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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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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k Ching (肃清)
태평양 전쟁,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 일본의 말레이시아 점령의 일부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우차우에 세워진 추모비
위치싱가포르[a]
날짜1942년 2월 18일~1942년 3월 4일
대상중국인, 이후 싱가포르 민간인
종류숙청, 학살
사망자20,000명~50,000명 (공식 통계)
부상자확인 불가
공격자일본 제국 육군
  • 헌병대
  • 싱가포르 친일파
  • 일본 제국 정부
가담자야마시타 도모유키, 쓰지 마사노부
동기제국주의, 반중

숙칭(영어: Sook Ching, 중국어 간체자: 肃清大屠杀, 정체자: 肅清大屠殺)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2월 18일 싱가포르 함락 이후 일본군이 2월 18일에서 3월 4일 사이에 조직적으로 싱가포르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싱가포르 내 반일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체계적인 숙청이자 학살로,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 중국계 싱가포르인이 주로 목표가 되었다. 한편, 일본군은 학살을 자행하는 와중 '누가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싱가포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1942년 2월 8일부터 2월 15일까지 일본군은 이 섬을 점령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2월 15일 수적으로 밀린 연합군은 일본군에 항복했다. 이 항복은 영국 역사상 가장 큰 항복이다.[1] 싱가포르가 함락된 지 3일 후, 일본군은 '바람직하지 않은'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학살 대상은 중국인이었는데, 이는 1937년부터 시작된 중일 전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학살은 전반적으로 일본 제국 육군 소속 헌병대가 감독했다.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학살은 이후 일본이 점령한 말레이반도로 확산되었고 말레이반도 내에 있는 중국인들도 학살 대상이 되었다.[2] 이 시기 일본군은 식민지와 점령지 모두에서 강간, 학살, 강제 징용 등을 일삼으며 거주민들을 착취했다.

중국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벌인 조직적 학살 행위의 배경에는 아시아-태평양으로 영토를 확장한 일본 제국에 맞선 저항의 중심에 중국인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숙청이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 이후 중화민국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처럼 중국 문화권 내에서 반일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 및 말레이반도 내 학살 대상은 중국계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 연합군에 자원한 중국계 싱가포르인이나 말라야인, 그리고 삼합회에 속한 중국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일본군과 헌병대의 임의적인 기준에 따라 체포와 처형이 집행되었고, 반일 저항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들도 학살 대상이 되었다.

전후 일본 정부는 싱가포르 내 학살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는 인정했지만, 실질적인 피해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일본 정부는 총 피해자 수가 6,000명이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싱가포르 첫 총리이자 숙칭의 피해자였던 리콴유는 말라야 내 피해자까지 포함해 총 70,000명의 피해자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3] 1962년 대량의 공동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 싱가포르인들은 싱가포르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고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를 받기를 원했다.[4] 1966년 10월 25일 일본 정부는 결국 배상으로 싱가포르 500만 달러를 배상하기로 합의하고 이 중 절반은 보조금, 나머지 절반은 대출로 상환하기로 했다.[4] 그러나 이 배상금을 주는 일본 정부는 '속죄를 위한 행동'이라는 표현을 썼으며 '피해'나 '배상금'과 같은 자극적인 단어는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 정부는 공식 조사나 사망자에 대한 집계를 포함해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5] 일본 정부는 2025년 현재도 학살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1963년 숙칭을 비롯해 점령 기간 동안 희생된 민간인을 기리기 위해 시민 전쟁기념관을 건립했다. 1992년 숙칭이 벌어진 창이 해변, 카통, 풍골곶, 탄나메라 등의 지역에 싱가포르 국가유산국은 명판을 세워 이 지역을 문화유산 지역으로 분류했다.

어원

일본인들은 숙칭을 화교 숙청(華僑粛清, ') 또는 싱가포르 대검증(シンガポール大検証,)이라고 불렀다. 현재 학살에 대한 일본어 용어는 싱가포르 화교 학살 사건(シンガポール華僑虐殺事件, '싱가포르 화교 학살 사건')이다.

싱가포르의 싱가포르 국가유산위원회 (NHB)는 출판물에서 숙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6][7] 중국어에서 이 용어 (肅清)는 "근절" 또는 "숙청"을 의미한다.[8]

학살 계획

25군에 소속된 종군기자였던 히사카리 다카후미 대령의 전후 증언에 따르면, 전체 중국인의 20%에 해당하는 5만 명을 학살하라는 명령이 야마시타의 작전 참모부 고위 장교들, 즉 쓰지 마사노부 중령(계획 및 작전 책임자) 또는 하야시 다다히코 소령(참모장) 중 한 명으로부터 내려졌다고 한다.[9][10][11]

대학의 정치학 교수이자 일본 전쟁 책임 연구 및 기록 센터의 공동 책임자인 하야시 히로후미는 이 학살이 계획된 것이었으며, "싱가포르의 중국인들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부터 이미 반일 세력으로 간주되었다"고 썼다. 아래 구절에서 이 학살이 말라야의 중국인들에게도 확대될 예정이었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숙청은 일본군이 싱가포르에 상륙하기 전에 계획되었다. 25군 군정부는 1941년 12월 28일경 "화교 조작을 위한 실행 지침"이라는 계획을 이미 작성했다. 이 지침은 점령 당국에 불복하거나 협력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제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제25군 본부가 전쟁 초기부터 싱가포르와 말라야의 중국인 인구에 대해 가혹한 정책을 결정했음이 분명하다. 잘란 베사르 심사 센터 책임자인 헌병대 장교 오니시 사토루에 따르면, 헌병대장 오이시 마사유키는 조호르주 클랑에서 참모장 스즈키 소사쿠로부터 싱가포르 점령 후 숙청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지시의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육군 본부는 1942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클랑에 주둔했다...

싱가포르 학살은 몇몇 악인의 소행이 아니었으며, 일본이 중국에 대한 오랜 침략 과정에서 단련하고 적용한 접근 방식과 일치했으며, 이후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도 적용되었다. 일본군은, 특히 25군은 숙청을 이용해 잠재적인 반일 세력을 제거하고 현지 중국인과 다른 이들을 위협하여 군정을 신속하게 부과했다.[5]

같이 보기

참고

내용주

  1. 이후 말레이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각주

  1. Corrigan 2010, 280쪽.
  2. Rigg, Bryan Mark (2024). Japan's Holocaust: History of Imperial Japan's Mass Murder and Rape During World War II. Knox Press.
  3. Chew, Cassandra (2014년 6월 29일). “The Rickshaw puller who saved Lee Kuan Yew |”. 《www.straitstimes.com》 (The Straits Times). 2022년 2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2월 18일에 확인함. 
  4. Ho, Stephanie (2013년 6월 17일). “Operation Sook Ching”. 《Singapore Infopedia》. National Library Board Singapore 2013. 2021년 6월 18일에 확인함. 
  5. Hayashi Hirofumi (2009년 7월 13일). “The Battle of Singapore, the Massacre of Chinese and Understanding of the Issue in Postwar Japan”. 《The Asia-Pacific Journal》 7 (28). 2015년 5월 10일에 확인함. 
  6. “The Exhibition”. 2010년 3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7. “Heritage Trails – A photography journey to document our Singapore heritage”. 2011년 10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8. “Cambridge Dictionary”. 
  9. Yuma Totani (2015). 《Justice in Asia and the Pacific Region, 1945–1952: Allied War Crimes Prosecu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1316300060. 
  10. Kevin Blackburn, "The Collective Memory of the Sook Ching Massacre and the Creation of the Civilian War Memorial of Singapore" Journal of the Malaysi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Vol. 73, No. 2 (279)(2000), pp. 71–90, p.73.
  11. Hayashi Hirofumi. “Massacre of Chinese in Singapore and Its Coverage in Postwar Japan”. 2017년 1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in [Akashi Yoji & Yoshimura Mako (eds.),New Perspectives on the Japanese Occupation in Malaya and Singapore, Singapore,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Press, 2008 Chapter 9.