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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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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조약(한국 한자: 韓日倂合條約) 또는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일본어: 韓国併合に関する条約 간코쿠 헤이고니 간스루 조야쿠[*])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일본 제국친일파 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이다.

한일합방조약(한국 한자: 韓日合邦条約)이라고도 불린다.[1] 친일파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불법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이날 일본 제국 천황이 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이라 칭하는 건과 한국 병합에 관한 조서를 공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경술국치(한국 한자: 庚戌國恥), 국권피탈(한국 한자: 國權被奪),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양도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정미7조약으로 군대 해산을 당하고, 기유각서로 사법권과 감옥사무까지 잃은 대한제국은 결국 멸망 했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한편 병합조약 직후 황현, 한규설, 이상설 등 일부 지식인과 관료층은 이를 일방적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늑약으로 보고 극렬한 반대의사를 보였고, 한일 병합 직후 14만 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2]

한일 병탄

파일:General power of attorney to Lee Wan-Yong signed and sealed by Sunjong.jpg
한일 병탄 조약시 전권위임장. 관례와는 다르게 순종의 이름(坧)이 서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坧은 순종의 친필이 아니다.
파일:Huengbokheon.jpg
창덕궁 대조전에 있는 흥복헌. 1910년 8월 22일 이곳에서 한일 병합 조약을 찬성하는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옛 건물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건물을 1920년 중건한 것이다.

일본 제국은 병탄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두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병합청원’의 시나리오를 준비시키고 있었다. 송병준은 이에 앞서 1909년 2월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 매국흥정을 벌였다.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에게 ‘합병’을 역설한바 있었으나 일본 제국 측의 병탄 계획 때문에 일이 늦어지게 되자 직접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서 가쓰라 다로 총리 등 일본 제국의 조야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흥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이완용은 송병준의 이런 활동을 눈치채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와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제국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아 미도리와 교섭에 나서도록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려는 전술이었다.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되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자기 휘하의 내각이 조선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

이런 시나리오를 연출하면서 일본 제국은 점차 ‘병탄’의 시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판단, 시게마루를 내세우고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하여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다.[3]

또한 일본 제국은 조약이 누출되어 조약에 반대하는 소요 등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나남·청진·함흥·대구 등에 주둔한 일본군을 밤을 틈타 서울로 이동시켰다. 조약 체결일인 8월 22일 응원병력과 용산에 주둔한 제2사단이 경비를 섰다.[4]

창덕궁 흥복헌[5]으로 불려온 대신들 중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이후 이른바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8명 친일파 대신은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였다. 이 8명은 한일 병탄 조약 체결 이후 공을 인정받아 조선귀족 작위를 수여받았다.


한일병합조약 전문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국 황제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대한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대한제국 황제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1. 대한제국 황제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2. 일본국 황제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대한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함.
  3. 일본국 황제는 대한제국 황제,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함.
  4. 일본국 황제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5. 일본국 황제는 공로가 있는 대한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줌.
  6. 일본국 정부는 앞에 기록된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대한제국의 시정을 위임하여 해당 지역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대한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전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적당한 자금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관리에 등용함.

본 조약은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 황제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위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함.

융희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메이지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

체결 직후

왕의 친정체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

1900년 대한제국 돈녕원(敦寧院)이 개설되면서 부활하였던 귀족원이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영구히 폐지된다.[6] 이때 돈녕원은 왕의 외척이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먼 친척들을 대우하여 직함을 주기 위한 관부에 불과하였다.[6] 1890년 의회가 개설된 일본은 정부가 1892년 중의원(衆議院)을 해산하고 선거에 간섭하였으나[7] 입헌군주제 국가였다.[8]

고종은 1905년 5월에 형법대전을 반포하기도 하였으나 민법이나 헌법을 더 이상 제정하려고 하지 않았다.[9] 민간에서는 1905년 이후 헌법 제정과 정치 개혁 논의가 본격화되었다.[9] 입헌 논의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병탄됨으로써 일체 중단된다.[9]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신한민보》가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자에서 "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을 내놓는다.[10]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10]

국민의 권리를 헌법 규정의 범위 안에서 보장

자연법 사상의 법제화

일본에는 1889년에 흠정(欽定)의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되어 있었다.[11] 그에 따라 제한적이지만 헌법이 규정하는 범위에 한해 종교, 직업, 언론 등의 자유라는 국민의 권리가 인정되게 된다.[11] 시민혁명이 철저하게 수행되지 못한 나라의 체제 하에서는 자연법 사상이 부정되고 실정법 위주의 법사상, 법실증주의(法實證主義)로 대체되며, 천부인권저항권은 부정된다.[12]

신앙의 자유를 제도상 보장

  • 일본 신토

신도 국교화정책이 국내외의 비판을 받게 되자 일본 정부는 1882년 “신사신도(神社神道)는 국가의 제사이며,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신사신도의 초종교적 절대우위를 확립하고 제사와 종교의 분리 조치를 취하며 신사신도의 초종교적 절대우위를 확립하고, 신교의 자유, 정교분리론에 의한 국내외의 비판을 봉쇄하고자 하였다.[13] 종교에 대해서는 1889년 2월 발표 포고한 《제국헌법》 제28조에서 “일본 신민(臣民)은 안녕 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의무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신교(信敎)의 자유를 갖는다”고 규정하여 제한적 범위에서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었다.[13]

  • 대종교

1910년 단군교가 대종교로 개칭하며 중광(重光)이 일어난다.[14] 단군교는 1909년에 단군을 대황조로 하는 민족고유의 종교를 창업한 것이다.[14] 조선 후기부터 구국의 성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천제단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구국을 위한 의례가 행하여지면서 제의가 천제(天祭)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15]

  • 천도교 불교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제국 고종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설립된 보성전문학교가 운영난을 겪다가 2010년 12월 천도교 측에 인수된다.[16] 한양 도성 내에 절집이 들어서는 것은 1910년 4월, 여러 절의 승려들이 서울 북부 박동(礡洞, 지금의 수송동)에 각황사(覺皇寺)를 지었는데, 이것이 도성 내에 들어와 포교한 최초로 추정된다.[17]

  • 천주교

1895년에는 천주교 신자 수가 25,988명에 이르러 1866년의 천주교 박해 이전 수준으로 복원될 수 있었다.[18]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왕조가 멸망했던 1910년에는 신자 수가 73,517명으로 집계되었다.[18] 그러나 개항 이후 새롭게 선교를 시작한 개신교의 성장은 천주교에 비하여 월등히 높았다.[18] 그 결과 1907년에 이르러 개신교의 신자 수는 천주교를 능가하기 시작했다.[18]

  • 종교시설이 아닌 개신교계 건물 건축

한국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미국인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19]의 도움으로 1910년 정신 여학교 본과 건물을 건립한다.[20] 1887년 미국 북장로교정동에서 개교 초기에는 학생 모집이 어려워 고아였던 3~4명의 여아를 데려다 수업을 시작하였던 정신 여학교는, 고종 32년인 1895년에 연지동으로 이전하며 사립 연동 학교(蓮洞學校)로 교명을 변경하기도 했었다.[20] 인근에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1895년 초가 한채를 매입하여 예배처소로 삼았던 위치에, 1907년에는 연동교회가 1,200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한바 있었다.[21]

1911년에는 1890년에 설립된 초교파적 연합 사업 단체인 대한기독교서회가 새로 2층 건물을 짓는다.[22] 감리교계 협성신학교는 교회 건물을 빌려서 교육하다가 1910년 1월에 현재의 위치로 학교 건물을 마련하고 이전한바 있었다.[23]

국내 최초의 근대적인 회사에 관한 기본법 시행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자마자 한국에서의 공업발전을 억압하는 정책으로 《회사령》을 공포했다.[24] 《회사령》은 한국내에서 회사를 설립하거나 한국 외에서 설립한 회사의 본점이나 지점을 한국에 설치할 경우에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24]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최초의 근대적인 회사에 관한 기본법(회사법, Korean Company Law)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조선민사령”에 의하여 의용된 일본 상법 제2편이었다.[25] 조선회사령이 시행되자 사설회사인 구포저축주식회사는 금융대부업은 할 수 있었으나 예금업은 취급할 수 없게 되어,[26] 구포저축주식회사의 후신으로 우리 나라 최초 민족계 지방은행으로 구포은행이 설립된다.[27]

민간에서 사치스러운 건물의 건축

벽수산장은 내외부의 화려함으로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다.[28] 벽수산장에 대한 당시 미디어의 기사는 사치스러운 건물이라는 부정적 표현이 대부분이었다.[28] 이에 윤덕영은 실제 거주하지 못하고 그가 신봉하던 중국계 종교인 홍만자회(紅卍字會)의 법당으로 쓰게 된다.[28]

벽수산장은 1913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공사 3년 만인 1917년 완공했다고 전해진다.[28] 불란서 주차공사로 파리에 있었던 민영찬은 입국할 때 귀족 별장의 설계서를 조선에서 짓겠다고 복사해왔는데 실현하지 못했다.[28] 이때 윤덕영은 민영찬이 가져온 도면의 건축은 훌륭한 터에 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장소를 물색하다가 송석원 터를 선택하였다고 한다.[28] 윤덕영은 1910년에는 한일강제병합의 큰 공으로 다른 공로자보다 은사금을 더 받았다.[28] 이때 은사금은 옥인동 47번지로 일대를 매입하는 자금이었다.[28]

우리나라 근대 도로의 기본 형태의 마련

1911년 4월 제정한 《도로규칙》과 관리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건설한 도로의 52.14%가 1910년대에 건설되어 우리나라 근대 도로의 기본 형태가 마련되었다.[29]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한다.[30]

카톨릭계 사범학교 설립

  • 사범학교 설립

1911년 9월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백동(현재는 혜화동)에 독일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천주교 조선대목구장 뮈텔(Mutel) 주교의 요청으로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설립한다.[31]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한국의 중등 · 고등교육 및 실업 기술교육 등을 위한 교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08년 유럽 각국 가톨릭 수도회를 방문해 한국에서 선교하면서 교육을 담당할 단체를 초빙하려 하였다.[31]

  • 조약 체결전 실업계 학교 설립

1909년 독일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독일 공사관과 일본 통감부의 도움으로 동북부 지역 혜화동에 약 30,000 평의 대규모 수도원을 설립했었다.[32] 이 수도원은 독일인 마을과 다름이 없었는데, 실업 교육을 통한 조선인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1910년 숭공학교(崇工學校)에 설립하기도 하였었다.[32]

대한민국과 일본의 을사조약 무효 재확인

대한민국일본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에서 한일 병탄 조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하였다.[33] 단, 이에 관한 해석은 양자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대한민국 측에서는 '체결부터 원천적 무효'임을 주장한 반면, 일본 측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인해 현 시점(1965년)에서는 이미 무효'라고 주장한 것이다.[34] 대한민국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에 한일 병합이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확인하면서,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였다.[35]

논란

불법론

대부분의 대한민국 법학자들은 한일 병탄 늑약이 불법이라고 주장한다. 불법론자들은 이 조약에는 순종 황제의 최종 승인 절차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즉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순종의 위임장은 강제로 받아낼 수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최종 비준을 받는 절차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불법론자들은 그 증거는 조약문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조항 제8조에는 '양국 황제의 결재를 받았다'라고 적고 있으나, 조약문의 어떤 내용도 최종 비준 이전에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할 때 재가 사실을 미리 명시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병탄을 최종적으로 알리는 조칙에 옥새는 찍혀 있지만 순종의 서명이 빠졌다는 점이다. 불법론자들은 조칙이 성립하려면 옥새와 함께 서명이 들어가야 하는데, 결국 한일 병탄 조약이 불법적이라는 것은 옥새와 그에 따르는 의전절차가 무시되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한일합방조약을 알리는 황제의 칙유가 일본정부에 의해 작성됐으며, 순종이 이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거나 하지 않은 사실이 자료로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8월 29일 공포된 황제칙유에는 대한국새가 아닌 1907년 7월, 고종황제 강제 퇴위 때 일본이 빼앗아간 칙명지보가 찍혀 있다는 점을 들었다. 국가간의 조약에는 국새가 찍혀야 하는데, 칙명지보는 행정결제용 옥새이기 때문에 순종의 정식 제가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 1907년 11월 이후 황제의 조칙문에 날인해온 황제의 서명 ‘척(坧)’(순종의 이름)이 빠져 있는 점을 들었다. 당시 순종은 일본 제국 측의 병탄에 직면해 전권위원위임장에는 국새를 찍고 서명할 수밖에 없었으나 마지막 비준절차에 해당하는 칙유서명은 완강히 거부했다.

이어서 이태진 교수는 “한일강제합방조약의 법적결함은 결국 국제법상으로만 보아도 조약불성립론을 입증하며 1910년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식민통치도 아니고 일본이 한국을 불법적으로 강점한 상태”라고 주장했다.[36]

1965년 한일기본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제2조에서는 이 조약의 불법성을 시사하는데, 이는 평화조약을 새로맺는 시점에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조약체결 당시부터 원천무효라고 주장한다.

합법론

대부분의 일본 법학자들은 한일 병합 조약을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주요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조약문 자체에서 형식적인 문제가 없으며, 국제법상 조약에 준수한 조약이라는 것'이다.[37] 즉, 일본제국은 을사조약이 가졌던 여러 가지 부당함을 의식했던 것이지 한일병합조약에는 위임장, 조약문, 황제의 조칙 등 형식적인 문서들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한일병합은 불법적인 게 아닌 합법적이라는 것이 주 견해이다. 불법론에서 주장하는 국제법상의 조약불성립론은 주로 조약법에 관한 빈 협약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1980년에 발효된 것이므로 무효사유로서의 적용은 소급적용이 되며, 불가능하다. 또 당시의 국제관습법을 어긴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당시 제국주의적 침략이나 국가 지도자에 대한 매수, 위협이 성행하던 시대상을 고려하면, 해당 사항에 대한 법적 확신이 부족하므로 국제관습법 또한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현재 한일 병합 조약의 당사자인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으로, 일본 제국은 일본국으로 변화하였고, 대한민국과 일본국의 관계를 명시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서는 이 조약의 불법성을 시사하는데, 이를 근거로 조약 당시부터 무효(상대적, 절대적 사유를 모두 포함하여) 가 아니라, 평화조약을 맺는 시점부터 무효화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상황

일본에선 NHK가 정부의 지원하에 '한일강제합방 100주년 특집'을 준비하면서, 강제 병탄을 합법적인 것으로 비치게 한다는 우려를 낳았다.[38]

2010년 5월 10일, 한일 강제병탄 100주년을 맞아 한국의 대표 지식인 109명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일본 지식인 105명은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 병합이 원천무효’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라며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으며,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라고 지적했다.

성명서에는 한일병탄 조약을 애초부터 불법 무효로 해석한 한국정부의 해석이 맞으며, 한국의 독립운동 역시 불법운동이 아니라는 취지의 내용도 포함됐다.[39]

한국의 식민지 지배화

같이 보기

각주

  1.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책보세 펴냄
  2. 신복룡, 《한국사 새로보기》 (풀빛, 2001) 216페이지
  3.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67쪽. ISBN 978-89-86072-03-7.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4.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89쪽쪽. ISBN 89-7199-036-8.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5. 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 망국의 치욕 감내했던 흥복헌… 슬픈 역사만 오롯이, 서울신문, 2010년 8월 20일
  6. “지돈녕부사 (知敦寧府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3월 29일에 확인함. 
  7. “근대 > 겐요샤[玄洋社]”.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 3월 29일에 확인함. 
  8. “3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세계사(1979) > Ⅴ. 동양 사회의 변천 > 2. 근대화 운동 > (2) 일본의 근대화 > 제국주의의 바탕”. 《우리역사넷》. 역대 국사교과서.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 3월 29일에 확인함. 
  9. “입헌정체론 (立憲政體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5년 12월 18일에 확인함. 
  10.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5년 12월 18일에 확인함. 
  11. “근대 > 메이지 유신”.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 4월 2일에 확인함. 
  12. “인권 (人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4월 2일에 확인함. 
  13.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1. 일제의 종교정책”.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 9월 17일에 확인함. 
  14.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6. 대종교 > 1) 대종교의 창립과 의의”.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025년 12월 17일에 확인함. 
  15. 김도현 (2010). “太白山 天祭壇과 摩尼山 塹城壇의 儀禮 비교”. 《동아시아고대학》 (동아시아고대학회) 23: 79–126.  UCI G704-001430.2010..23.021
  16. “유형별 > 단체 > 보성 전문학교”. 《우리역사넷》. 교과서 용어 해설.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 3월 29일에 확인함. 
  17.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1. 불교와 유랑 예인, 비승비속의 세계 > 불교의 몰락과 승려 집단의 비승비속화”. 《우리역사넷》. 한국문화사. 국사편찬위원회. 2025년 12월 8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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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韓日 지식인 “1910년 한일병합조약 무효”..공동선언
  40. ISBN 978899107163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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