지도에 기사에 설명된 미국 육군 항공대 공습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미국 육군 항공대의 싱가포르 공습 주요 목표물.
(참고: 이 지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해안선이 아닌 현대 싱가포르의 해안선을 나타낸다.)

제20폭격기사령부는 2월 6일 싱가포르 해군기지를 다시 공격할 준비를 시작했지만, 이 공습은 3일에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동남아시아 전구 연합군 사령관)이 취소했다. 마운트배튼은 싱가포르와 페낭의 해군 시설이 1945년 후반에 예정된 말라야와 싱가포르 해방 이후 연합군에 필요할 것이므로 목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23][25] 이 명령에 대한 설명을 요청한 후, 램지는 캔디에서 마운트배튼을 만났다. 이 회의에서 마운트배튼은 쿠알라룸푸르 지역의 목표물을 제20폭격기사령부의 최우선 순위로 지정했으며, 두 번째 목표는 싱가포르섬 중 지휘부가 신중하게 고른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마운트배튼은 킹 조지 6세 건선거와 기타 여러 도크 및 중장비 지역은 제외했지만,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서쪽 벽 지역, 해군 유류 저장고 및 상업용 도크 시설에 대한 공격은 허용했다. 호찌민시는 제20폭격기사령부의 세 번째 우선 목표로 지정되었고, 네 번째 목표는 싱가포르 근처 섬의 유류 저장고에 주어졌다.[26]

싱가포르 폭격은 2월 24일에 다시 진행되었다. 이날 B-29 116대가 싱가포르 남단에 위치한 엠파이어 도크 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이곳은 상업용 도크였으며, 제20폭격기사령부 계획자들은 "이 전구에서 유일하게 적합한 규정 없는 주요 목표물"로 간주했다. 폭격기는 소이탄으로 무장했으며, 싱가포르에 도달한 B-29 105대가 도크 근처 창고 지역의 39%를 소각하는 데 성공했다.[27] 여러 유류 저장 탱크도 심하게 손상되었다. 목표물이 연기로 가려져 B-29 26대가 육안 폭격 대신 맹폭격 기술을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정확도가 떨어져 도크 지역 근처의 민간인 주거 및 상업 지역에 피해가 발생했다. 100채 이상의 상업 및 주거 건물이 파괴되었다. 쇼난 신문은 이 공습으로 396명이 집을 잃었다고 보도했다.[28][29] 미국 육군 항공대의 손실은 인도 귀환 중 연료가 떨어져 추락한 B-29 1대 뿐이었다.[30]

파일:COLLECTIE TROPENMUSEUM Havengezicht met olietanks van de Shell op Poelau Samboe TMnr 10018445.jpg
1936년에 촬영된 삼부섬의 유류 탱크는 1945년 3월 12일 공격 목표물 중 하나였다.

제20폭격기사령부는 3월 2일 싱가포르를 다시 공격했다. 사령부의 많은 부대가 마리아나 제도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B-29 64대만이 출격할 수 있었다. 이 항공기들은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상점 및 창고 지역을 무게 230 kg의 폭탄으로 공격했다. 싱가포르에 도달한 B-29 49대가 이 지역을 폭격하여 이전 공습으로 인한 피해를 가중시켰지만, 일본 전함의 대공포 사격으로 인해 공격 결과는 다시 제한적이었다. B-29 2대가 대공포에 의해 격추되었다.[11][31]

제20폭격기사령부는 싱가포르 지역 섬들의 유류 저장 시설을 목표로 마지막 공습을 3월에 개시했다. 3월 12일, B-29 3개 그룹이 싱가포르 남해안 바로 앞의 부콤 섬과 세바로크 섬,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바탐 섬 근처 남쪽 몇 마일에 위치한 삼부 섬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각 그룹은 다른 섬에 할당되었고 일본 대공포나 전투기는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천후로 인해 목표 지역에 도달한 B-29 44대가 맹폭격 기술을 사용해야 했고, 그들의 공격은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사령부가 마리아나 제도로 떠나기 전 마지막 공격은 3월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밤에 이루어졌는데, 29대의 슈퍼포트리스가 부콤 섬을 공격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승무원들에게 일본 본토에 사용되는 저고도 전술을 훈련시키기 위해 폭격기는 1,500 m에서 2,000 m 사이의 고도에서 개별적으로 목표물을 공격했다. 이 공습으로 섬에 있는 49개의 유류 탱크 중 7개가 파괴되었고 3개가 추가로 손상되었다. 이 두 공격 중 B-29는 한 대도 손실되지 않았다.[11][31]

8월 초 P-38 라이트닝이 싱가포르 상공에서 여러 차례 공습을 감행했다. P-38는 일본 전투기 2대가 격추했고, 일본 전투기는 P-38 2대를 격추했다.[32]

싱가포르 인근 기뢰 부설 작전

해상 수송 작전의 일환으로 1945년 1월 말부터 보름달이 뜰 때마다 제20폭격비행단은 기뢰 부설 임무를 수행했다. 1월 25일에서 26일로 넘어가는 밤, 제444폭격비행단제468폭격비행단의 B-29 41대가 싱가포르로 접근하는 해로에 6개의 기뢰를 부설했다.[33] 같은 날 밤 다른 B-29들은 사이공깜라인만 인근에 기뢰를 부설했는데, 이는 당시 태평양에서 이루어진 단일 공중 기뢰 부설 작전 중 가장 큰 규모였다.[34] 2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 B-29 12대가 싱가포르 인근 조호르 해협에 기뢰를 부설하기 위해 출격했다. 이 중 10대는 목표 지역에 55개의 기뢰를 성공적으로 투하했고, 다른 1대는 페낭주에 기뢰를 부설했다. 다음 보름달 주기인 3월 28일에서 29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B-29 22대가 싱가포르 인근에 기뢰를 부설했다. 이 임무들 중 격추당한 항공기는 없었다.[35]

제20폭격비행단이 철수하자 영국 왕립 공군제222비행단컨솔리데이티드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를 사용하여 싱가포르 지역의 기뢰 부설 작전을 담당했다.[36][37] 1945년 9월로 예정된 영국 주도의 말라야 상륙 작전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기뢰 부설은 5월 24일에 중단되었다.[38] 일본군은 싱가포르 해협의 섬들에 관측소를 설치하여 기뢰밭을 감시했지만, 이는 효과적이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기뢰밭은 배가 기뢰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탐지할 수 없었다. 총 3척의 선박이 싱가포르 인근에서 공중 투하 기뢰로 침몰했으며 다른 10척이 기뢰로 손상되었다. 또한, 기뢰밭은 일본군의 호송 경로와 선박 수리 노력을 방해했다.[39] 그러나 연합군의 기뢰 부설 작전은 결정적인 결과를 얻기에는 너무 그 작전 기간이 짧았다.[35]

여파

파일:Damage caused by Allied bombing.jpg
1945년 9월 싱가포르 부두에서 연합군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조사하는 영국 왕립 공군 수송 운전병

제20폭격기사령부의 싱가포르 공격은 엇갈린 결과를 낳았다. 싱가포르 해군 기지에 대한 공습으로 많은 작업장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고,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까지 일본은 킹 조지 6세 선건조를, 1945년 2월부터는 해군성 제9호 드라이 도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해군 기지 직원들은 각 공습 후 한동안 작업을 재개하지 않았으며, 더 나은 급여와 배급, 추가 방공호를 제공받아야 했다. 엠파이어 도크 지역에 입힌 피해는 일본의 항만 운영을 방해했지만, 항만 지역의 열악한 상태는 전쟁 후 영국의 싱가포르 재건 노력 또한 저해했다. 싱가포르 근처 섬의 유류 저장 탱크에 대한 공격은 덜 성공적이었고, 일본 항복 후에도 많은 저장소가 여전히 작동 가능한 상태로 발견되었다.[40]

일본군의 싱가포르 공습 방어 노력은 실패했다. 섬의 허술한 방공망으로 인해 미 육군 항공대의 작전 기간 동안 B-29 9대만 격추되었으며, 이 격추 역시 모두 주간 공습 중에 발생했다.[41] 일본군의 기뢰 제거 작업도 느렸고, 일본 식민당국은 연합군의 각 기뢰 부설 공습 후 항구가 안전하다고 선언하기까지 3주가 걸렸다.[39] 격추된 미국 폭격기의 생존 승무원들의 운명 역시 제각각이었다. 소수의 조종사들은 말라야 인민항일군과 같은 역내 저항 운동에 합류했고, 다른 이들은 일본군에게 붙잡혀 혹독한 생활을 견뎌야 했다. 일본 제국 해군은 붙잡힌 승무원들을 해군 기지에 억류한 뒤 참수했다. 전쟁 후, 이 포로들에게 잔학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일본군은 실레타르 전범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처형되거나 형량이 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0]

싱가포르 공습은 섬의 민간인 사기를 높였다. 민간인들은 공습을 일본의 억압적인 통치로부터 싱가포르가 해방될 징조로 보았지만, 이 믿음을 일본 식민당국에 숨기기 위해 폭격에 대해 일반적으로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놓았다.[42] B-29는 무적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었고, 민간인들은 일본군을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에 환호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항하기 위해 식민 당국은 격추된 B-29의 잔해와 생존 승무원, 그리고 슈퍼포트리스가 격추되는 영상 자료를 전시했다. 이러한 선전 활동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일본은 또한 1월 11일과 2월 24일 (후자의 공습은 무함마드의 생일 축하와 겹쳤다) 모스크가 입은 피해를 강조하며 싱가포르 무슬림이 공습에 반대하도록 선동하려는 시도에서도 실패했다.[43] 공습에 대한 대중적 지지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은 군사 시설을 목표로 삼는 정책으로 인해 민간인 사상자가 적었고, 미국 폭격이 매우 정확한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44] 그러나 추가 공격에 대한 예상으로 사람들이 생필품을 비축하면서 식량 및 기타 상품 가격이 상승했으며, 이러한 사재기와 폭리를 막으려는 일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45]

같이 보기

각주

  1. Toh (2009), pp. 908–909
  2. Bayly and Harper (2004), p. 106
  3. Hack and Blackburn (2004), pp. 22–23
  4. Toh (2009), p. 909
  5. Bayly and Harper (2004), pp. 117, 136–137, 139
  6. Cate (1953), p. 156
  7. Liew (2006), p. 429.
  8. Royal Navy (1995a), pp. 85–87
  9. Frei (2008), p. 220
  10. Toh (2009), p. 915
  11. Toh (2009), p. 914
  12. Polmar (2004), p. 6
  13. Wolk (2010), pp. 97–98
  14. Wolk (2010), pp. 99–100
  15. Cate (1953), pp. 103, 115
  16. Dull (2007), pp. 313, 315
  17. Toh (2009), p. 917
  18. Toh (2009), pp. 905–906
  19. Royal Navy (1995c), p. 127
  20. Cate (1953), p. 157
  21. Huff (1997), pp. 245–246
  22. Cate (1953), pp. 157–158
  23. Cate (1953), p. 160
  24. Middlebrook and Mahoney (1979), p. 58
  25. Kirby (1965), p. 405
  26. Cate (153), pp. 160–161
  27. Cate (1953), pp. 162–163
  28. Toh (2009), pp. 921–923
  29. Kratoska (2018), p. 304
  30. Cate (1953), p. 162
  31. Cate (1953), p. 163
  32. Combat Chronology, 1941-1945 – U.S. Army Air Forces in World War II, Kit C. Carter and Robert Mueller –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U.S.), 1975,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Digitized 31 Jan 2011, page 684, ISBN 0912799684, 9780912799681
  33. Cate (1953), p. 158
  34. Chilstrom (1993), p. 14
  35. Cate (1953), p. 159
  36. Kirby (1965), p. 214
  37. Royal Navy (1995b), pp. 45–46
  38. Park (1946), p. 2148
  39. Royal Navy (1995b), p. 56
  40. Toh (2009), pp. 912–913
  41. Toh (2009), pp. 913–914
  42. Toh (2009), p. 910
  43. Toh (2009), pp. 919–920
  44. Toh (2009), pp. 920–921, 923
  45. Toh (2009), p. 918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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