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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치-10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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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치-10 작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일부

크로아티아 지도상의 서슬라보니아 도시 (1991년 12월 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점령 지역은 빨간색으로 표시)
날짜1991년 10월 31일~11월 4일
장소
크로아티아 서슬라보니아
결과 크로아티아의 승리
교전국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Yugoslavia 유고슬라비아
파일:Flag of Serbian Krajina (1991).svg 서슬라보니아 세르브인 자치주
지휘관
크로아티아 프라뇨 코바체비치 파일:Flag of Serbian Krajina (1991).svg 라데 차크마크
군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서슬라보니아 영토방위군
병력
병력 2,647명
포병 48명
장갑차 12대
병력 c. 1,750명
포병 22명
장갑차 8대
피해 규모
사망자 5명
부상자 수십명
사망자 24명
세르브 민간인 사망자 22명, 이재민 4,000명

스와치-10 작전 또는 옥토스-10 작전(언어 오류(hr): Operacija Otkos-10)은 크로아티아 육군(Hrvatska vojska, HV)이 서슬라보니아빌로고라산에 주둔한 서슬라보니아 세르브인 자치주 영토방위군을 상대로 감행한 군사 공세이다. 1991년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에 발생한 이 작전은 크로아티아의 승리로 끝났고, 이 성공으로 11월 말에서 12월까지 파푸크산에서 이어진 파푸크-91 작전으로 크로아티아군의 추가 진격이 가능해졌다. 연말까지 HV는 파푸크를 장악하여 동슬라보니아와 나머지 크로아티아 사이의 보급로를 확보했다.

이 공세에는 HV가 점령된 지역의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대부분의 이주가 동반되었다. 난민은 처음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도피했지만, 대부분은 곧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점령한 동크로아티아의 버러녀 지역에 정착했다. 이 공세는 크로아티아군이 민족 청소시민권 침해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비난은 유럽 공동체 감시단에서 반박되었다. 작전 한 달 후, 흰 독수리로 알려진 후퇴하는 준군사 부대가 보친 학살을 자행했으며 그들의 전쟁범죄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기소되었다.

배경

1991년 크로아티아의 유고슬라비아 전역 동안,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ugoslovenska Narodna Armija, JNA)의 제5(바냐루카) 군단은 서슬라보니아를 통해 오쿠차니에서 다루바르비로비티차로 북진하고, 오쿠차니에서 쿠티나로 보조해서 진격하는 임무를 맡았다.[1] 이것은 본질적으로 동슬라보니아에서 약 일주일 만에 진격하여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JNA의 주요 공격선과 일치했다. 이 연결은 서쪽으로 자그레브바라주딘으로의 추가 진격을 용이하게 하도록 고안되었다.[2] 이 군단은 오쿠차니 근처에 제265기계화여단의 전투단을 배치하여 9월 21일에 시작되어 파푸크 산에 도달한 진격을 지원했다. 군단은 진격 중 포병 여단 1개와 동력 여단 2개를 증원받았으나, 다른 지역에서 JNA가 겪었던 탈영 및 사기 문제는 바냐루카 군단에서도 존재했다.[3]

JNA는 놉스카, 노바그라디슈카, 파크라츠 사이에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bor Narodne Garde, ZNG)에게 저지되었고, 서슬라보니아 세르브인 자치주 영토방위군(Teritorijalna odbrana, TO) 부대는 JNA의 지원 없이 파크라츠 북쪽의 빌로고라와 파푸크(비로비티차와 슬라티나 근처)에 진지를 구축했다.[4] 9월 21일 그루비슈노폴례 동쪽 7 km 및 다루바르 북쪽 8 km 떨어진 이바노보셀로를 점령한 것은 빌로고라 산맥의 TO 점령 지역 중 가장 넓은 영토였다. 이 마을은 같은 날 ZNG의 반격으로 재탈환되었으며, 7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당했다.[5]

10월 1일, 바냐루카 군단은 사흘 후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하기 전 정찰 공격을 시작했다. 이 진격으로 놉스카와 노바그라디슈카 외곽에 방어 진지가 구축되었다.[6] 10월 6일, JNA가 바틴야니를 점령하면서 파크라츠는 잠시 고립되었다. 바틴야니는 마을 북서쪽 4 km 떨어져 있었고, 마을에 보급할 수 있는 마지막 도로를 차단했다. ZNG는 같은 날 이 마을을 재탈환하여 JNA를 6 km 뒤로 밀어냈으며, 이 과정에서 22명이 사망했다.[5] JNA는 10월 8일 야세노바츠를 점령했고, 나흘 후 리피크와 파크라츠 일부가 점령되었다.[6] 그 무렵 서슬라보니아에서 JNA의 공세는 추진력을 잃었고,[7] ZNG는 10월 13일과 16일 놉스카 북쪽과 노바그라디슈카 서쪽에서 소규모 진격을 감행했다.[5] 크로아티아 정부는 더 이상 전쟁 상황을 위급하다고 보지 않았고, 10월 15일 반격 계획을 명령했다.[8] 10월 29일, ZNG는 놉스카와 노바그라디슈카 근처의 JNA와 TO가 점령한 진지에 대해 허리케인-91 작전을 시작했다.[9]

빌로고라 산맥 지역의 TO 부대는 공식적으로 니콜라 마리치 대령이 지휘하는 제28파르티잔사단에 속했다.[10] 실제로 이들은 약 1,750명의 병력, 8대의 장갑전투차량, 10문의 대포, 12문의 박격포로 구성되었다.[11] TO 부대는 말리 그르데바츠와 벨리카페라토비차 마을에 본부를 둔 두 개 대대로 조직되었고, 라데 차크마크가 지휘했다.[12] TO가 점령한 지역 북쪽에는 ZNG가 비로비티차 지역에 제127 보병여단을 배치했다.[13] 빌로고라 산맥 남쪽의 그루비슈노폴례 지역에서는 ZNG 병력이 제57 독립대대(나중에 제77 독립대대로 개칭)의 지휘를 받았다.[14] 프라뇨 코바체비치 대령이 지휘하는[15] 공격 ZNG 병력은 2,647명의 병력과 12대의 장갑차, 18문의 대포, 20문의 120 mm 박격포로 구성되어,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TO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방어하는 TO 병력을 능가했다. ZNG는 원래 제105 보병여단과 벨로바르의 오메가 특수경찰중대를 배치할 계획이었으나, 이 부대들은 다른 곳에 필요하여 공세에 투입할 수 없었다.[11]

시간대

스와치-10 작전(빌로고라 '91로도 알려짐)[16]은 크로아티아군이 비로비티차–론차리차–그루비슈노폴례 도로를 재탈환하고, 해당 지역(TO 또는 JNA가 점령한 서슬라보니아 최북단)에 배치된 TO 병력을 차단 및 격퇴하는 것을 목표로 계획되었다. 이러한 목표는 바냐루카 군단이 비로비티차 방향으로 돌파를 시도할 경우 지원을 거부하고, 자그레브와 슬라보니아를 연결하는 마지막 보급로를 통제하며, 크로아티아의 방어 진지를 단축하고, 병력과 민간인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다.[17] 공세는 원래 10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제105 보병여단과 특수경찰 부대의 불참으로 2주 연기되었다. 작전 계획은 ZNG가 48시간 내에 빌로고라 산의 두 TO 대대를 먼저 차단하고, 공세 2단계에서 고립된 TO 병력을 격퇴하는 것을 요구했다.[18] 이 작전은 10월 7일 벨로바르 작전 지역 사령관인 미로슬라브 예제르치치 대령이 승인했다.[19]

공세는 10월 31일 오전 6시, 50분간의 탄막 사격 후 ZNG가 3개 집단으로 진격하면서 시작되었다.[19] 남쪽에서는 제57 독립대대, 북쪽에서는 제127 보병여단, 북서쪽에서는 제127 보병여단 제1대대가 진격했다.[20] 그날 ZNG는 그루비슈노폴례–벨리키 그르데바츠 도로 북서쪽의 벨리카 바르나, 고르냐코바치차, 즈린스카 마을을 점령하여 그루비슈노폴례를 확보했다. 또한 ZNG는 비로비티차–그루비슈노폴례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말라페라토비차(그루비슈노폴례 동쪽 4 km 지점) 외곽에 도달했고, 론차리차(비로비티차 남쪽 11 km 지점)에 접근했다.[13] 특히 TO 병력은 론차리차 근처에서 강력한 저항을 펼쳤지만, 전장 상황은 절망적이라고 전해졌다. TO는 유고슬라비아 공군에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했고,[21] 이에 4~6대의 항공기가 배치되었다.[11]

11월 1일, ZNG는 그루비슈노폴례 북서쪽 지역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했고, 다음 날 TO 병력은 파푸크산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론차리차와 다프체바츠키 브르자니(말라 페라토비차 북동쪽 약 2 km 떨어진 마을로, 비로비티차–그루비슈노폴례 도로변)는 11월 3일 크로아티아군이 강력한 TO 저항을 극복한 후 점령되었다.[13] 그날, ZNG는 크로아티아 육군(Hrvatska vojska, HV)으로 개칭되었다.[22] 마을 점령 후, 그루비슈노폴례와 비로비티차에서 진격하던 HV 병력이 합류했다. HV는 벨리카 페라토비차 마을을 점령했는데, 이 마을은 비로비티차–그루비슈노폴례 도로를 따라 진행된 진격과 공세 첫날 그루비슈노폴례 북서쪽 진격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11월 4일, HV가 해당 지역을 확보한 후 작전은 종료되었다고 선언되었다.[13]

후속 작전

파일:Map 4 - Croatia - Western Slavonia - September 1991 - January 1992.jpg
1991년 9월~1992년 1월 서슬라보니아 전투 지도. 스와치-10 작전은 지도 상단 근처의 돌출부(살리언트)에 묘사되어 있으며 스와치-10 작전의 후속 작전인 파푸크-91 작전은 지도 중앙 부분에 묘사되어 있다.

바스타이스키브르자니 전투

11월 10일, 제57 독립대대는 벨리키밀레티나츠(스와치-10 작전으로 점령된 지역 동쪽)의 TO에 맞서 진격하여 같은 날 마을을 점령했다. 이웃한 말리 밀레티나츠는 다음 날 HV에 의해 점령되었고, 11월 12일 HV는 바스타이스키브르자니와 레키치 마을을 점령했다. 이틀 후 TO는 반격하여 HV 병력 9명을 사살하고 10여 명을 부상시켰지만, HV 방어선은 유지되었다. 흰 독수리 준군사 병력 50명으로 보강된 TO는 바스타이스키브르자니를 재탈환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를 했다. 이는 잘 준비되었고 포병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어하던 HV 병력이 신호정보를 통해 공격을 미리 감지하고 보강되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흰 독수리 부대는 이 전투에서 46명이 사망했다.[23]

파푸크-91 작전

파푸크-91 작전은 스와치-10 작전에 이어 비로비티차-오시예크 도로에서 남쪽으로 진격하여 파푸크산과 프순산에서 TO 병력[24](제28 파르티잔 사단 소속)을 소탕하는 작전으로 계획되었다.[10] 이 공세는 11월 23일 슬라티나에서 열린 회의에서 예제르치치가 승인했으며, 이 회의에는 HV 감찰관 마르틴 슈페겔, 제123보병여단 지휘관 밀리옌코 차르냐츠 대령, 제127보병여단 지휘관 주로 데차크 대령, 제136보병여단 지휘관 요시프 체르니 대령, 기타 지원 임무를 맡은 부대 지휘관이 참석했다.[24]

이 작전은 11월 28일 시작되었다. HV는 그루비슈노폴례와 오라호비차를 가로지르는 전선에서 거의 60 km 동쪽으로 진격했다.[24] 12월 2일, 파푸크산의 기지를 지키던 병력을 교대하기 위해 가던 제123보병여대 분견대가 매복 공격을 받아 병사 11명이 사망했다. 12월 10일, HV는 노바그라디슈카 북쪽의 프순산맥 지역으로 그라디나라는 암호명으로 공세를 펼쳐 슈녜가비치, 신리예, 골로브르다츠, 부차크체차프스키, 루셰바츠, 예미노바츠, 체차바츠, 오프르시나츠 마을을 점령했다. 이 진격으로 노바그라디슈카–포제가 도로의 안전이 향상되었고, 허리케인-91 작전의 노바그라디슈카 축선 우측 측면이 확보되었다.[25]

12월 12일부터 15일까지 HV는 스와치-10 작전으로 점령된 지역 남동쪽의 줄로바츠 주변 마을들을 점령했다. 동쪽에서 접근하는 HV 부대는 12월 14일부터 15일까지 줄로바츠 남동쪽 약 10 km 떨어진 곳에 있는 보친을 점령했다.[25] 보친과 줄로바츠는 후퇴하는 TO와 준군사조직인 흰 독수리 부대의 공격으로 심하게 파괴되었고,[26] 후자는 12월 13일 보친에서 민간인 43명을 살해했다.[27][28] 희생자의 시신은 훼손된 채 묻히지 않고 남겨졌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함으로 추정된다.[29]

12월 16일, HV는 소콜리나라는 암호명으로 고르니브르호브치, 카멘스키부차크, 카멘스키슈슈냐리 마을을 점령했다. 이 마을들은 보친 남쪽 약 15 km 및 벨리카 서쪽 약 10 km 떨어져 있었으며, 이로 인해 TO 병력은 파푸크산의 남서쪽 경사면과 더 남쪽에 있는 프순산으로 제한되었다. 다음 날, HV는 요하네스베르그라는 암호명으로 노보즈베체보와 마을 내 TO 보급창(보친과 카멘스키 부차크 중간 지점)을 점령했다.[25] 12월 18일, HV는 카멘스키부차크에서 남서쪽으로 진격(라니슈타라는 암호명)하여 스트리예제비차, 보그다시치, 아마토브치, 카멘스키셰오브치 마을을 점령하고 카멘스카(파크라츠-포제가 도로변) 마을에서 1 km 이내까지 진격했다. 다음 3일 동안 HV는 해당 지역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30]

12월 21일, HV는 카멘스카와 인접한 미야치 마을에 대해 프르코스라는 암호명으로 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TO는 카멘스카 북쪽 지역(12월 24일 사지예 마을 포함)에서 철수했고, 다음 날 카멘스카와 미야치에서 후퇴했다. 파푸크와 프순 서쪽의 파크라츠 지역에 배치된 HV 병력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파푸크-91 작전을 지원했으며(12월 24-25일 데레자, 고르니 그라호블랴니, 도니 그라호블랴니, 쿠소네, 슈파노비차 마을을 점령), 서쪽과 동쪽에서 진격하는 HV 부대 사이의 파크라츠-포제가 도로를 15 킬로미터 (9.3 마일) 미만으로 남겼다.[30] 파푸크-91 작전은 12월 26일 제123, 제127, 제136 여단 병력이 부치예에서 합류하면서 종료되었으며, 마지막 날의 진격은 벨레비트라는 암호명으로 진행되었다.[31]

여파

이 작전으로 HV 병사 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32] JNA 병력과 세르브계 크로아티아 반군 24명도 사망했으며, 세르브 민간인 22명도 사망했다. 작전 전 몇 주 동안 17명의 세르브 민간인이 추가로 사망했다.[33] 이 작전으로 크로아티아군은 서슬라보니아의 370 제곱�킬로��터 (37,000 ha)를 (21개 마을 포함) 확보했다. HV는 비로비티차-그루비슈노폴례 도로를 확보했지만, 해당 지역에 배치된 TO 병력을 고립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는 나중에 인력 부족 때문으로 지목되었는데, 파크라츠에 배치된 제105보병여단이나 제73독립(가레슈니차) 대대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HV의 진지는 파푸크-91 작전에서 서슬라보니아 세르브인 자치주에 대한 추가 진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34] 일부 자료에서는 스와치-10 작전과 파푸크-91 작전을 혼동하여 후자를 스와치-10 작전의 일부로 설명하기도 한다.[35] 파푸크-91 작전은 동슬라보니아와 자그레브를 연결하는 도로에 대한 위협을 제거했다. TO 병력은 남쪽으로 밀려나 도로가 포병 사거리 밖으로 벗어났다.[36] 파푸크-91 작전에서 HV는 110개 정착지[24]와 1,230 제곱�킬로��터 (123,000 ha)의 영토를 점령했다.[20]

2008년, 그루비슈노폴례에 공세에 참여한 HV 병사를 위한 기념비가 공개되었다.[37] 또 다른 기념비는 1991년 12월 2일 파푸크-91 작전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한 제123보병여단 소속 병사 11명을 기리기 위해 파푸크산에 세워졌다.[38] 1991년 말 서슬라보니아에서 시행된 스와치-10, 파푸크-91, 허리케인-91 작전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최초의 공세적인 해방 작전으로 간주된다.[39]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보이슬라브 셰셸을 12월 13일 보친에서 준군사조직인 흰 독수리 부대가 저지른 살해를 포함한 여러 전쟁범죄로 기소했다. 재판은 2012년에 종료되었지만, 2013년 8월까지 판결은 아직 보류 중이었다.[40][41]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이었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도 보친에서의 범죄로 ICTY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재판이 끝나기 전에 사망했다.[42]

난민

스와치-10 작전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약 4,000명의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민간인이 피난했다.[43] 세르비아 소식통에 따르면, 주민들은 공세 첫날부터 대피하기 시작했고 둘째 날에는 약 800대의 차량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들어섰다. 후퇴하는 행렬에는 군 복무 연령의 남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싸우기를 거부했다.[44] 상당수의 난민들은 버러냐에 정착했으며, 그곳의 집은 이주한 크로아트인의 소유였다.[45] 피난하는 민간인의 보고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크로아티아를 민족 청소 및 기타 시민권 침해를 했다며 비난했다. 알렉산다르 미트로비치 부총리는 유럽 공동체 감시단에 서한을 보내 크로아티아가 세르브 민간인에게 개인적 및 재산적 피해를 입히고 이주를 강요했다고 비난했다. 비록 이러한 비난은 10월 25일 서슬라보니아 세르브인 자치주 당국이 작성한 대피 계획[46]과 해당 지역에 남아 있던 민간인들의 증언(TO가 주민들에게 "우스타샤가 오고 있다[...] 모든 세르브인을 죽일 것"이라며 도피를 명령했다는 내용)으로 반박되었지만,[47] 세르비아 언론은 선전 소식을 광범위하게 보도했다. 보도에선 크로아티아의 공세를 제2차 세계 대전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저지른 학살과 비교했다.[48] 11월 3일,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은 18개 세르브 마을의 파괴를 인용하며 공세를 규탄했고, 다음 날 세르비아 국민의회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했다.[49]

상황(및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의 요청)에 대응하여 ECMM 팀은 11월 6일 공세의 영향을 받은 지역을 시찰했으며, 언론 보도에서 잔학 행위가 발생했다고 지적된 벨리카페라토비차, 말라페라토비차, 고르냐라셰니차, 도냐라셰니차, 론차리차 등의 장소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11월 6일 ECMM 보고서는 이러한 비난을 반박했다. 팀은 해당 지역에 남아있는 세르브인 부부 한 쌍만을 발견했지만, 이들은 HV가 남겨진 민간인을 학대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ECMM 팀은 조직적인 가옥 파괴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여러 건물이 포격 피해를 입었고, 소수의 주택, 농장 및 건초더미가 최근에 불에 탔다고 보고했다. 팀은 HV가 책임이 있는지, 마을 사람이 서슬라보니아 세르브인 자치주 지도자들에게 복수했는지, 파괴가 후퇴하는 부대의 초토화 정책의 결과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다.[50]

1991년 말 서슬라보니아에서 HV의 공세(허리케인-10, 스와치-10, 파푸크-91 작전)는 총 20,000명의 세르브 난민을 발생시켰다. 이들은 JNA가 세르브계 크로아티아군에게 철수를 명령하자 해당 지역을 떠났고,[51] JNA가 점령한 동크로아티아의 버러냐 지역에 정착했다.[52] 난민 재정착은 1991년 말 점령된 다뉴브강 지역의 민족 구성을 변경하려는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의 노력과 일치했으며, 이는 비세르브계 민간인 추방의 부차적인 동기가 되었다.[53]

정전

1992년 1월 3일 정전 (군사)으로 밴스 계획이 이행되었으며, 이는 유엔 보호 지역(UNPAs)으로 지정된 지역의 민간인을 보호하고 크로아티아에 유엔 평화유지군을 배치하는 것을 허용했다.[54] 이 계획에 의해 정의된 UNPAs 중 하나인 UNPA 서슬라보니아는 놉스카와 노바그라디슈카의 일부 지자체와 다루바르, 그루비슈노폴례, 파크라츠 전체를 포함했다. 이 UNPA는 1월 3일 JNA가 점령한 지역, 북쪽의 추가 영토(1991년 말 HV가 재탈환한), 서슬라보니아 세르브인 자치주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던 마을(예: 그루비슈노폴례 및 다루바르)을 포함했다.[55] 처음에 10,000명으로 예상되었던 평화유지군(유엔 보호군, UNPROFOR)은 3월 8일에 배치를 시작했다.[56][57]

각주

  1. Marijan 2012b, 262쪽
  2. Marijan 2012b, 261쪽
  3. Marijan 2012b, 266쪽
  4. CIA 2002, 102쪽
  5. Nazor 2007, 144쪽
  6. Marijan 2012b, 269–270쪽
  7. Marijan 2012a, 110쪽
  8. Marijan 2012a, 107쪽
  9. Nazor 2007, 134쪽
  10. Škvorc 2010, 119쪽
  11. Nazor 2007, 138쪽
  12. Bašić & Miškulin 2010, 470쪽
  13. Bašić & Miškulin 2010, 485쪽
  14. Bašić & Miškulin 2010, 476쪽
  15. Bašić & Miškulin 2010, 483쪽
  16. Glas Slavonije & 3 August 2012.
  17. Nazor 2007, 137쪽
  18. Nazor 2007, 137–138쪽
  19. Nazor 2007, 136쪽
  20. Nazor 2007, 130쪽
  21. Bašić & Miškulin 2010, 485–486쪽
  22. MORH & 8 July 2013
  23. Nazor 2007, 140쪽
  24. Nazor 2007, 141쪽
  25. Nazor 2007, 145쪽
  26. Duijzings 2000, 54–55쪽
  27. Duijzings 2000, 55쪽
  28. ICTY & 15 January 2003, 6쪽
  29. Gow 2003, 163쪽
  30. Nazor 2007, 146쪽
  31. Nazor 2007, 146–147쪽
  32. Večernji list & 1 November 2014
  33. Srna & 30 October 2013
  34. Nazor 2007, 139쪽
  35. Thomas & Mikulan 2006, 50쪽
  36. Štefančić 2011, 428쪽
  37. Virovitica.net & 4 November 2008
  38. 034portal.hr & 2 December 2011
  39. MORH 2011, 11쪽
  40. Jutarnji list & 20 March 2012
  41. The New York Times & 30 August 2013
  42. ICTY IT-02-54, 1쪽
  43. Srna & 30 October 2013
  44. Bašić & Miškulin 2010, 486쪽
  45. Bašić & Miškulin 2010, 491–492쪽
  46. Bašić & Miškulin 2010, 487쪽
  47. Bašić & Miškulin 2010, 488쪽
  48. Bašić & Miškulin 2010, 489쪽
  49. Bašić & Miškulin 2010, 489–490쪽
  50. Bašić & Miškulin 2010, 490쪽
  51. HRW & 13 February 1992, note 28
  52. HRW & 21 January 1992,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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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서적
저널 논문
뉴스 보도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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